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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의 중국 민중 투쟁

최근 공안부장인 저우융캉은 2004년에 7만 4천 건의 집단 시위가 벌어졌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2003년보다 30퍼센트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중국의 집단 시위는 1994년에서 2000년대 초까지 연평균 9퍼센트씩 늘어났다. 그러다 새천년에 들어서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노동자와 농민들이 더는 착취와 억압을 인내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정치적 맥락도 봐야 한다.

장쩌민에 이어 새로운 국가 지도자가 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만은 아니었다. 현재 공산당 지도부는 가까운 장래에 대규모 격변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와 농민들의 불만이 집단적 시위가 아니라 국가 기관을 통해서 표출하도록 유도하려 한다.

그래서 농업세가 철폐되고 촌 단위에서 직접 선거가 확대되고 있고, 관변 노조인 중화총공회가 월마트와 삼성 등 외국인 기업과 건설 공사장에서 일하는 민공[도시 이주노동자]의 노조 가입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하지만 농업세와 각종 잡비의 징수를 금지당한 지방 정부들은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수용해 사적 자본가들에게 팔아먹고 있고, 막상 농민들이 선호한 후보가 선거에서 당선하더라도 당선자는 위계적 관료제 속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총공회는 노동자들이 행동에 나설 때 도움을 주기는커녕 공안과 함께 노동자들을 통제하려 들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불신을 받고 있다.

그 결과,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개혁은 실질적 성과보다는 수사적 성격이 더 강하게 됐다. 그러나 이런 수사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중앙 정부가 노동자·농민 행동에 근거가 있다고 말하자 노동자와 농민은 이에 고무받았다. 사실, 중앙 정부가 이런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 지는 꽤 됐지만 친기업적인 장쩌민 정부에 비했을 때 후진타오는 훨씬 서민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지배자들이 일 촌을 양보하면 피지배자들은 십 리를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후진타오는 2004년 10∼11월초까지 전국적으로 무려 3백만 명이 집단 시위에 참가하자 얼굴이 사색이 됐다고 한다.

올 3∼4월 대중적 반일 시위 기간 동안 ‘반정부 패거리’들이 민족주의 시위대에 섞여서 반정부 구호를 외치고 올 5월 키르기스스탄에서 아카예프 대통령을 몰아낸 대중 항쟁이 발생하자, 후진타오는 ‘NGO와 각종 불법 조직’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5∼7월에도 환경 오염 공장 철거를 요구하는 농민 시위, 사적 자본가와 이들을 비호하는 지방 정부에 저항하는 도시민 폭동 등 수만 명 이상이 참가한 항쟁이 발생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져 가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후진타오는 7월 말에 “사회 법질서의 철저한 확립”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회의 자리에서 뤄간 정치국상임위 공안담당 위원은 필요할 때 “강하게 치는” 당의 오랜 원칙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진타오 정부는 쉽게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1999년 공안경찰의 눈을 피해 1만 명의 파룬궁 추종자들이 기습 시위를 벌인 것이나, 최근 동시다발적 시위가 보여 주듯이 개방 이후 일상생활에 대한 당과 국가의 통제력은 통제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화되고 있다.

결국 후진타오는 억압 기구를 계속 가동하면서도 대중의 불만이 투쟁으로 폭발하는 것을 부분적으로 용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억압의 정도를 줄이자 대중 운동이 폭발했던 키르기스스탄에서처럼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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