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정치나 사회운동에서 혐오 표현 문제가 불거지며 종종 논쟁이 일어난다.
얼마 전, 세월호 유가족에 대해 막말을 한 전 미래통합당 의원 차명진은 자신의 발언을 이렇게 옹호했다.
“자유민주주의 교과서에서는 그게 무엇이든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돼서는 안 된다…. 그게 바로 표현의 자유이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관성[이다.]”
“(유가족이 자식의 죽음을) 회 쳐먹고 찜 쪄먹고 뼈까지 발라먹는다”는 역겨운 말을 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다.
수업 시간에 ‘일본군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이라고 말해서 학생들의 항의를 받은 연세대 교수 류석춘도 “학문의 자유”라며 합리화했다.
한편, 코로나 확산 초기에 우파들은 중국인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기도 했다. 황교안은 “우한 코로나”라는 명칭을 고수했고, 일부 우파들은 중국인을 내쫓자고 온라인에서 선동했다.
우파들은 자신들의 ‘망언’이 비판받을 때마다 “표현의 자유”를 방패막이로 삼는다.
하지만 그들이 표현의 자유 운운하는 건 순전한 견강부회다.
마르크스 자신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적해 왔듯이, 표현의 자유는 노동계급 투쟁에 의해 확대돼 왔다. 노동계급은 자신의 결사(대표적으로 노동조합과 그에 기반한 정당)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지난한 투쟁을 벌여야만 했다.
한국의 진보·좌파는 독재 하에서 정부 비판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동아투위(박정희 유신정권 탄압에 항의하다가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이 결성한 단체) 등 검열에 맞선 언론인들의 저항도 있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형식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이 미디어를 지배하며 무엇이 방송·출판될 수 있는지 결정하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때때로 법적 장치들로 공개적인 표현을 제약할 수도 있다.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혁명적 또는 친북적 사상과 견해, 단체 결성을 탄압할 수 있는 효과적인 무기이다.
그러므로 표현의 자유를 말할 때는 누구의 자유이고, 무엇을 말할 자유인지를 물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처럼 표현의 자유를 그저 받들어야 할 추상적인 가치로 여기지 않고 구체적 맥락 속에서 본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란 노동자와 천대받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국가 규제의 위험성
그렇다면 우파적이거나 반동적인 표현을 막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반동적 인사들의 발언 기회를 원천 봉쇄하는 표현 자유 불허(“노 플랫폼”)가 피차별자 운동에서 흔히 지지 받는다. 이런 입장은 원래 서구에서 나치에 맞서기 위한 혁명적 좌파의 특수한 전술로 제기된 것인데, 오늘날은 그 범위를 크게 확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파시즘은 여느 우파와 달리 노동계급의 민주적 권리를 모조리 분쇄하려는 특별히 반동적인 정치 운동이다. 따라서 표현 자유 불허 전술을 무분별하게 확장해서는 안 된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국가가 나서서 우파나 보수적 개인들을 규제(처벌)하라고 요구한다.
여러 우려와 논란이 있지만, 한국에서도 다수 인권 운동가들이나 법학자들은 혐오 표현에 대한 국가 검열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듯하다. 이런 의견을 종합한 국가인권위원회의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2016년, 이하 연구)는 혐오 표현을 국가가 규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규제 수위에는 이견이 있는 듯하지만 좀 더 엄격하게 혐오 “선동”을 규정하고 이를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도록 입법해야 한다는 의견도 꽤 있다.
예컨대, 지난해 말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를 낸 이정희 전 의원은 인종차별적 혐오 선동에 대해 제한적으로 형사처벌을 입법하자는 의견을 냈다. 이 전 의원은 공직자, 정당인, 언론기관 종사자 등 파급력이 큰 사람들의 경우에는 단순유포도 처벌 대상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대체로 ‘사상의 자유시장’론으로는 혐오 표현이 없어질 수 없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다. 차별을 겪는 소수자들은 혐오에 대항하는 표현을 내기가 더 힘들고, 결과적으로 혐오 표현이 훨씬 더 많이 유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경제에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상과 관념의 시장에 대해서도 정부가 일정 부분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국가인권위원회 연구)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사상의 시장’은 원천적으로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불공정성을 바로 세우려고 자본주의 국가를 지렛대로 삼는 건 효과는커녕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다.
우선, 국가가 혐오 표현을 규제해도 혐오 표현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역사적 경험이다.
부메랑

대중 운동
국가의 힘으로 혐오 표현을 규제하는 것은 얼핏 더 쉽고 빠른 대안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인종차별, 여성차별, 성소수자 혐오 등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비롯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차별과 혐오를 체계적으로 재생산하고 부추긴다. 사람들의 차별적 편견은 자본주의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경제 위기가 심각하고 노동자·서민들이 위기 때문에 큰 고통을 겪자, 각국 지배자들은 불만의 화살을 피하려고 속죄양을 찾고 차별과 혐오를 부추겨 왔다.
이런 우파와 지배자들의 차별 편견 부추기기에 맞서려면 그들의 주장을 낱낱이 반박하고 대항적인 집회와 항의를 조직해서 그들의 사상이 결코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는 게 중요하다. 차별과 혐오에 맞선 대중 투쟁 속에서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강요하는 차별적 생각이 아닌 평등주의적 생각들을 받아들이고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국가나 지배자의 간섭 없이 말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지, (아무리 진보적인 생각이더라도) 아래로부터의 반론이나 항의 없이 말할 권리를 보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논쟁해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게끔 노력하고, 대중 동원에 힘써야 한다. 대중 운동이야말로 차별에 맞서고 기존 관념을 바꾸는 진정한 동력이다.
2017년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나치가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를 공격한 것에 맞서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건 좋은 사례다.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에 기세가 눌린 나치와 극우파는 자신들의 시위를 취소하거나 매우 소수만 모일 수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 권리를 지키거나 확대하기 위한 투쟁을 중시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계급정치로 무장하고 조직하고 행동할 권리를 옹호해야 한다. 그것이 지배자들에 맞서는 진정한 힘을 얻고 강화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