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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사회주의자가 전하는:
타이 정치 위기의 원인과 기로에 선 민주주의 투쟁

자일스 자이 웅파콘은 타이의 사회주의자이며, 2006년 쿠데타를 옹호한 국왕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국왕모독죄로 기소된 후 유럽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 ] 안의 내용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노동자 연대〉 편집부가 넣은 것이다.

시위에 나선 태국 청년들은 용기 있게 군사 정부에 도전하며 왕정까지 비판하고 있다 ⓒ출처 Prachatai(플리커)

타이에서는 보수적인 군사 정권이 탄압과 부패한 정치 체제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타이 정부는 올해 젊은 활동가들이 이끄는 민주주의 운동의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했다.

타이 시위대는 이제 홍콩·칠레·나이지리아·레바논·벨라루스·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불의와 권위주의에 맞서 일어난 새로운 반란 물결에 합류했다. 청년들이 주도하는 민주화 시위가 올해 8월부터 타이 군사 정권을 뒤흔들고 왕정까지 비판하는 용기를 보여 줬다.

9월 19일은 2006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선출된 정부를 엎고 집권한 날이다. 올해 이날 수도 방콕은 10만 명이 넘는 시위대로 넘쳤다. 1970년대 반독재 대중 항쟁 47주년이 되는 10월 14일에도 그만큼 모여 독재자 프라윳 짠오차의 퇴진을 요구하며 정부 청사로 행진했다. 시위대는 헌법을 새로 만들고 왕정을 개혁하라고 요구했다.

이날 왕비의 차량이 시위대 사이를 지나가려고 하자 시위대는 왕비를 향해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심지어는 가운뎃손가락만 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위대는 왕비에게 “내 세금[좀 그만 써라]!” 하고 소리쳤다. 11월에도 시위대가 왕실 차량 행렬에 등을 돌리고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타이 정부가 시위를 금지하려고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경찰이 두 번의 시위에서 물대포를 쐈지만 시위는 계속됐다. 경찰이 시위대에게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를 쐈지만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시위를 확산시킬 뿐이었다.

기로에 선 운동

비무장 시위대를 학살하려고 군대를 투입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군사 정권의 대응은 아직 가벼운 편이다. 그렇다 해도 수많은 지도적 활동가들이 체포됐고 일부는 여러 재판을 받게 생겼다. 운동은 “우리 모두가 지도자”임을 선포하고 기층 활동가들이 계속 시위를 조직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총리 프라윳과 군부 깡패 집단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다. 이들은 2014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몇 년 동안 권력을 유지하려고 여러 조치를 시행했다. 헌법을 새로 만들고, 상원의원을 지명하고, 21개년 “국가 전략”을 선포하고, 2019년 총선을 부정 선거로 치렀다.

프라윳은 이미 손에 피를 묻혔다. 2010년 그가 군 총사령관이었을 때 그와 당시 군이 임명한 정부는 비무장한 ‘붉은 셔츠’ 시위대를 향한 발포를 명령했다. 암살단을 보내 이웃 나라로 망명한 반체제 인사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타이 민주주의 운동은 기로에 있다. 시위를 계속해서 플래시몹 형태로 조직하다가는 참가자들을 지치게 할 위험성이 있다. 그리고 운동이 승리하려면 정부를 통치 불능 상태에 빠뜨려야 하는데 이런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군부가 정당들의 도움을 받아, 형편없는 타협을 운동에 강요하려 한다는 불길한 조짐도 있다.

이런 책략을 통해 정부는 의회 절차로 헌법을 일부 개정하는 데에 그치려 할 것이다. 또한 정부는 일부 중등학생들과 교육 여건에 관해 대화를 벌임으로써 시위대를 분열시키려 했다.

운동 참가자들

시위 참가자들은 학생과 노동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청년 활동가들이 이끄는 단체가 주로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초기에 이 청년들의 단체명은 “자유 민중”이었다. 현재 이들은 “대중당”이라고 하는 연합체를 결성했다. 이는 절대 군주제를 타도한 1932년 혁명을 이끈 운동에서 따온 이름이다. 젊은 여성들이 이 운동에서 지도적인 구실을 한다.

최근 운동이 10년 전 민주화 운동인 ‘붉은 셔츠’ 운동과 다른 점은 어느 정당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주류 야당들은 운동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곧 모여드는 노점상들만도 못하다.

중고등학생들은 운동의 중요한 일부다. 이들은 수업 전 의무적으로 하는 국기 계양식에서 세손가락 경례 시위를 벌여 왔다. 학생들은 교사들의 지시에 불복하고 언쟁을 벌인다. 가장 전투적인 목소리를 내는 쪽도 주로 어린 여학생들이다.

지난 8월에는 학생 수백 명이 교실을 박차고 나와 교육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교육부 장관은 학생들 앞에서 연설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결국 학생들에게 “독재의 하수인”이라는 야유를 들으며 쫓겨나듯이 돌아가야 했다.

시위 진압 경찰이 쏜 물대포는 시위대의 분노를 자극했다 ⓒ출처 Prachatai(플리커)

세 손가락 경례는 영화 〈헝거 게임〉에서 따온 것으로 2014년 반(反)쿠데타 시위 이래로 군부 독재 반대의 상징이 됐다. 타이의 시위에는 항상 상징이 많다. 10년 전 대규모 민주화 시위들의 조직자들은 ‘붉은 셔츠’로 알려져 있다. 반면, 왕당파는 노란 셔츠를 입었다.

이 반동적인 중간계급 세력은 나중에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으면서 비당파적으로 비치려고 노력했다. 민주화 시위대는 즉각 이들에게 “사림”이라는 딱지를 붙였다.(사림은 여러가지 색으로 된 면 요리다.) 이제 민주주의 운동 내에서 “사림”은 보수적인 적들을 가리키는 경멸적인 용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새로운 세대

학생들은 2014년 군부 쿠데타 이후 산발적이었던 민주주의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시위를 확대하는 데에 성공했다. 군부가 지배하는 의회 기구 안에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헛수고임을 이 새로운 세대가 봐 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타이 사회, 특히 교육 시스템에 단단히 뿌리내린 보수성에 신물이 났다.

국가 경제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엉망이 됐고 청년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기 힘들다. 청년들은 장년층 다수가 느끼는 분노와 절망을 공유한다. 2019년 총선에서는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군부 정당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다.

젊은 세대가 이전 세대와 다른 점은 군부의 잔혹한 탄압을 겪은 나이 든 활동가들 사이에 만연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나라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슷한 운동들과의 공통점이다. 모든 대중 시위가 그러하듯 이 운동의 요구도 확대되고 있다. 성소수자 권리 활동가들과 낙태권 활동가들이 운동에 합류했고 빠따니주(州) 말레이족 무슬림의 자결권을 요구하는 활동가들도 함께했다. 앞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붉은 셔츠’ 활동가들도 2010년 운동이 혹독하게 탄압받은 이후 처음으로 저항에 동참했다.

새 세대 운동이 뚜렷한 조직 구조가 없는 분권적 리더십을 강조하는 것은 이 운동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그 덕분에 핵심 활동가들이 주기적으로 체포돼도 시위가 계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선출되지 않는 핵심 활동가 집단이 더 광범한 운동 내에서 책임 있는 논쟁을 할 기회를 갖지 않은 채 사실상 알아서 운동의 전략을 결정하게 되는 문제를 낳는다.

타이 정치 위기의 근원

현 위기의 뿌리는 2006년 쿠데타로 이어진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쿠데타는 [2001년 총리로 선출된] 사업가 출신 정치인인 탁신의 정부를 타도했다. 많은 논평가들이 지배계급 내에서 벌어지는 탁신과 왕당파의 갈등을 “현대 자본가계급” 대 “옛 봉건 질서”의 대결로 설명하지만 실제는 이와 다르다.

탁신과 보수적인 반(反)탁신파 모두 왕정을 지지한다. 보수 세력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봉건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자들이다. 이들은 군주제를 지지함으로써 타이에서 가장 큰 자본주의 기업의 하나를 지지한다.

현재 군사 정권은 보수파 내에서 가장 강력한 파벌이다. 그들은 자본의 이익을 위해 무력으로 권력을 잡았고 그 과정에서 개인적 부도 쌓았다. 또한 타이 군부는 거대 은행과 다양한 언론 매체를 소유하고 있으며 자체적인 기업 네트워크도 갖고 있다.

탁신은 정보통신 사업에서 시작해 부유한 자본가가 된 자로 타이 주요 이동통신 기업의 소유주가 됐다. 그러나 총리 재임 중 탁신은 풀뿌리 수준의 케인스주의와 전국 수준의 자유시장 정책을 혼합해 타이를 현대화하려 했다. 그는 이것을 “이중 경로” 정책이라고 했다. 2001년 집권 초기에 그는 타이 경제를 아시아 금융 위기에서 구출하는 데 성공해서 모든 지배층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보수파는 탁신의 포괄적인 현대화 정책으로 특권을 잃을 것이 두려워 점점 탁신에게서 등을 돌렸다. 탁신의 현대화 정책은 대규모 인프라 건설과 빈민에게 도움이 되는 정부 정책들을 포함했다. 탁신이 이끈 타이락타이당은 이런 정책들로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탁신 정부는 타이에서 처음으로 전 국민 건강보험 정책을 내놓았으며, 농촌 지역에 일자리 창출 기금을 설립했고 농민의 부채를 덜어주고자 했다.

탁신을 향한 대중의 강력한 지지는 보수파를 두렵게 했다. 보수파의 정치는 선거에서 탁신의 투표 기반에 밀렸고 결국 보수파는 2006년 군부 쿠데타에 의지해야 했다.

탁신 이후

탁신은 사회주의자가 전혀 아니었다. 또한 원칙 있는 민주주의자나 인권 운동가도 아니었다. 탁신의 목표는 국가와 대기업들이 인구 대다수를 경제 성장에 끌어들일 수 있는 현대화된 타이 사회였다. 탁신은 싱가포르 같은 나라에서 영감을 얻었다. 2008년 이래 탁신은 영구적으로 강제 추방된 상태이고 대중 항쟁을 지지할 의사가 없다.

탁신이 기피하고 새로운 야당인 미래전진당이 대중 운동 건설을 거부한 결과 지도에 공백이 생겼다. 이를 보면 왜 지금 시위가 주류 정치 바깥에서 일어나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프라윳 군사 정권에 맞서는 운동은 이제 탁신의 정치 조직에서 완전히 독립적이며 평등, 자유, 사회 정의를 열망한다.

2006년 쿠데타 이후 타이 군부는 계속 권력을 잡아왔다. 2011~2014년에는 잠깐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이 집권했다. 2010년 붉은 셔츠 운동이 무자비하게 탄압받은 이후 실시된 2011년 자유 선거로 붉은 셔츠 운동의 지지를 받은 정부가 들어서고 잉락이 타이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됐다. 군부와 우익이 주도하는 사법부는 지속적으로 잉락 정부를 약화시켰고 잉락 정부는 결국 2014년 중간계급 ‘사림’의 지지를 받은 프라윳의 쿠데타로 전복됐다.

프라윳 집권 후 결국 2019년에 총선이 열렸지만 이 선거는 군부가 만든 반민주적 선거 규칙과 반동적 헌법 아래에서 진행됐다. 프라윳이 이끄는 친(親)군부 정당인 인민공권력당은 전체 득표의 4분의 1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군부가 지명한 상원의원들이 군부의 재집권을 지지하고 프라윳을 다시 총리 자리에 앉혔다. 군부의 시녀 사법부 역시 두 야당[미래전진당과 타이락타이당의 후신인 타이락사차트당]을 해산했다. 또한, 이른바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곳도 군인과 경찰로 채워졌다.

왕정의 쇠락

타이 대중은 새 국왕 와치랄롱꼰의 행태에 진저리를 낸다. 와치랄롱꼰은 2016년 사망한 국왕 푸미폰의 아들이다. 포악하고 멍청한 군주를 향한 뿌리깊은 분노가 이제 공공연히 터져 나오고 있다. 사람들은 비판과 책임으로부터 왕을 보호하는 법에 분노한다.

와치랄롱꼰은 대부분의 시간을 독일에서 그의 아내들과 보낸다. 그는 해외에서 계속 지낼 수 있도록 헌법을 고치기까지 했다. 그 여성들이 받는 취급도 그의 인기 하락에 한몫 했다. 왕의 총애를 잃은 상대는 감옥 신세를 지곤 했다. 와치랄롱꼰은 모든 왕실 재산을 자기 개인에게 집중시켜 통제하려고 헌법 개정을 밀어붙였다.

왕정 개혁 요구는 왕정의 영향력과 특권이 축소돼야 한다는 대중의 광범한 정서를 반영한다.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공화국이라는 생각에 매력을 느낀다. 타이 대중이 가혹한 법률[왕실 모독죄]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왕을 비판할 자신감을 얻은 것은 수십 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강력한 군부는 취약한 왕정을 앞세워 권위주의적 통치를 오랫동안 정당화해 왔다. 타이의 많은 활동가들은 절대 왕정이 국가를 지배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사실 왕정은 1932년 이래로 독자적인 권력이 없었다. 왕정은 군부와 우파의 도구 구실을 기꺼이 해 왔다.

대중의 왕정 비판은 반가운 일이며 군사 정권을 약화시키고 타이가 공화국이 되는 날(이는 오랜 숙원이다)을 앞당길 것이다. 그러나 군부 독재는 여전히 민주주의와 대중 권력의 주적으로 남을 것이다.

허울뿐인 왕정의 실체

1932년 타도된 절대 왕정은 자본주의적 왕정이었다. 이 왕정은 타이를 근대화하는 과정, 즉 1870년대 일본에서 봉건제를 끝낸 “위로부터의 혁명” 비슷한 과정 속에서 등장했다. 절대왕정이 흔들리자 1932년 혁명이 일어났고 타이 자본가 계급의 통제 속에서 입헌군주제가 들어섰다.

수십 년 동안 타이 지배층은 보수적인 왕당파 네트워크를 통해 타이를 지배해 왔다. 이런 지배는 국왕에게 전능한 신과 같은 이미지를 덧씌웠다. (“네트워크 왕정”은 타이 역사와 정치를 연구한 영국 학자 덩컨 맥카고가 쓴 용어다. 그러나 나는 그의 분석이 왕실의 힘을 과장한다고 본다.) 그러나 전 국왕 푸미폰은 항상 취약했다. 그는 무능했고 그의 권력은 허구였다.

타이 지배층은 푸미폰의 횡설수설하는 연설들을 마치 신성한 말씀인 양 되풀이해 왔다. 그러나 푸미폰의 말은 지배계급 보수 세력들이 자기 이익에 맞게 해석하기 전까지는 거의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푸미폰의 아들 와치랄롱꼰도 종종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해서 왕과 정중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했던 외국 외교관들을 난처하게 했다.

타이 지배층 중 진정한 힘을 가진 자들은 군대, 고위 공무원, 재계 지도자들이다. TV에는 이들이 바닥에 엎드려서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사실 그들은 왕정이라는 허울 뒤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부를 늘려 왔다. 이것은 대중을 속이려고 연출한 이데올로기적 연극일 뿐이다. 현대 사회에 남아 있는 모든 군주제는 기존 질서를 강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구실을 한다. 타이도 이런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다.

타이는 냉전 동안 미국의 가까운 동맹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부터 타이는 미국과 점차 거리를 둬 왔다. 오늘날 타이 정부는 그 지역의 주요 제국주의 강대국인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려고 애를 쓴다. 타이 군사 정권은 중국의 군사 장비를 자주 구입한다.

미국은 미국대로 타이 정부를 심각하게 비판하지 않아 왔다. 오바마 정부나 트럼프 정부나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타이의 연합 군사훈련은 타이 군사 정권 하에서 계속돼 왔다. 저항 운동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음모론은 근거가 없으며 평범한 사람들은 외부 개입 없이는 스스로를 조직할 수 없다는 모욕적인 가정에 기초를 둔 것이다.

전망과 과제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일은 둘 중 하나다. 운동이 파업과 같은 더 강력하고 전투적인 행동을 조직하는 쪽으로 전진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동력을 잃고 말 것이다. 운동이 높은 대중적 지지를 받는 만큼, 운동에 더 강력한 힘을 부여할 파업을 건설하기 위해 활동가들이 지금부터 노력해야 한다.

많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정치화한 방식으로 싸우길 원한다. 주로 민간 부문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 전투적인 활동가들은 군사 정권과 노란 셔츠에 반대한다. 최근 몇 달간 이들은 개인적으로든 노동조합원으로든 새 세대가 이끄는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려고 나섰다.

자동차 조립 공장, 차량 부품 공장, 전기 기계 공장이 밀집한 동부 해안에서는 현장 조합원 조직인 ‘노동자 동부 연합’이 군사 정권에 맞선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방콕 바로 북쪽에 있는 사라부리시(市)에서도 섬유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런 전투적 노동자들의 영향력은 아직 제한적이며 파업에 관해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타이에는 자동차와 섬유 산업에 종사하는 공장 노동자뿐 아니라 공공기관, 은행, 대학에서 일하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있다. 운송 노동자와 병원 노동자도 있다. 군사 정권에 맞서는 파업을 건설하려면 젊은 활동가들은 전투적 노동자들과 관계를 맺고 작업장을 찾아가 독재 정권을 끌어내릴 방법을 토론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서 10년 전 패배한 붉은 셔츠 시위와 1970년대의 사건들이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바로 조직된 노동계급의 대열로 운동을 확대하는 것이 사활적이라는 것이다. 타이 좌파들은 1980년대 타이 공산주의 운동이 쇠락한 이래 정치적 존재감이 미약했다. 타이 좌파가 취약한 탓에 이런 과제를 달성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새 세대 투사들이 이 필수적 과제를 수행하는 길로 한 걸음을 내딛길 바라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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