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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더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통과의 의의를 사 줘서는 안 된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껍데기뿐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통과시킨 지 3일 만에 끔찍한 산재 사망 사고가 벌어졌다. 1월 11일 광주의 한 폐플라스틱 재생공장에서 홀로 근무하던 50대 여성 노동자가 파쇄기에 몸이 끼여 사망한 것이다.

이번에 통과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으로는 이 사고를 처벌할 수 없다. 5인 미만 사업장은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50인 미만 사업장의 적용도 3년 유예됐다.

산업재해의 76.6퍼센트가 이러한 영세사업장에서 발생한다. 대다수 재해를 중대재해로 처벌하지 못한다면 기업주들에게 경각심은커녕 면죄부만 주는 꼴이다.

이번에 통과된 법안은 기존에 노동계 요구에 비해 처벌 수준과 범위도 대폭 낮아졌다. 중대재해(사업장에서 벌어지는 산업재해와 제조물이나 시설에서 벌어지는 시민재해 모두)를 일으킨 기업과 기업주를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기존 법안의 취지가 퇴색된 것이다.

발주처와 임대인은 책임과 처벌에서 제외됐고, 인과관계 추정 조항(기업주의 법 위반이 반복된 사업장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하거나 사측의 산재 은폐 시도가 벌어지면 유죄로 추정)도 삭제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노동계가 10만 국민청원으로 요구해 온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서 차 떼고 포 떼면서 핵심 조항을 후퇴시켜 왔다. 공수처법 개정안 등은 단독 통과시킨 정부와 여당이 야당과 재계 핑계를 대는 것도 책임 회피일 뿐이다. 기업주들의 눈치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자신이 자본가 계급에 주요 기반을 둔 친기업 세력이기 때문에 법안을 누더기로 만든 것이다.

누더기 법으로는 이런 참사 처벌 못한다 1월 11일 광주의 한 폐플라스틱 재생공장에서 벌어진 끼임 사망 사고 현장 ⓒ출처 광주 광산소방서

출발로서 의의가 있다?

그런데 노동운동 일각에서는 이번에 통과된 법을 두고 ‘한계가 많지만 그래도 성과도 있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민주노총은 법안이 통과된 날 논평을 내 “진짜 경영책임자 처벌 등 성과와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고 부분 의의를 사 주면서 “성과는 최대한 반영하고,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은 이후 사업과 투쟁을 통해 채워 나갈 것이다” 하고 밝혔다(반면, 공공운수노조와 금속노조는 법안을 강하게 규탄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도 유사한 입장을 발표했다.

김종철 정의당 대표도 “일하다 죽거나 다치면 대표이사에게 책임을 묻고, 기업에게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며 아쉬운 부분은 앞으로 보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좌파 일부도 “입법 취지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비판하면서도, 법이 통과된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사실상 이름만 남은 껍데기 법안에 성과를 사 주는 것은 중대재해를 막는 데에도, 운동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식의 평가는 후퇴가 있더라도 어쨌든 법안 통과가 중요하다고 보는 관점과 연결돼 있다. 법안 통과 전부터 김종철 대표는 “한두 가지를 빼고는 나머지는 다 열려져 있게 논의”하겠다는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러나 이번 법안은 앞으로 한동안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들에게 오히려 면죄부를 주는 구실을 할 공산이 크다. 민주당 대표 이낙연은 “노동존중 사회의 초석이 될 것”이라고 자화자찬하고, 경총 등은 ‘사업 못 하게 하는 법’이라며 우는소리를 하는 상황에서, 국가기구, 주류 양당 등은 이 법을 근거로 또다시 기업주 처벌에 미온적인 현실을 정당화하기 쉽다. 결국 대다수 노동자들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 채 재해가 반복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노동운동의 주요 세력들이 지금 법안 통과의 의의를 사 주면, 중대재해법 개정 요구에도 힘이 실리기 어려워진다. ‘이미 취지를 담은 법안이 통과됐는데 또다시 개정이냐’는 우파들의 반발에 일관되게 맞서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법안을 “이분법으로 평가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것은 성과와 한계를 함께 보는 ‘공정한 평가’가 못 된다. 기업주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독소 조항들이 가득 차서 일부 진보적 조항을 압도하고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는 전체적인 취지에 대한 평가를 뭉개는 것일 뿐이다.

사실 정부·여당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뒤늦게라도 통과시키려 한 것은 정부 지지율 하락과 박근혜·이명박 사면 논란으로 진보층에서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개혁 제스쳐라도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운동의 핵심 조직들이 껍데기뿐인 법안에서 애써 성과를 사 주는 것은 정부의 위기 탈출 시도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투쟁보다는 입법에 기대는 문제점

이런 점에서 일부 좌파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의 평가를 수용한 것은 더욱 뼈아프다. 문재인 정부의 껍데기뿐인 법안 통과를 비판하고 운동의 대의를 알려, 제대로 된 중대재해 방지를 위한 운동의 발판을 마련하기보다 온건한 세력과의 공조에 강조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에 참가해 주도적으로 활동해 온 불안정노동철폐연대 김혜진 상임집행위원은 12월 18일 〈노동과 세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게 없으면 안 되겠구나’ 생각하는 내용만 꼭 담으려고 했다. 정말 필요하지만, 이번에는 포기한 내용도 있다. 그런데 그 과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어떻게든 기업의 책임을 줄여보려 하는 시도가 정말 안타깝다.”

입법 과정에서 통과될 만한 내용을 중심으로 타협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물론 주요 NGO 같은 온건한 세력은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주류 정당들이 받을 만한 수준으로 법안을 삭감해야 한다는 압력을 가하기 마련이고, 좌파가 이에 타협해야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온건한 세력이 불필요하게 후퇴한다면 좌파는 이들에 대한 비판을 삼가서는 안 된다. 단결해야 한다는 이유로 온건한 세력에 대한 비판을 삼가게 되면 점점 더 온건화 압력에 대처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문제는 기층 투쟁을 강화하는 데 강조점을 두기보다는 입법과 제도화에 방점을 두는 운동으로 기울 때 생기기 쉽다. 입법에 중점을 두게 되면 개혁주의 세력과의 공조에 무게를 둬야 한다는 압력을 받기 쉽다.

사실 그동안 중대재해에 관한 처벌 법안이 없어서 기업주들이 면죄부를 받아 온 것은 아니다. 기층의 압력이 거대하다면 현행법으로도 더 강하게 처벌을 할 수도 있었다.

물론 현행법에 문제가 많았고 따라서 새로운 법안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더 핵심은 국가 기구 자체가 기업과 긴밀히 유착해 있어서 기업 처벌에 미온적이고, 산재 처벌에서 면죄 영역이 넓은 것이다.

그러므로 좌파라면 무엇보다도 기층에서 투쟁을 건설해 기업과 정부를 압박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서 후퇴하지 않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