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중국공산당과 그 당의 지도자들은 중국이 사회주의 종주국인 양 행세해 왔다. 2018년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은 “마르크스주의가 당·국가 지도사상으로 사상적 무기를 제공했고 중국을 낡은 동방대국에서 인류사상 일찍이 없던 발전의 기적을 이루게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노동자 계급의 자력 해방으로 이해했다. 그 기준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은 그 탄생과 운영 모두에서 사회주의 사회라 할 수 없다.

1949년 10월 마오쩌둥이 이끄는 인민해방군이 장제스의 중화민국을 중국 대륙에서 몰아낼 때 도시의 노동자 대중은 방관자로 있었다. 도시의 노동자 대중 속에는 공산당 세포가 거의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와 국민당의 탄압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중국공산당이 노동자 대중을 떠나 농민에 기반한 게릴라 투쟁을 의식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1928년 공산당의 노동자 당원 비율은 10퍼센트에 불과했다. 1930년 9월에는 1.6퍼센트, 그해 말에는 거의 0퍼센트였다. 이때부터 마오쩌둥이 1949년 최종 승리를 거둘 때까지 중국공산당에는 이렇다 할 산업 노동자 당원이 없었다.

현대 중국 역사 연구자 모리스 마이스너는 당시의 중국공산당을 이렇게 지적했다.

“관제 이론은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도시 노동계급과 당의 유대는 1927년에 이미 끊어졌으며, 이후 도시 노동계급은 공산주의 혁명이 농촌에서 승리할 때까지 정치적으로 수동적인 상태에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규모가 크게 늘어나고 공산주의자들이 도시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1957년 말에도 공산당원 중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14퍼센트에 불과했다.”(《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권, 이산, 102~103쪽)

1949년에 마오쩌둥은 중국이 네 계급(노동자, 농민, 상인, 학생)에 기반을 둔 인민민주주의 국가라고 선포했다. 1950년대 중반에 “인민민주주의 독재 즉 실질상의 무산계급 독재”가 확립됐다는 선언이 나왔다. 그 사이에 사회 구조의 근본적 변화나 노동자 계급의 궁극적 승리가 없었다. 

마오쩌둥은 ‘농민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지도’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런데 중국이 건국될 때 노동자 계급의 기여나 구실이 없었고 중국공산당이 노동자 계급 정당도 아니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의 지도’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공산당)의 지도라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실질상의 무산계급 독재’는 이데올로기를 통한 실현을 뜻한다는 점에서 조야한 관념론이며 노동자 계급을 대신해 그 계급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공산당의 지도를 뜻한다는 점에서 대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이 노동자 계급을 위해 존재한다는 이데올로기조차 세계 자본주의가 가하는 압력과 경쟁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냉혹한 중국의 현실과 모순을 빚었다.

생존과 자본 축적

마오쩌둥의 중국은 늘상 세계 자본주의가 가하는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압력 속에서 생존해야 했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은 강력한 국민국가 건설을 ‘하늘의 뜻’(天命)으로 삼았다.

인민공사는 중국판 강제 농업 집산화를 통해 형성됐다. 인민공사를 통해 만들어진 잉여 농산물은 도시의 노동계급에게 저렴하게 제공됐고, 국가는 적은 비용을 들여 중공업 중심의 축적에 매진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강력한 국가 건설을 위해 중공업 발전을 추진하면서 노동자 대중의 희생을 강요했다. 중국 국가 등장 초기인 1953년과 1957년에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파업을 벌이며 저항하자 신디컬리즘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때 이후로 중화전국총공회(中华全国总工会)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한 단체가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노동생산성을 독려하는 국가 기구의 일부가 됐다.

건국 초기에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실질적인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1956년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하고 미국과 평화 공존을 추진하는 한편, 중국 국경선에서 군사적 충돌을 마다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중국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마오쩌둥이 물질적 조건을 건너뛰고 주의주의(主意主義)에 기초해 중국을 서둘러 ‘공산주의 사회’로 바꾸려 시도했던(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이유 중 하나는 세계 제국주의 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절박감 때문이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 패배로 국제 무대에서 상대적으로 위축된 반면, 소련의 위세는 더 커졌다. 소련은 중국과 대립하던 인도를 지지했고 베트남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한 호치민 정부가 중국 편이던 폴 포트의 캄보디아를 공격했다. 1968년에 소련 군대는 체코슬로바키아를 공격해 노동자 저항을 짓밟았고, 1979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이를 보고 중국 지도자들은 소련이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했다고 생각했다. 중국은 소련의 위세에 맞서기 위한 대응책으로 1972년 닉슨과의 핑퐁 외교를 거쳐 1979년에 미국과 정식 수교를 체결했다.

중국이 소련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미국에 줄을 댄 것은 저우언라이가 발휘한 외교적 ‘수완’이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이 만들어 놓은 질서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1978년 중국이 서방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것도 점점 뒤처지고 있던 기술력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1972년 2월 21일, 미국 대통령 닉슨이 중국 국가주석 마오쩌둥과 회담하러 북경을 방문했다

개혁과 개방

흔히들 1978년 개혁과 개방 정책 이래로 민간기업이 등장하면서 중국이 사회주의에서 모종의 자본주의로 바뀌었다고 본다. 그 반대에서는 공산당의 지배와 국유기업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중국은 여전히 사회주의(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고 본다.

두 견해 모두 같은 전제를 공유한다. 즉, 국유화를 사회주의의 의미로 오해한다. 개혁과 개방 정책의 결과로 시장화가 확대되고 민간기업이 증대했지만 사회의 기본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1978년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봐도 노동자와 농민들은 여전히 착취당할 뿐 아니라 기본적 인권조차 무시당하고 있다. 고위 국가 관료와 국유기업 총경리(사장) 그리고 시장 개방 이후 국가 관료에서 민간기업 사장으로 변신한 이들은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해 여전히 부유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시장 개방을 통해 바뀐 것이 있었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들을 장악하고 통제했다면, 시장 개방 이후에는 국가가 경제의 핵심 영역들을 장악하고 나머지 영역에 대해서는 시장과 민간기업의 진출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장 개방으로 사회의 계급적 구조가 바뀌지는 않았지만,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을 도입한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형태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변화가 노동자 대중에게 이득이 된 것은 아니었다. 1978년 이래로 지금까지 국내총생산은 270배 증가했지만 빈부격차는 더 악화됐다. 1978년 당시 지니계수는 0.22에 지나지 않았지만 2017년에는 0.467을 기록했다. 2억 8000만 명에 이르는 농민공들은 여전히 저임금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마오쩌둥 시절의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대안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오쩌둥 시대에 노동자와 농민들은 강력한 국민국가 건설과 이를 위한 중공업 우선 정책을 위해 초착취를 강요받았고 운이 나쁘면 굶어죽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 경쟁

중국 정부는 제국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둘러 자본 축적을 해야 했다. 이를 위해 노동자와 농민의 잉여를 착취하기 위해 이들을 통제하고 억압해야 했다. 그래서 중국 헌법에 명시된 “노동계급이 지도하는 … 실질상의 무산계급 독재”는 현실에서는 노동계급에 대한 독재를 뜻했다.

문화혁명 때 억압적인 노동 과정과 저임금 때문에 노동자들이 저항에 나섰고, 마오쩌둥이 시인했듯 내전에 이를 정도로 격렬했다. 하지만 인민해방군은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진압했다. 1989년 톈안먼 항쟁은 비극으로 끝났다. 중국 지배자들은 민주주의를 외치던 학생과 노동자 수천 명(일설에는 수만 명이라고 한다)을 살해했다.

1990년대에 국유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자 6000만 명이 집단으로 해고됐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까지 민간기업의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조합의 권리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남동부 연안의 산업단지들에서는 농민공들의 투쟁과 저항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중국 지배자들은 이처럼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체제를 두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고 주장한다.

중국 지배자들의 사회주의 강변은 그 나름의 유용성이 있다. 2000년대 이래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특히 미국과 치열한 제국주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 지배자들이 중국을 사회주의 종주국으로 내세우고 또 미국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두 가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첫째, 노동자와 소수민족 같은 내부의 반란 세력들을 단속하고 중화민족주의라는 애국주의를 부추겨 내부를 결속시킬 수 있다. 둘째, 중국을 모종의 사회주의나 진보적 사회라고 여기는 진보 세력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

중국 국가 지도자들은 중국이 소수민족을 억압하고 제3세계 독재자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제국주의 열강임에도 중국이 1840년 아편전쟁 이래로 제국주의 열강에게서 억압당했다는 점만 강조하며 피해자 행세를 한다. 

그러나 중국의 역대 지도자들이 친밀함을 과시했던 인물들 중에는 베트남 전쟁의 전범인 리처드 닉슨, 킬링 필드의 학살자 폴 포트, 스페인의 파시스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짐바브웨의 장기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 등이 있었다. 중국 지도자들의 이런 ‘흑역사’는 분명 사회주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제국주의적 갈등이 첨예해지고 있다. 그 일환으로 남중국해에서 군사적 긴장도 높아지고 있다.

중국 정부가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에 나서면서 이에 맞서 홍콩 대중의 저항도 다시 시작되고 있다.

중국 정부의 권위주의적 억압 5월 24일 홍콩 국가보안법과 국가법(國歌法)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폭력적으로 연행되는 홍콩 시민들 ⓒ출처 Studio Incendo

이런 상황에서 중국을 모종의 사회주의 사회라고 보거나 진보적 성격이 있다고 여기면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세계에 맞서 중국을 편들게 될 것이다.

그 반대로 중국이 정치적·시민적 권리조차 인정하지 않는 억압적 통치 때문에 서방보다 못한 전체주의 사회라고 여기면 오히려 서방을 편들 수 있다.

중국 사회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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