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동운동 내에서 정규직의 선제적 임금동결론이 공공연히 제기됐다. 이남신 한국비정규직노동단체네트워크 의장, 한석호 전태일50주기 사업위원장 등(이하 존칭 생략)이 여러 차례 〈매일노동뉴스〉에 칼럼을 쓰며 선제적 임금동결론의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개인들의 제안만은 아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위원장은 6월 18일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올해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분으로 연대기금을 조성해 취약계층 지원에 쓰자고 제안했다.

두 노총 위원장의 제안에 발맞춰, 한석호·이남신도 ‘취약 노동자를 위해 노동운동과 양대 노총이 자기 대안을 내야 한다’며, ‘정규직 임금을 선제적으로 동결하는 대신 취약 노동자 보호를 위한 연대기금을 제안하고, 전 국민 고용보험 같은 사회안전망을 갖추도록 만들자’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이것은 이미 2000년대 중반 이후 온건한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개혁주의 정치인들이 꾸준히 제기해 온 ‘사회연대전략’의 취지이다.

물론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노동조합 부문주의의 한계를 넘어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의 처지를 함께 개선하며 계급적 단결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연대전략은 “선한 의도”를 잘못 구체화하고 있다.

두 노총이 대기업 정규직 임금 동결을 제안했지만 사용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6월 30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제2차 노동인력위원회’ ⓒ출처 중소기업중앙회

사회적 압박?

이들은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이 임금 동결이나 복지 비용 인상 등 선제적 양보를 하면 사용자들을 압박하는 사회적 여론이 생길 것이라고 본다. “노동계가 임금을 동결하겠다고 제안하면, 그다음 수순은 재벌은 뭐하냐는 사회적 압박이 따른다”는 것이다. 한석호는 “양대 노총이 실제 임금 동결을 선언하고 제안할까 봐 [재벌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허풍을 친 바 있다.

그러나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두 노총이 정규직의 임금인상분으로 연대기금 조성에 참여하겠다는 양보안을 내놓았음에도 사용자들은 ‘사회적 압박’에 전전긍긍하기는커녕 오히려 노동계에 더한층의 양보를 요구했다.

사용자들은 자신들도 돈을 내야 하는 연대기금 제안에는 콧방귀를 뀌고, 노동계에게 임금 동결을 넘어 임금 삭감과 노동시간 유연화를 요구했다. 사용자들은 최저임금 삭감도 요구하고 있고, 전국민고용보험에 추가로 재원을 부담할 의사가 없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정부도 노동계를 협상 테이블에 앉혀 두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 취약계층 노동자 보호에 획기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압박은 전혀 받지 않았다. 정부는 자신이 약속한 전국민고용보험을 위해서도 재정 투입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는 사용주들을 편들며 공공부문의 임금체계 개편을 추진하고 있고, 탄력근로제 확대 법안이 국회에서 지체되자 특별연장근로를 거듭 확대해 줬다.

사회연대전략 제안자들이 제기한 선제적 임금 동결, 복지 부담 확대 방안은 일부 자유주의적 언론들의 호의적 반응을 일시적으로 이끌어 냈을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정부와 사용자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을 가하는 데는 전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정부와 사용자들이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에서 이윤 지키기에 혈안이 돼 있기 때문이다. 취약계층 노동자들을 포함해 노동자들을 쥐어짜야만 이윤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제적 임금 동결을 바탕으로 한 노사정 협력으로 서로 윈윈 할 수 있다는 사회연대전략은 비현실적이다. 선제적 양보론은 협상 테이블에 앉은 노동계 대표가 자신의 위신을 세우는 방안이 될 수는 있어도 실제로 정부와 사용자들을 압박하는 카드가 될 수는 없다.

정부와 사용주들에게 진정으로 양보 압박을 가하고 취약계층의 권익을 보호하는 정책을 시행하도록 하려면 사용자들이 정부에 가하는 압력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노동계급이 발휘해야 한다. 즉, 이남신이 가망성이 없다고 본 “재벌자본을 압박하는 총파업”의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선제적 임금동결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추구해야 한다.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들은 임금 동결을 제안하며 자기 투쟁을 자제할 게 아니라 자신들이 임금과 고용을 위한 투쟁에서 발휘하는 힘을 작업장 밖으로 확장해 취약노동자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

현실이 이런데 이남신 등이 정규직의 임금 동결 등 선제적 양보 방안을 고집하는 것은 정규직 노동자들이든 취약계층 노동자들이든 경제 위기 시기에는 투쟁에 나설 수 없다는 점이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를 두고, 재벌 자본을 압박하는 총파업도 나쁘지 않다. 그렇게 안 될 바에는 노동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임금[동결]이다.”

그들은 사회적 대화 같은 협상장에서 무언가 주고 받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본다. 사회연대전략 제안자들이 사회적 대화에 집착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사회적 대화에 집착해서는 노동자들의 조건 방어나 개선에 도움이 안 된다.

사회적 대화 집착

첫째, 사회적 대화 자체가 타협을 전제로 성립되는 것이므로 사용자들의 개악 요구를 무조건 반대할 수는 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용자들의 개악 요구가 일부라도 수용된다면 비정규직 같은 취약계층 노동자들은 더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번 노사정대표자회의 합의문이 나오자 많은 비정규직들이 반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40조 원이나 되는 돈을 대기업에 퍼 주면서도 이번 합의안에는 가장 먼저 해고되는 비정규직에 대한 고용 유지 방안은 빠졌다. 경영 위기에 직면한 기업에서 근로시간 단축, 휴업, 휴직 등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고 돼 있는데, 노조도 없는 취약 노동자들은 사실상 해고와 다름없는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양보론을 내놓고 교섭에 목매는 방식으로는 결국 취약계층 보호에 집중한다는 사회연대전략의 목표도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다.

둘째, 지도부가 정규직 양보안을 지렛대로 취약계층 노동자들의 조건 개선 방안을 받아내겠다며 대화에 집중하면 노동자들은 상층의 대화(협상) 결과를 기다리며 지켜보는 수동적 처지가 되기 십상이다. 상층에서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노동자들은 당면한 조건 후퇴나 고용 위협에 맞서 싸우기 어려운 분위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봤듯이 대화가 추진되는 동안에도 정부와 사용주들은 양보할 생각은커녕 개악안들을 착착 추진한다. 결국 노동자들에 대한 양보 압박만 커지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집단적 저항 대신 수동화되면, 사용자들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더 취약해진다. 선제적 양보론의 결정적 해악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오히려 선제적 임금 동결론은 노동운동의 단결에 나쁜 효과를 미친다. 취약계층의 열악한 조건이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탓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반면, 정규직 노동자들은 취약계층 노동자들을 지원하느라 자기들의 조건이 하락한다고 여기게 될 수 있다. 사용자들은 ‘노동귀족론’ 등을 선전하며 노동계급 부문 간에 이해관계가 상충한다는 생각을 퍼뜨리고 노동자들을 이간질하려 할 것이다. 결국, 정부와 사용자들의 양보를 강제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은 오히려 더욱 멀어질 것이다. 지금 선양보론이 이남신이나 한석호의 허풍 같은 구실을 못하는 이유이다.

사회연대전략의 제안자들은 한사코 부정하지만, 상대적 고임금의 노동자가 임금 인상 투쟁을 포기하는 것은 나머지 노동자들에게도 악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2018~2019년에 금속노조는 “하후상박 연대임금” 방안을 채택한 바 있다. 즉, 현대·기아차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요구를 낮추는 대신 현대·기아차 사측에게 부품·하청사 노동자에 대한 임금 지원을 요구해 임금 격차를 줄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속노조 지도부는 이 방안을 2년 만에 슬그머니 폐기했다. 부품사 노조들이 일명 “양재동 가이드라인”(현대차 임금 가이드라인)에 가로막혀 임금 투쟁이 더 어려워졌다고 불만을 제기했기 때문이다.(더 자세한 내용은 본지 315호에 실린 기사 ‘금속노조의 연대임금 추진 중단은 무엇을 보여 주는가’를 보시오.)

요컨대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이 양보하면 더 많은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는 완전히 비현실적이다. 무엇보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나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양보적 합의는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를 꺾어 개혁의 진정한 동력을 약화시킨다.

그런 점에서 상대적으로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들을 위해 양보하자는 제안은 아무리 좋은 취지에서일지라도 연대를 강화하는 방법도, 노동조건을 방어할 비법도 되지 못한다. 정작 연대 투쟁을 건설해 나가야 할 노동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단결을 해칠 위험이 크다.

조직 노동자들이 연대를 강화하는 진정한 방법은 조건을 양보하는 게 아니라, 정부와 사용자들에 맞선 광범한 저항을 조직해 조건 후퇴를 막고 노동자들의 즉각적 필요를 강제해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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