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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클리프(1917~2000) 사망 20년:
폭풍우를 헤쳐 나간 조타수

팔레스타인 출신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의 창시자인 토니 클리프가 2000년 4월 9일 타계했다. 이 글은 클리프와 함께 활동했던 고(故) 크리스 하먼이 당시 클리프를 기리며 쓴 조사로, 《트로츠키 사후의 트로츠키주의 —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기원》(책갈피)에 실렸다. 재게재를 양해해 주신 책갈피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1986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주최한 ‘맑시즘’ 포럼에서 연설하는 토니 클리프 ⓒ출처 〈소셜리스트 워커〉

2000년 4월 9일 죽은 토니 클리프는 몇 세대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의 놀라운 활력, 모든 억압에 대한 증오, 사상의 명료함이 그 영감의 원천이었다.

클리프는 옛 러시아 제국을 탈출한 유대인 이주민의 아들로 1917년에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치가 독일에서 막 권력을 잡았을 때인 열네댓 살 무렵에 정치와 관계를 맺었다. 그는 나치즘의 공포와 맞서야 했다. 유럽에 살던 클리프 친척들은 대부분 나치 수용소에서 죽었다. 그는 자본가들이 히틀러 집권을 후원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면서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됐다.

그러나 클리프는 사회주의 단체를 자처하는 주요 조직들이 더 나은 세계를 위한 투쟁을 포기했다는 점도 알게 됐다. 처음에 독일 사회민주당은 자기 당원들에게 히틀러와 싸우지 말라고 지시했다. 히틀러가 독일 헌법을 준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소련 스탈린의 지령을 따르던 독일 공산당은 히틀러가 진정한 위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공산당은 물이 엎질러진 다음에야 이런 주장을 철회했다.

클리프는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망명 중인 러시아 혁명 지도자의 호소를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레온 트로츠키였고, 그 방법은 자본주의와 소련을 지배하는 관료 모두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클리프는 억압에 맞서 싸우려면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 이주민들의 사상에도 도전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시온주의 노동조합인 히스타드루트는 아랍인들에게 일자리를 주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좌파 시온주의자들은 영국 제국과 힘을 합쳐 팔레스타인의 아랍 주민들을 억압하는 것이 유럽의 유대인 억압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초기 시절에 관한 클리프의 정치적 기억 가운데 하나는 한 좌파 집회에서 그가 유대인 노동자들에게 아랍 노동자들과 단결하라고 호소했다가 구타당한 일이었다. 클리프가 식민주의를 반대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영국 당국은 제2차세계대전 동안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세계의 3분의 1을 지배하는 제국의 중심부에서 사회주의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한 클리프는 전쟁이 끝나자 영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노동당 정부는 그를 아일랜드로 추방하는 관대함을 보였다! 1950년대 초에 보수당이 재집권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런던에 있던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허용됐다. 이 무렵 그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놀라운 기여를 했다. 당시 서방과 제3세계의 자본주의 반대자들은 99퍼센트 이상이 소련과 그 밖의 동유럽 진영 나라들을 사회주의로 여기고 있었다. 1940년에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한 트로츠키의 지지자들조차 이 나라들이 “변질된 노동자 국가”라는 트로츠키의 견해를 계속 고집하고 있었다. 클리프 자신도 처음에는 이런 견해를 옹호했지만, 그것이 소련의 실상에 맞지 않으며,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글에서 발견되는 국가관에도 맞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클리프는 사회주의자들이 현실과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고 일관되게 착취와 억압에 맞서 싸우려면 소련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견해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겨우 서른 살에 《소련 국가자본주의》[국역: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책갈피)]라는 개척자적인 책을 써서 그러한 견해를 제공했다. 그는 나중에 쓴 글들에서 그의 분석을 동유럽과 중국, 그리고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제3세계 대다수 새 정권들로 확대했다.

그러나 클리프는 이 정권들이 사회주의 정권이 아니라는 점을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 사회들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이 묘사한 것처럼 어떠한 저항도 성공할 수 없을 만큼 정권이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에도 도전했다. 클리프는 소위 ‘공산주의’ 나라들이 또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이 나라들에서는 국가가 유일한 지배자라는 것이었다. 다른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그 체제는 대규모 노동계급을 만들어 냈고, 그 노동계급은 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1956년 헝가리에서, 그 뒤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서, 그리고 결국은 소련 자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미국도 소련도 아니다”라는 그의 구호 덕분에 사회주의자들은 고통스러운 냉전기에 서로 경쟁하는 두 제국주의의 압력에 저항하는 수단을 지닐 수 있었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은 그의 구호 덕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결국 소련이 붕괴했을 때 끔찍한 환멸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다.

클리프는 소련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분석과 나란히 서방 자본주의에 대한 중요한 분석도 내놓았다. 사회주의자들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자본주의가 더는 불황을 겪지 않게 되자 놀랐다. 클리프는 체제가 안정됐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이것이 대량 파괴 무기를 축적하는 미친 짓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이 결국 다시 지독한 경제 위기에 빠지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고 주장했고, 그 주장이 옳았음이 입증됐다. 1974~1975년, 1980~ 1981년과 1990년대에 서방 경제는 다시 위기에 빠졌다.

1950년대에 소련과 서방 자본주의 모두에 대한 환상은 너무나 극심했다. 클리프는 자신의 사상을 경청하는 사람들이 매우 적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가 건설한 조직은 회원이 수십 명밖에 안 됐다. 그래도 클리프는 영국의 끝에서 끝을 오가며 집회에서 연설하고 다녔다. 그는 생애 말년 마지막 몇 달 전까지 줄곧 이런 생활을 계속했다. 1961년에 왓퍼드에서 열린 수십 명짜리 집회에서 했던 연설은 나 같은 젊은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정말이지 뜻밖의 사건이었다. 냉전기에 체제의 양쪽을 분석하고 어떻게 그것에 맞서 싸울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학생운동과 반전운동이 일어났고, 프랑스에서 총파업이 일어났으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반란이 일어난 1968년은 전환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체제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클리프는 많은 경청자를 만나기 시작했다. 그의 조직인 국제사회주의자들IS은 학생들 속에서 급속하게 성장했다. 그 무렵인 1969년에 노동당 정부는 노동악법을 제정하려 했다. 클리프는 이미 직장위원들을 겨냥해 임금 통제 정책의 위험을 다룬 소책자를 출판한 바 있었다. 그 소책자는 2만 부가 팔렸다.

그는 곧이어 생산성 협정을 다룬 책을 내놓았고, 새로운 학생 사회주의자들이 공장과 광산과 부두에 가서 노동조합에 관해 주장하도록 고무했다. 그는 또한 이녹 파월[1950~60년대 보수당 정부에서 장관을 역임한 우파 정치인]이 흑인과 아시아계 주민들을 거듭 공격하는 것을 추종하는 인종차별 물결에 대항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운동을 조직했다. 국제사회주의자들은 1974년 히스의 보수당 정부가 퇴진함으로써 절정에 달한 몇 년간의 파업과 항의 시위 속에서 성장했다. 클리프는 농담과 일화와 은유를 사용해 추상적 사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놀라운 능력 덕분에 많은 활동가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974년부터 노조 지도자들이 새 노동당 정부와 사장들에게 협력하면서 작업장의 소요도 가라앉았다. 사용자들은 투사들의 정치적 혼란을 이용해 노동자 조직들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1979년에 선출된 마거릿 대처는 그 4년 전에 노동당 정부 장관들의 묵인 하에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조처들을 이어받아 마무리했다.

클리프는 다시 한 번 현실을 직시했다. 영국 좌파 가운데 그는 투쟁의 고양기가 끝나고 ‘침체기’가 새로 시작됐다는 점을 깨닫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 그 덕분에 사회주의노동자당SWP(국제사회주의자들의 새 이름)은 철강 노동자들, 광부들, 와핑의 인쇄 노동자들이 패배한 1980년대의 어려운 시기에 대처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클리프는 결코 활동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따로 시간을 내어 레닌과 트로츠키 전기를 완성했다.

클리프는 노동당에 가입해 좌파 인사를 선출하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라는, 1980년대 초에 좌파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생각에 반대했다. 그는 반드시 투쟁이 부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영국,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무엇보다 프랑스에서 국제적으로 새로운 정치적 반감이 커지면서 그러한 조짐을 목격했다.

사회주의 사상의 새로운 경청자들이 생겨났고, 클리프는 다시 사회주의 사상에 관해 연설하는 일에 투신했다. 그는 우리가 대규모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을 건설하지 못하면 체제 위기가 만들어 낸 반감이 1930년대처럼 파시스트 세력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그는 사망하기 겨우 3주 전에 SWP의 신입 당원 학교에서 21세기에 사회주의 조직들이 직면한 과제들에 관해 연설하면서 사회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영국에서만 영감을 준 것은 아니다. 대다수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과 한국·짐바브웨·터키·폴란드 같은 나라에도 클리프가 발전시킨 사상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 조직들이 존재한다. 이 모든 나라 조직의 사회주의자들은 클리프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슬퍼할 것이다. 이 모든 나라 조직에서 우리는 그의 두뇌와 단호함이 너무도 그리울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나라 조직에서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그가 70년 동안 벌인 투쟁에서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우리의 투쟁을 배가할 수 있는 영감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