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평생의 동지였다

사회변혁노동자당(변혁당)의 기관지 〈변혁정치〉에 이재유 씨(이하 존칭 생략)가 “맑스주의 철학 논쟁사”라는 글을 연재하고 있다. 지금까지 두 편의 글이 실렸는데, “맑스주의, 실천적 철학을 향해”(112호, 2020년 9월 1일 자)와 “엥겔스, 맑스주의 논쟁사의 시작”(114호, 2020년 9월 30일 자)이 그것이다. 특히 두 번째 글은 엥겔스가 마르크스와는 다른 사상을 견지했다고 주장한다.

이재유는 엥겔스가 “과학화 경향”에 경도돼, “맑스의 저작에서는 전혀 생소한 개념인 ‘물질’” 개념을 도입해 또 다른 형이상학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헤겔이 세계를 절대정신의 전개 과정으로 봤다면 엥겔스는 세계를 “물질”의 전개 과정으로 봤다는 것이다. 이는 “헤겔의 변증법을 뒤집은 것,” 즉 거울 이미지에 불과한데, 둘 다 세계를 어떤 궁극적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과정으로 설명하는 목적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계가 물질의 운동 과정에 불과하다면, 인간은 거기에 휩쓸려가는 존재일 뿐일 것이다. 이재유의 설명은 결국 엥겔스가 기계적 유물론의 연장선 상에 있다는 것이다.

또, 이재유는 엥겔스가 “부르주아 국가에 대해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고 “혁명적 내용이 상당히 약화”됐다고 평가한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카우츠키의 ‘경제결정론’의 씨앗도 엥겔스에 있다고 한다. 이재유는 엥겔스 세계관의 “이중성”이 낳은 “경험론(유물론)적 형태”와 “합리론(관념론)적 형태”가 각각의 사상으로 이어졌다고 하는데, 그 “이중성”이 무엇이고 어떻게 두 사상과 연관돼 있는지는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만일 실제로 엥겔스의 세계관이 기계적 유물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목적론이라면, 그런 세계관이 경제 결정론이나 숙명론으로 이어지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엥겔스에 대한 이런 식의 평가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엥겔스 탄생 20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기 동안 엥겔스는 그 적들에게나 지지자들에게나 마르크스의 분신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엥겔스의 명성은 기이한 운명을 맞이했다. 좌파 진영 내에서 엥겔스와 마르크스를 대립시키는 시도가 유행했다. 이는 보통, 스탈린주의에 반발해 다른 마르크스주의를 찾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곤 했다.

그러나 미국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핼 드레이퍼(1914~1990)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엥겔스를 도려내려는 시도를 매섭게 비판한 바 있다. “[엥겔스를 도려냄으로써 생기는] 그 공백이 클수록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자기만의 판타지를 그 안에 마음대로 채우기 용이해진다.” 이 점에서, 엥겔스를 옹호하는 것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이재유의 글을 비판하면서, 학계와 일부 좌파들 사이에 퍼져 있는 흔한 왜곡에서 엥겔스를 옹호하고자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협력

우선, 엥겔스를 마르크스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시도는 매우 기초적인 사실 관계와도 맞지 않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처음 만난 이후 평생의 동지였고, 팔레스타인 출신 마르크스주의자 토니 클리프의 표현처럼 “서로에게 지적 자양분을 제공해 준, 땅콩 껍질에 든 두 땅콩”과 같은 존재였다.

엥겔스는 자신을 마르크스의 “이인자”로 낮춰 부르곤 했지만, 둘의 관계는 단지 마르크스가 이끌고 엥겔스가 따르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를 대등한 토론 상대로 여겼고 “그래서 엥겔스를 설득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했다.”(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 엥겔스는 여러 차례 마르크스를 앞질러서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사항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예컨대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결정적 중요성을 마르크스보다 먼저 이야기했다. 이는 엥겔스가 당시 세계 최대 공업국인 영국에서 최초의 노동계급 대중운동인 차티스트 운동을 먼저 접했기 때문이다.

또,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철학에서 정치경제학으로 시선을 돌리는 데에서 길잡이 구실을 했다. 1843년 엥겔스가 쓴 《정치경제학 비판》은 마르크스가 이후 40년 동안 《자본론》을 집필하는 출발점이 됐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공통점을 확인한 이래 《독일 이데올로기》, 《신성가족》, 《공산당 선언》 등 여러 권의 책을 공저하거나 서로의 이름으로 대신 글을 써 왔다. 다소 의식적인 분업도 있었다. 엥겔스는 대중적 해설이나, “당” 문제, 특별히 능통한 몇몇 분야를 다루곤 했다. 마르크스가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두 사람의 공동 입장이 엥겔스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경우가 많았다. 마르크스는 “우리는 공동의 계획과 상의 하에서 함께 작업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가 원고를 발표하기 전에 교정을 보고 엥겔스와 토론했다.

공동 작업은 단지 이론적인 것에 그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의인동맹(독일계 이민 장인들의 비밀 결사체)에 가입해서 그 조직을 설득해 공산주의동맹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함께 노력했다. 제1인터내셔널을 창립했을 때도 두 사람은 그 안에서 논쟁에 동참하고 조직 문제에 함께 관여했다.

두 사람은 수많은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문하고 조언했다. 1870년 9월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생계를 지원하려고 자신의 공장을 처분하고 마르크스의 집 근처로 이사를 간 뒤로 마르크스와 매일같이 붙어 지냈다. “서로가 서로의 집을 방문하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마르크스의 사위 라파르그) “[1870년 이후] 10년 동안 엥겔스는 매일같이 아버지의 집을 방문했다. 오랫동안 함께 산책을 나가기도 했지만 아버지 방에 머무는 경우도 많았다. ⋯ 그 방 안에서 어느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할 철학 그 이상을 토론했다.”(마르크스의 딸 엘리너 마르크스)

핼 드레이퍼가 지적하듯이, 두 사람이 그렇게 붙어 지내면서 그날 날씨나 중세 프랑스 운문, 고대 전투 대형에 대해서만 토론하고 당대의 중요한 정치적·이론적 쟁점들은 이야기하지 않았다거나, 그래서 서로의 생각이 달라지고 있는지도 몰랐다고 하려면 대단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 사후의 엥겔스

이재유는 “맑스 생전에 맑스와 함께 활동했던 엥겔스가 아니라, ‘맑스 사후의’ 엥겔스”에서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반하는 흐름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주장도 참말이 아니다.

엥겔스를 마르크스에게서 떼어놓으려 할 때 자주 언급되는 《반뒤링론》(이재유의 글에서도 그런 사례로 언급된다)은 사실 마르크스가 살아 있을 때 나온 책이다. 당시 독일사민당 내에서 반향을 얻고 있던 학자 오이겐 뒤링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이 책의 기본 아이디어는 마르크스가 제시한 것이기도 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초고를 읽게 했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가 경제에 대해 한 장을 쓰기도 했다.

마르크스 사후에 나온 엥겔스의 저작들은 어떠한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은 마르크스가 남긴 민속학 노트를 활용한 것이었다. 엥겔스는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을 출판할 때 자신이 발견해 낸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부록으로 실었다. 엥겔스는 이 《테제》를 역사 유물론의 “빛나는 핵심”이라고 칭찬했다. 《테제》는 청년 마르크스가 기계적 유물론과 관념론을 모두 비판한 짧은 메모인데, 엥겔스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이재유는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서 벗어난 “유물론의 성격을 ⋯ 《자연변증법》에서 밝힌 바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엥겔스를 공격하는 데에 자주 동원되는 이 책은 그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다른 일에 밀려 늘 집필이 미뤄졌고, 그가 죽고 한참 지난 후인 1925년에야 처음 출판됐다. 그 원고는 집필을 위해 작성한 한 다발의 메모에 지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개정돼야 할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자연에도 변증법이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엥겔스뿐 아니라 마르크스의 관점이기도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봤고, 그래서 인간 세계와 자연 세계에 완전히 별개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견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재유는 엥겔스가 보인 “과학화 경향”의 배경 중 하나로 엥겔스가 자연과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점을 든다. 그러나 마르크스도 그 관심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을 준비하면서 생물학, 화학, 지질학, 광물학 등을 자세히 파헤쳤으며, 그가 생애 마지막 15년 동안 남긴 방대한 양의 필기(평생 남긴 필기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중 절반은 자연과학에 관한 것이었다.(마르크스의 첫 논문이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과 자연철학에 관한 것이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엥겔스의 “과학화 경향”?

이재유가 문제삼은 엥겔스의 “과학화 경향”은 무엇이고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살펴보자.

엥겔스는 《사회주의 —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렸다. 그런데 흔히들 “과학” 하면 자연과학을 떠올리곤 하는데, 과연 엥겔스는 자연과학의 방법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려 했던 것일까?

먼저,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과학”이라는 말로 뜻하고자 했던 바를 분명히 해야 한다. 흔히 “과학”으로 번역되는 표현인 독일어 “비센샤프트(Wissenschaft)”는 핼 드레이퍼가 지적했듯이 그보다 더 포괄적인 “지식”이나 “앎”을 뜻한다. 여기에는 당연히 자연과학도 포함되지만 그것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예컨대 “Wissenschaft des Judentums”를 “유대주의 연구” 내지 “유대학”이 아니라 “유대인 과학” 같은 식으로 번역하면 오역인 것이다.

엥겔스가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명명한 것은 어떤 자연과학적 방법을 사회 변화에 적용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의 강령이 “어떤 소망이나 몽상, 감정이 아니라, 사회에 작용하는 실제 힘들을 이해하는 분석에 기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엥겔스가 《자연변증법》에서 변증법이라는 개념을 자연과학에도 적용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엥겔스는 그 책에서 자연 세계의 변증법이 인간 역사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예컨대 인간의 의식적 선택이 벌어지는

역사에서, 대립을 통한 운동은 주도적인 사람들이 등장하는 모든 중요한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다. 그런 순간에 사람들은 두 봉우리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는 “양자택일”의 딜레마에 직면하며, 실제로 이런 물음은 매 시기 취미로 정치를 하는 속물들이 제시하고 싶어 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제기된다.

그러나 자연에서 벌어지는 변화는

고정된 예리한 분단선 ⋯ 과 공존할 수 없다. ⋯ “양자택일”은 점점 부적절해진다 ⋯ 모든 차이가 중간 단계들에서 뒤섞이고, 모든 대립이 중간 단계를 거쳐 이어진다. ⋯ 이런 층위에서 가장 적합한 사고 방식은 고정불변한 경계나 무조건적이고 보편타당한 “양자택일”에 얽매이지 않고, ⋯ 대립을 화해시키는 변증법이다.

이와 비슷한 구별이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서도 나타난다. 엥겔스는 변증법이 “외부 세계와 인간 사고 모두의 일반적인 운동 법칙을 다루는 ⋯ 과학”이라고 하며, 두 세계에서의 법칙이 “내용적으로는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금 뒤에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어떤 시점에서 사회 발전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자연사와 다른 것으로 드러난다. 인간이 자연에 가하는 반작용을 무시한다면, 자연에서는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일반 법칙이 작동한다. 모든 사건은 ⋯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로서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사회 역사에서는 행위자들이 모두 의식을 갖고 있으며, 인간들은 의도와 열정을 갖고 행동하고, 특정한 목표를 위해 노력한다.

여기에서도 엥겔스는 자연과 인간 세계에 어떤 공통된 기반이 있을지라도 차이점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지만, 나머지 자연과는 구별되는 존재로 보는 관점이 깔려 있다. 이런 세계관은 엥겔스가 마르크스와 함께 자신들의 관점을 정립한 이래 늘 견지해 오던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좀 더 살펴볼 가치가 있다.

자연계의 발전사와 인간 역사

이재유가 보기에 엥겔스는 인간을 물질의 운동을 드러내는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했다. 세계가 물질이고 인간도 세계의 일부이면, 인간은 결국 물질 세계의 법칙에 매여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자신들의 관점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제시했을 때 관념론은 물론 기계적 유물론도 거부했다.

여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살아 있는 개인들의 존재”가 인간 역사의 기본 전제이며 이들의 생존과 “이를 위해 그들이 자연과 맺는 관계”가 인간 역사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일부인 동시에, 노동을 통해 자연 속에서 스스로의 생활을 생산·재생산 하며 자연을 변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존재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을 통한 “삶의 생산은 ⋯ 자연적 관계로도 나타나고 사회적 관계로도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회적 소통의 필요가 언어와 의식을 낳는다. 의식은 이처럼 물질적 토대가 있고 사회적·역사적 과정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더 뚜렷하게 자연과 구별되지만, 자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인간이 등장하면서 자연도 변한다. “인간 역사 이전의 자연은 ⋯ 오늘날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존재하는 것은 인간에 의해 변형된 자연이다.

이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물론을 견지하면서도 자연과 인간을 뭉뚱그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분리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살아 있는 인간과 외부 세계의 역동적 관계에 주목했고, 이런 상호작용 속에서 역사가 전개된다고 봤다.

한편, 이런 관점에 따르면 인간 사회와 자연 세계는 완전히 별개가 아니지만 서로 구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엥겔스는 나중에 이런 견해를 포기했는가? 앞서 살펴본 인용문들은 엥겔스가 전혀 그러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오히려 엥겔스는 1876년에 쓴 “유인원에서 인간으로의 전환에서 노동이 한 구실”에서 당시 진화론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런 견해를 더 발전시킨다.

엥겔스는 노동이 “모든 인간의 삶의 가장 근본적 조건이며, 아예 노동이 인간을 만들어 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엥겔스는 유인원이 나무에서 내려와 직립보행을 하고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것이 “인간으로의 전환에서 결정적 단계였다”고 말한다. 이 손은 먹거나 보금자리를 짓거나 스스로를 지키는 데에 이용됐다. “그 어느 유인원도 손으로 가장 형편없는 돌칼조차 만든 적이 없으며” 이는 아무리 형편없다 해도 인간만의 성취였다.

엥겔스는 인간의 최초 도구라고 할 수 있는 손의 발달이 자연적인 진화의 산물인 동시에 “노동의 산물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손이 발달하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손을 통해 “자연적 대상의 새로운 속성들을” 끊임없이 발견할 수 있었고, 이는 인간의 정신 능력을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노동은 생산적인 동시에 복잡해졌고, 인간들의 협업이 심화됐으며, “인간이 상대방에게 말을 거는 경지에 이르게 됐다.” 이처럼 “노동으로부터, 노동과 함께” 언어가 생겨난다. 이는 두뇌의 발달을 자극하고 두뇌의 발달은 다시 언어와 노동의 발달을 자극한다. 그러면서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진정한 의미의 노동을 하기 시작한다. “동물이 자연을 이용한다면 인간은 자연을 지배한다.” 이런 식으로 엥겔스는 인간이 노동을 통해 환경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키고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묘사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엥겔스가 말하는 인간의 자연 “지배”가 결코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엥겔스는 “자연에 대한 우리 인간의 승리에 대해 너무 우쭐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우리가 승리할 때마다 자연은 우리에게 복수한다. 매번의 승리는 처음에 우리가 계산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경우에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다 주고 처음에 낸 성과를 무로 돌리곤 한다. ⋯ 우리는 마치 정복자가 외국인을 정복하듯이 외부에서 자연을 지배할 수 없다. 우리는 살과 뼈와 뇌를 가지고 자연에 속해 있으며, 자연 한복판에 있다. 우리 인간의 우위는 ⋯ 자연의 법칙을 제대로 알고 올바르게 적용하는 데에 달려 있다.

이는 엥겔스가 자연을 그저 지배 대상이나 수단으로 보지 않았으며 인간을 자연이라는 총체 속에서 이해하려 했음을 보여 준다. 엥겔스가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체계”를 세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됨을 되찾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체계’?

엥겔스가 유물론적 변증법을 통해 어떤 궁극적 원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체계를 세우려 했다는 이재유의 비판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여기에는 왜곡과 몰이해가 있다. 일단 엥겔스는 그런 종류의 체계를 세우려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반뒤링론》은 정확히 그런 종류의 체계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 유물론적 변증법의 기본 전제이기에 그런 종류의 체계를 만든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류 발전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물리적 세계는 물론 정신적·역사적인 것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내적 연관을 설명하는 궁극의 완결적 체계가 등장한다면, 이는 인간의 지식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며, 사회가 그런 체계를 따르는 순간 역사 발전이 멈출 것이다. 즉,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얘기라는 것이다.

변증법은 미리 짜여진 도식으로 세계를 재단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헤겔에게서 계승하고 유물론적으로 재해석한 변증법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 변화는 어떤 외적인 도식이 아니라 그 발전 단계 자체의 내용과 고유한 모순에 달려 있었다.

엥겔스는 변증법과 관련해 이 점을 강조한다. “모든 것은 따라서 저마다 부정되고 발전을 일으키는 고유의 방식이 있다.” 따라서 변증법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지침이지, 역사를 연구하지 않을 핑계가 아니다.”

《반뒤링론》에서 변증법의 세 가지 “법칙”을 제시했다는 이유로 엥겔스는 변증법을 도식화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엥겔스는 그런 법칙들을 현실이 따라야 하는 법칙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엥겔스 자신도 자신의 정식화가 숙명론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엥겔스는 그것이 “증명을 구성하는 기법이 아니며” 특정한 사례들을 끼워맞춰서 설명을 만들어 내는 기법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마르크스가 “변증법적 법칙”으로 “역사적 필연을 증명하려 한다”고 비난하는 뒤링에게 엥겔스는 이렇게 응수한다. “오히려 정반대다. 마르크스는 그 과정이 이미 부분적으로 진행됐고, 앞으로도 진행될 것임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다음, 그것이 특정한 변증법적 법칙을 따른다는 서술을 덧붙인다.”

경제 결정론자 엥겔스?

이재유는 엥겔스의 세계관이 “경제결정론”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엥겔스에게 가해지는 흔한 비난의 하나다.

우선, 우리가 “경제학”이라고 알고 있는 분야가 마르크스와 엥겔스 당시에는 “정치경제학”으로 불렸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사회학과 정치학을 어느 정도 포괄하는 분야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경제”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오늘날보다 더 폭넓은 개념이었다. 예컨대 두 사람의 방법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제시한 책 《독일 이데올로기》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그 속에서 인간이 노동을 통해 맺게 되는 인간과 인간 간의 가족 관계, 사회 관계 등을 유물론적 역사 분석의 중요한 요소로 포함시킨다. 더 다듬어진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에서 생산양식 개념은 생산수단(도구, 기계, 공장, 사무실 등)과 거기에 상응하는 생산관계(무엇보다도 계급 관계)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간이 “실제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이런 토대에 근거해 다양한 사회 제도, 정치, 이데올로기, 종교, 철학 등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경제적 관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본 것은 아니다. 둘 다 정치나 이데올로기가 역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 적은 없다. 《신성가족》에서 엥겔스가 쓴 다음과 같은 문장은 이 점을 아주 날카롭게 드러낸다. “역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막대한 부를 소유하지도, 투쟁을 벌이지도 않는다. 부를 소유하고 투쟁을 벌이는 것은 현실의 인간이다. ⋯ 역사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활동일 뿐이다.” 역사를 만드는 것이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치, 이데올로기, 종교도 역사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의 사상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1890년 10월 엥겔스는 자신의 한 “지지자”가 보이는 몰이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그는 형이상학자 뒤링의 기이한 주장, 즉 마르크스에 따르면 역사는 (역사를 만드는 존재인) 인간들이 전혀 관여하지 않아도 전적으로 알아서 만들어지며, 인간들은 경제적 조건이 조종하는 장기짝 같은 존재라는 주장을 주저없이 받아들인다. 뒤링 같은 자들의 왜곡과 진짜 이론을 혼동하는 저 사람을 누가 좀 구제해 달라. 나는 포기하련다.

엥겔스가 “1847년 《공산주의의 원칙》을 저술한 이래 지속적으로 ⋯ 비(非)주관적 요인을 강조”했다는 이재유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얼마 후 엥겔스는 콘라드 슈미트(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에게 보낸 서신에서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비결정론적인 분석의 모범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전적으로 정치적 투쟁과 정치적 사건들의 특별한 구실을 다룹니다.(물론 이런 것들은 일반적으로 경제적 조건에 달려 있습니다.) 또, 《자본론》에서 노동일을 다룬 절은 입법(명백히 정치적 행위입니다)이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주는지를 보여 줍니다.

엥겔스는 역사유물론이 경제결정론이 아니라는 주장에 그치지 않고, 경제로부터 발전해 나온 요인이 다시 경제에 반작용하는 사례를 제시하기도 한다.

예컨대 엥겔스는 국가 권력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국가는 경제적 변화를 가속시키거나 더디게 할 수 있고 경제 발전의 방향을 바꾸거나, “특정한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할 수도 있다.

사회는 어떤 불가결한 공적인 일들이 생겨나게 한다. 이를 위해 지명된 사람들은 사회 내에서 새로운 노동 분업의 한 분야를 형성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일을 맡긴 사람들과 구별되는 나름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형성하고, 그들에게서 독립한다. 그렇게 해서 국가가 생긴다. ⋯ 이 새로운 독립적인 권력은 대체로 생산의 운동을 따라가야 하지만 자신의 상대적인 독립성을 이용해 ⋯ 생산의 경로와 조건에 영향을 준다.

엥겔스는 법률 체계에 대해서도 비슷한 분석을 한다. 엥겔스는 법률 체계가 그 자체의 성격 때문에, 그것이 생겨나게 한 경제적 조건을 고스란히 반영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법률은 근본적으로 계급 지배를 표현하는 것이지만, “계급 지배의 적나라하고 선명하고 순수한 표현”일 수는 없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지배계급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하고 내적으로 일관성이 있어야 계급투쟁을 억제하는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될수록 경제적 조건을 충실히 반영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법관은 자신이 선험적인 원리에 입각해 판결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그 원리들은 사실 경제적 반영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물구나무를 선다.” 이런 식으로 경제에서 생겨난 영역이 거꾸로 “경제적 토대에 영향을 주고 일정한 한계 내에서 경제적 토대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러한 상호작용을 인정한다고 해서 자신들의 유물론적 방법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경제적인 것이 중심적 구실을 할 것임을 분명히 했지만 경제력이 역사의 유일한 결정 요인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요컨대 경제적 요인은 그 자체로 매우 강력한 직접적인 인과적 요인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다른 요인들의 궁극적인 한계와 방향성을 규정한다.

⋯ 모든 요인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무수히 많은 우연들(즉, 그 내적 연관이 너무 동떨어져 있거나 불명확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무시할 수 있는 것들)을 뚫고 경제적 운동은 필연적인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관철합니다.

그러나

유물론적 역사관에 따르면, 역사의 궁극적인 결정 요인은 실제 삶의 생산과 재생산입니다. 마르크스와 제가 말한 것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경제가 유일한 결정 요인이라고 우리의 주장을 비트는 자가 있다면, 그는 우리의 주장을 추상적이고 말도 안 되는 공문구로 바꾸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로 기운 말년의 엥겔스?

이재유는 엥겔스의 유물론적 세계관이 결국 개혁주의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그의 경제 결정론이 카우츠키의 숙명론적 역사관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론적으로 해석되는 엥겔스의 정식화조차 카우츠키가 다음과 같이 제시한 숙명론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미래는] 확실하고 필연적이다. 혁신가들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자본가들이 탐욕을 좇아 경제 생활을 변혁하는 것만큼이나 필연적이다 ⋯ 그래서 임금노동자들은 필연적으로 더 짧은 노동시간과 더 높은 임금을 쟁취하려 하고 ⋯ 스스로를 조직해 자본가 계급과 국가 권력에 맞서 싸울 것이다. ⋯ 그들은 필연적으로 정치 권력에 도전하고 자본주의의 지배를 끝장내려 할 것이다. 계급투쟁과 노동계급의 승리가 필연적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필연적이다.

이런 정식은 명백히 수동적인 개혁주의 정치와 맞닿아 있다. 이는 제2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사회주의가 필연적이라면 뭐하러 혁명적 모험이라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겠는가? 독일사민당이 의회에서 다수가 되기를 기다리면 되지, 달리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엥겔스의 저작에는 이런 식의 정식이 없다. 그러므로 엥겔스가 이런 노선을 지지했다고 주장하려면 그의 말을 맥락에서 떼어내거나 왜곡해야 한다.

한편, 말년의 엥겔스가 독일사민당 내에서 나타난 개혁주의의 징후들을 지지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도 개혁주의에 문을 열어 줬다는 주장이 있다. 마르크스는 1872년, “영국에서는 노동자들이 평화적 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 개혁주의를 지지했다고 주장하려면 그가 한 다른 많은 주장들을 무시해야 한다. 예컨대 노동자들이 “국가 기구를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파리 코뮌에 대해 마르크스가 했던 말들을 깡그리 무시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엥겔스는 1886년 《자본론》 영어판 서문에서 마르크스의 그 말을 인용하면서 중요한 단서를 단다. “마르크스는 영국 지배계급이 ‘친노예제 반란’ 같은 것을 일으키지 않고 그 평화적·합법적 혁명을 잠자코 받아들이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친노예제 반란’은 미국 내전(남북전쟁)을 말한다. 즉, 영국에서는 설사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한다 해도 혁명적 내전을 통해 그것을 지켜야 할 것이라는 얘기다.

이재유는 엥겔스가 죽기 직전인 1895년에 《프랑스의 계급투쟁》 개정판에 붙인 서문에 쓴 말을 인용하며, 엥겔스가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성격보다는 ‘진화론적 성격’을 강조”했다고 말한다. 엥겔스가 거기에서 “점진적인 선전 활동과 의회 활동”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 가지 점을 알아야 한다. 첫째, 당시 사회주의자 단속법이 다시 통과될 것을 우려한 독일사민당 지도자들은 엥겔스에게 혁명적 주장을 누그러뜨리라는 압력을 가했다. 엥겔스는 마지못해 그런 요구에 응했지만 기관지 편집자들과 당 지도자들에게 항의와 우려를 표했다.

둘째, 그 글에서 엥겔스가 ‘시대착오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이재유의 주장처럼 “1848년 혁명 전략” 자체가 아니라 바리케이드나 시가전 등의 전술적 측면들이다. 엥겔스는 당시의 변화된 조건을 다루면서 그러한 전술이 노동자들에게는 더 불리하고 정부군에게는 더 유리하게 됐다는 점을 지적할 뿐, 국가기구와 대결할 필요성과 가능성 자체를 철회한 것은 아니다. 어떤 대목에서 엥겔스는 아예 이렇게 묻기도 한다. “그러면 앞으로 시가전은 무의미한 것인가?” 엥겔스는 단호하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다른 대목에서 엥겔스는 “바리케이드를 치는 방어적 전술보다는 공세를 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도 얘기한다.

합법 활동과 무장 투쟁에 대한 이런 고려가 전술적이었다는 점은, 그해 라파르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나를 속였네. 그는 1848~1850년 프랑스에 관한 마르크스의 글에 붙인 나의 서문에서, 자신의 ‘절대 평화 폭력 반대’ 전술을 뒷받침할 만한 모든 것을 취했네. ⋯ 그러나 나는 이런 전술을 오로지 오늘날의 독일에 대해 주장했을 뿐이고, 중요한 단서도 달아두었다네. 이런 전술은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서는 전적으로 따라서는 안 되는 것일 수 있고 미래의 독일에서도 그럴지도 모르는 일일세.

사실 독일사민당은 엥겔스에게 큰 근심거리였다. 독일사민당은 독일 노동자 운동 내의 상이한 두 조류에서 기원했다. 하나는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쪽이었고 다른 한 쪽은 국가와의 타협을 통한 개혁을 추구한 라살의 영향을 받은 조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라살을 강하게 비판했지만, 사실 양쪽 모두에 비판적이었다. 마르크스는 창당 당시 지도자들의 기회주의를 비판하는 《고타강령 비판》을 썼다. 이처럼 개혁주의 경향은 창당 초기부터 당 내에 있었고, 한동안 독일 자본주의가 강력한 국가기구의 주도 하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확장하고 계급투쟁이 고조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더 강화됐다. 1879년 프로이센 국가가 당의 성장에 대응하려고 ‘사회주의자 단속법’을 제정했을 때, 당의 성장은 거의 방해받지 않았지만 당 지도부는 국가 탄압에 순응적인 방식으로 대처했다.

엥겔스는 독일사민당 지도부의 개혁주의와 기회주의에 자주 분노했다. 일례로 마르크스가 《고타강령 비판》을 썼을 때 당의 다른 집행위원들이 그 글을 읽지 못하도록 리프크네히트가 책략을 부린 것에 대해 엥겔스는 두고두고 분노했다. 엥겔스는 당 지도부를 비판하고 젊은 활동가들을 교육하기 위해 《고타강령 비판》을 자신이 직접 출판했다. 그 때문에 한동안 엥겔스는 다른 당 지도자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까지 했다.

‘사회주의자 단속법’이 폐지되고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그 강령이 수정됐을 때 당 지도부가 지난 실수와 비판을 전혀 인정하지 않자 엥겔스는 더더욱 분노했다. 엥겔스는 1891년에 바뀐 새 강령(에르푸르트 강령)에 이미 개혁주의의 씨앗이 있다고 보았다.

이런 사실들에 비춰 보면 엥겔스가 국가 기구의 분쇄 필요성을 약화시켰다거나, 개혁주의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맺으며

처음에 말했듯이, 엥겔스를 마르크스주의를 기계적 유물론으로 타락시킨 인물로 매도하고 마르크스에게서 떼어놓으려는 시도는 서구에서 1960년대부터 유행한 것이다. 이는 당시 거대한 급진화 물결 속에서 급진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관심이 부활하는 가운데, 갑갑한 개혁주의를 거부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언사로 억압적인 통치를 정당화하는 스탈린주의의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반발에도 영향을 미쳤다. 스탈린주의의 요소들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의 요소들과 혼동됐다. 마르크스주의를 타락시킨 ‘원죄’를 찾아 내려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와 사상적으로 일치했던 엥겔스를 타깃 삼았다.

이런 시도들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데올로기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도에 깔린 전제는 엥겔스의 잘못된 이론이 스탈린주의와 개혁주의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주의가 경제 환원론이라는 것과 경제 환원론이 스탈린주의를 낳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역사유물론적 설명은 전혀 다르다. 예컨대 독일사민당의 개혁주의는 궁극적으로 1870년대에서부터 1890년대까지 20여 년 동안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독일 자본주의와 노동계급의 생활수준 향상, 노동조합 상층 관료층의 성장에 그 토대가 있다. 한편, 스탈린주의는 궁극적으로 러시아 혁명의 패배와 관료의 부상에 토대가 있다. 또, 유물론적인 방법은 북한 관료 같은 지배자들의 스탈린주의와 한국의 운동 내에 있는 피지배자들의 스탈린주의를 구분해서 봐야 함을 뜻한다.

이런 이해는 스탈린주의나 개혁주의에 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개혁주의에 물질적 근원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단지 개혁주의적인 지도자들을 ‘폭로’하는 것만으로 개혁주의를 근절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지 않을 수 있다. 지배자들의 스탈린주의와 피지배자들의 스탈린주의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후자에 대해 종파적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갖는 실천상의 한계와 문제점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킨 것도 바로 이런 실천적 문제들 때문이다. 엥겔스를 옹호하는 것은 단지 마르크스의 평생의 동지였다는 그의 명예 때문만은 아니다. 다가오는 투쟁에서 불가피하지 않은 패배를 피하고 승리를 기하기 위해서다.


읽어볼 만한 책과 글들

  • 토니 클리프, “프리드리히 엥겔스”: 엥겔스가 마르크스주의에 한 공헌을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토니 클리프의 강연을 녹취한 것이다.

다음은 읽어볼 만한 엥겔스의 저서들이다.

철학과 종교에 관해 관심이 있다면 다음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