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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 콜론타이 ─ 여성 해방을 노동계급 혁명에서 찾은 마르크스주의자

이 글은 러시아 혁명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새로운 저작선집 《Writings from the Struggle》(엮은이 캐시 포터)이 발간된 것을 맞아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가 낸 기사로, 콜론타이의 사상과 생애를 간략히 살펴본다. 아직 한국에 번역·소개되지 않은 해당 선집에 관한 부분은 생략했다. 해당 내용이 포함된 원문 전문은 기사 하단 링크를 통해 볼 수 있다.

1917년 혁명 러시아의 사회복지부 인민위원을 지낼 당시의 콜론타이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러시아의 지도적 혁명가로,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노동계급 혁명[러시아혁명] 동안 사회주의와 여성 해방을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싸웠다.

콜론타이는 그야말로 개척자였다.

새로운 사회주의 러시아의 지도자이자 선구적인 사상가였으며,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려고 분투한 인물이었다.

콜론타이는 노동계급의 단결 없이는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여성 노동자들이 그 중심에 참여하는 노동자 대중운동을 건설하려고 애썼다.

오랫동안 콜론타이는 사회주의 사회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고, 그것만이 진정으로 여성을 착취와 차별에서 해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콜론타이는 1904년 12월 볼셰비키에 가입해 당의 전업 활동가가 됐다.

콜론타이는 공장에 몰래 유인물을 반입하고, 여성 모임을 조직하고, 1905년 러시아 전역에서 벌어진 파업과 봉기에 영감을 받아 볼셰비키의 글을 썼다.

1906년 봄에 나온 《노동자 연감》에서 콜론타이는 자본주의의 온갖 병폐와 노동자 권력이라는 대안에 관해 이렇게 썼다.

“현 자본주의 체제가 존속하는 한 경제 위기는 불가피하다.

“모든 구성원의 필요에 응답하는 사회에 의해 경제가 운영돼야만 위기가 끝날 것이다.”

콜론타이의 가장 탁월한 몇몇 저작은 중간계급 페미니스트들과 벌인 논쟁을 중점으로 다룬다. 중간계급 페미니스트들은 남성과의 평등을 추구하면서 노동계급 여성의 이익을 저버렸다.

동시에 콜론타이는 볼셰비키 내에서도 여성 해방의 중요성을 제기하려고 분투했다.

[이번 선집의 번역자·엮은이] 캐시 포터는 이렇게 썼다. “콜론타이는 당내 얼마 되지 않는 여성 활동가 중 하나였고 두 전선에서 싸웠다. 하나는 페미니스트들과의 투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지들의 남성우월주의와의 투쟁이었다.”

이 점은 1908년 페미니스트들이 주도한 전러시아여성대회에서 사회주의적 요구를 제기하기 위해 쓴 “여성 문제의 사회적 토대”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콜론타이는 노동계급 여성들이 남성 노동계급 동지들과 함께 사회주의 사회를 위해 함께 투쟁할 때에만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고 열렬히 주장했다.

“서로 적대하는 두 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단결된 단일 여성 조직은 환상에 불과하다.

“페미니스트에게 정치적 평등은 현존하는 자본주의 체제 내의 평등을 뜻한다. 노동계급 여성에게, 권리를 따내기 위한 투쟁은 노동계급 투쟁의 일부이다. 우리는 일터에서 여성이 남성의 가장 위험한 경쟁자라는 생각과 대결해야 한다.”

콜론타이는 노동하는 남성과 여성을 최대한 단결시키려고 애썼다. 남성과 여성의 “적대” 덕분에 자본주의 체제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성적 관계, 자본주의 가족, 개인의 성적 자유의 중요성 또한 콜론타이가 쓴 글의 주요 주제였다.

콜론타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관계에 부과되는 온갖 제약에서 자유로워질 때에만 의미가 충만한 성적 관계가 가능하다고 봤다.

캐시 포터는 이렇게 설명했다. “콜론타이는 ‘자유연애’를 사랑 없는 문란함이 아니라 열망해야 할 이상으로 그렸다.”

콜론타이는 이제 갓 도시로 이주해 공장에서 일하는 “심장의 첫 떨림, 사랑의 첫 부름에 따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젊은 여성 농민들에게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1916년에 쓴 《사회와 모성》에서는 사회주의 사회가 모든 여성과 아이들을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콜론타이는 노동자와 병사들이 전쟁을 혁명적 운동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레닌의 9월 테제를 읽게 됐다.

캐시 포터는 이렇게 설명한다. “콜론타이는 마침내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에 충실한, 지지할 만한 반전 강령을 발견했다.”

콜론타이는 [1915년에] 쓴 소책자 《누가 전쟁을 필요로 하는가?》에서 전쟁의 원인을 설명하고, 사병들에게 국내에 있는 자기 계급의 적과 싸울 것을 호소했다.

콜론타이는 이렇게 썼다. “정부들은 서로 전쟁을 선포하면서 내세운 상대국의 악행을 자기 나라에서 자행한다.

“자본과 자본이 충돌한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와 이를 구매하는 소비자를 갈취해 다른 자본을 파괴하고, 독점을 구축하려 한다.

“전 세계 노동계급이 직면한 임무는 이윤을 늘리려고 수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자본가 패거리들을 분쇄하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임박했다.

1917년 3월 10일, 수도 페트로그라드 전체가 파업에 들어갔다.

봉기가 일어나 차르가 퇴위했다. 그 소식을 들은 콜론타이는 “이 기쁨을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콜론타이는 망명을 끝내고 러시아로 귀국했고, “소비에트”라고 불린 평의회를 통해 노동자와 농민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레닌의 입장을 지지했다.

콜론타이는 “1917년 4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레닌이 한 첫 연설에 대해 지지 발언을 한 유일한 볼셰비키 당원”이었다고 캐시 포터는 썼다.

러시아 임시정부가 대중 시위를 공격한 “7월 사태” 이후 콜론타이는 3개월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러나 감옥에 있으면서도 콜론타이는 볼셰비키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콜론타이는 사상 최초로 정부에 입각한 여성이었다. 볼셰비키가 러시아를 장악한 10월 25일, 콜론타이는 사회복지부 인민위원으로 선출됐다.

“우리는 배가 고팠고, 눈도 거의 붙이지 못했다. 그러나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의 삶을 건설하기 위해 모두가 열정적으로 일했다.”

콜론타이는 공동 식당, 탁아소, 산부인과, 고아원, 퇴역 군인과 노인을 위한 주택을 신설했다.

포터는 이렇게 설명했다. “공동 생활은 콜론타이가 지닌 새로운 사회주의 가족의 비전에서 중심에 있었다.”

콜론타이는 혁명으로 만든 첫 번째 법률의 초안을 썼고, 거기에 남녀 동일임금을 도입했다.

또, 가정 폭력을 범죄화하고 여성에게 이혼권을 보장하는 결혼법의 초안을 썼다.

콜론타이가 정부에서 일한 시기는 전혀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었다.

콜론타이는 제1차세계대전에서 러시아 군을 철수시킨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에 반대표를 던진 후 1918년 4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전쟁

그러나 사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내전이 러시아를 휩쓸자 콜론타이는 전선으로 이끌렸고, 곳곳을 순회하며 혁명을 방어하는 스피커 구실을 하기 위해 “당과의 이견을 잠시 제쳐두었다.”

콜론타이는 우크라이나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새로운 영토를 점령하거나 다른 민족을 속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들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콜론타이는 여성부인 제노텔에서 또 다른 주요 업적을 남겼다.

1920년 11월부터 콜론타이는 제노텔의 수장이 됐다. 제노텔은 여성의 정치적 발전을 고무하고 여성의 평등을 추구한 기존 법률을 집행했다.

그는 제노텔의 공식 기관지였던 〈공산주의 여성〉에 이렇게 썼다. “여성 해방은 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근본을 이룬다.”

그러나 새로운 러시아 사회는 나라 전체를 산산조각 낸 내전을 극복하고 다시 자리를 잡기 위해 고전하고 있었다.

1920년 기근이 새 사회주의 사회를 휩쓸었고, 러시아는 정치적으로 고립되고, 적대적인 제국주의 열강에게 포위당했다.

상황을 진전시킬 최선의 방안이 무엇인지를 두고 정부 안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콜론타이는 정부 내 노동자반대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노동자반대파는 중앙정부가 아니라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가 경제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의 운명은 칼 끝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었다.

만약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완화했다면 새롭게 등장한 사회는 반혁명에 극도로 취약해졌을 것이다.

노동자반대파에서 활동한 이후 콜론타이는 제노텔에서 축출되고, 당의 견책을 받았다.

사회주의 러시아가 스탈린주의 국가로 퇴보한 것은 콜론타이 개인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1922년부터 콜론타이는 사실상 정치적 유배자가 됐고, 1952년 사망할 때까지 잔혹한 스탈린주의 정권의 해외 대사를 지냈다.

하지만 콜론타이의 저작[에 담긴 사상과 실천]은 오늘날의 혁명가들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준다.

콜론타이는 노동계급의 힘을 이해했고, 노동계급 여성들이 투쟁을 이끌도록 독려했으며, 혁명이 만들어 낼 사회주의 세계를 위해 투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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