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미국의 뉴딜과 노동운동:
계급 협력 노선의 우울한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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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읽기 전에 “뉴딜 정책이 미국을 대불황에서 구했나? ”를 읽으시오.
문재인이 한국판 뉴딜을 발표하자 진보·좌파 진영에서는 ‘진정한’ 뉴딜이 아니라거나, 경제 성장 그 자체만을 목표로 삼는 뉴딜이 아니라 그린뉴딜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와 동시에, 1930년대 미국에서 실행된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이 노동운동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한국판 뉴딜을 제시한 문재인 정부에 대해 비판 일변도가 돼서는 안 되고 사회적 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런 점들 때문에 루스벨트가 뉴딜 정책을 펼쳤을 때 당시 미국의 노동운동과 좌파가 취한 입장과 실천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29년 대불황은 기업들에게 타격을 줬지만 노동자 대중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들이 겪은 가장 큰 고통은 실업이었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한 1933년에 미국의 실업자는 1500만 명으로 전체 노동력의 3분의 1 또는 4분의 1이나 됐다. 예를 들어 포드 자동차는 1929년에 12만 8000명을 고용했지만 1931년에는 3만 7000명으로 대폭 줄었다.
경제 불황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퇴역 군인들이 나섰다. 1932년 보너스
우익인 맥아더가 우려할 만도 했던 것이 1929년 대불황 이후 미국 전역에서 노동자 투쟁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캐롤라이나주
1931년 7월에는 디트로이트시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했던 1933년은 미국 자본주의가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위기에 처했던 때였다. 그가 추진했던 뉴딜 정책은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하고 체제를 안정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실업자들의 저항 그리고 소작농들의 반란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경제 회복
뉴딜의 핵심 정책 중 하나인 전국산업부흥법
루스벨트는 노동자 조직이 강한 영역에서는 노동자들에게 모종의 양보를 했지만 노동자 조직이 허약한 곳에서는 기업들이 주도하도록 내버려뒀다. 한 역사가는 “몇몇 대기업들이 전국산업부흥법의 특정 조항 때문에 난감해했지만 전국산업부흥법은 이들 대기업들의 권력을 재확인하고 공고히 해 줬다”고 평가했다.
농산물의 폭락을 막고 농민들을 지원하는 농업조정법
테네시 계곡 개발계획이 ‘사회주의적’이라는 비난이 있었어도 전체적으로 뉴딜의 경제 정책은 자본주의 경제 회복이 주된 목표였다. 그와 동시에, 하층민들의 반발이 혁명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에게 일정한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자주적 행동이 성장하는 것을 제약하려는 목표도 있었다.
노동자들은 뉴딜 정책의 효과를 기다리기보다는 투쟁을 벌였다. 자발적인 투쟁들이 폭발했다. 1934년 초 노동자 150만 명이 파업을 했다. 부두 노동자들과 트럭 운전사들도 가세했다. 1934년 여름에는 미네소타주
이런 분위기에서 1934년에 와그너-코너리 법안
그러나 와그너법은 지배자들이 노동자들에게 제공한 하사품이 아니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노동쟁의에 직면해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만든 법이었다. 그래서 철강회사가 위헌 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이 법이 합헌적이라고 판결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입장에서도 유용한 법이었는데,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데 유리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승인을 받지 않고 벌이는 비공인 파업을 단속하는 데도 쓸모가 있었다.
급진화
당시 여러 부문에서 노동조합들이 새롭게 결성됐다. 현장 조합원들의 파업과 폭동이 노동조합의 신규 조직화를 촉진하고 노동조합 지도부를 행동하도록 압박했다. 이 당시 노동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점거파업은 1930년 초반 오하이오주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고 산업별노동조합회의
공산당은 산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기반을 마련했다. 공산당은 CIO에서 신규 노조 조직을 주도한 수많은 현장 지도자들을 포괄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자동차 부문에서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1936년 애크런 타이어 노동자들의 파업과 GM 플린트공장 점거파업을 이끌 수 있었다.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반혁명을 통해 1917년 혁명이 이룩한 성과들을 파괴하고 있었지만 소련 밖에서는 공산당들이 러시아 혁명의 계승자를 자처했고, 또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공산당과 스탈린을 대안으로 여기고 있었다.
공산당의 구실
1935년 스탈린이 통제하던 코민테른
1936년 대선이 다가오자 공산당은 루스벨트를 지지했고, 공산당의 현장 간부들에게는 CIO 지도부를 도와 루스벨트에게 노동계급 표를 몰아주라는 지침이 하달됐다. 노동자들이 파업 운동을 거치며 대규모로 급진화하려던 바로 그때 공산당은 도리어 투쟁적인 노동자들을 단속하려 애썼다. 민주당과 단절할 준비가 돼 있던 많은 투쟁적 노동자들이 결국 좌절을 겪었고, 그때 이래 오랜 시간 동안 노동운동은 민주당에 절반쯤 종속된 상태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공산당의 해악적 구실은 플린트 점거파업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CIO의 지도자 존 L. 루이스는 파업이 승리로 끝나자마자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제하려 들었는데, 공산당의 협조 덕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공산당 기관지
공산당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이 있었다. 하지만 공산당은 혁명을 포기했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전진시키기는커녕 저버렸다. 그 결과 공산당은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조직에서 반쯤은 중간계급적 조직으로 변형됐다. 즉, 공산당은 현장 조합원들이 아니라 노동조합 간부들을 통해서 노동조합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직으로 변모했다.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군비 확장으로 호황이 찾아오자, 루스벨트는 CIO 내 급진세력들의 도움이 필요없어졌다. 공산당은 토사구팽의 처지가 됐다. 그런데도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하면서 공산당은 루스벨트와 CIO 지도부에 대한 무비판적 지지로 돌아섰다. 전후 J. R. 매카시 상원의원이 반공주의 마녀사냥을 벌이자 공산당은 민주당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지지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이처럼 1930년대의 미국 경험은 부르주아 정당을 지지한 것이 노동운동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는 노동계급의 독립성을 훼손해 민주당으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의 성장이 억제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한국에서 민주당과의 ‘뉴딜 동맹’을 추구하자는 주장이 위험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