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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에 선 파키스탄

갈림길에 선 파키스칸

이수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폭격은 인접국 파키스탄을 정치적 격랑 속에 빠뜨리고 있다. 내전의 조짐도 엿보이고 군사 쿠데타 설도 나돈다. 파키스탄 최대의 도시인 남부의 카라치에서는 수천 명의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해 세 명이 죽었다. 발루치스탄 주 퀘타에서는 폭력 시위가 시가전으로 변했다. 아프가니스탄과의 접경 지대인 페샤와르에서는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렸고 거리에는 장갑차가 배치됐으며 기관총을 장착한 무개차가 순찰을 돌고 있다.

이제는 반미·반전 구호에 반정부·반체제 구호가 결합되고 있다.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들은 “무샤라프[파키스탄 대통령]는 정권 안정을 위해 미국에 구걸하고 있다. 미국과 함께 무샤라프도 사라져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경찰도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시위대 체포령에 불복했던 친탈레반 성향의 퀘타 경찰 수사국장이 해임되기도 했다. 그러자 무샤라프는 시위 진압에 군대까지 동원하려 한다. 9월 11일의 테러 참사 이후 오사마 빈 라덴과 아프가니스탄이 미국의 표적이 되자 파키스탄은 곤경에 처했다. 과거에 탈레반을 무장시키고 돈을 대주면서 후원했던 파키스탄이 이제 자신의 피조물인 탈레반과 맞서 싸워야 하는 얄궂은 운명에 처하게 된 셈이다. 그래서 무샤라프는 탈레반과 자국 민중 그리고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계속 오락가락했다. 무샤라프는 탈레반에게 라덴을 미국에 넘기라고 종용했지만, 탈레반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결국 두 차례 중재단을 보내 탈레반을 설득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정책을 180도 전환해 탈레반과 완전히 단교하고 탈레반 이후를 염두에 두며 자히르 전 국왕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친미

무샤라프는 미국의 폭격이 시작된 뒤에 정보부장과 육군 참모부총장을 교체하는 등 군부 내 반대파들을 숙청하면서 자기 권력 기반을 강화했다. 시위를 주도하는 이슬람 정당 자미앗 울 이슬라미의 총재를 가택연금하고, 잠무 카슈미르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민병대의 지도자를 체포하는 등 파키스탄 내 친탈레반 세력을 공격했다. 또, 시위에 참가하는 모든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국경 밖으로 추방했다. 파키스탄 국경수비대는 탈레반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무샤라프가 미국을 지지하고 나서자 서방은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라는 멍에를 벗겨 주었다. 부시는 파키스탄에게 5천만 달러의 경제 원조를 허가했고, 1998년에 파키스탄이 실시한 핵실험을 이유로 미국 의회가 결정한 모든 제재 조치들을 철회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파키스탄에 1억 3천5백만 달러의 긴급 융자 제공을 승인했다. 얼마 전에 미국이 발표한 테러 조직 24개 중 하나가 파키스탄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의 파키스탄 지원에 어떤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은 파키스탄의 반미·반정부 정서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공습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파키스탄의 군사 기지 사용을 “최소화해야” 했다. 미국 국무차관 리처드 아미티지는 파키스탄 정권의 취약성을 언급하면서 “반미·반정부 정서에 기름을 붓지 않는 전략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미국은 파키스탄의 군사 기지를 사용하지 못한 채 공습을 감행해야 했다.

파키스탄은 오랫동안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파키스탄의 도움이 없었다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에 맞서 싸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에 냉전이 끝나자 파키스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시들해졌다. 더욱이 냉전기에 소련과 가까웠던 인도가 1990년대 들어 시장을 개방하면서 미국에 접근하자 파키스탄은 찬밥 신세가 됐다. 인도는 미국의 정보통신 산업에 필수적인 고급 두뇌 인력을 제공하는 한편, 거대한 시장 잠재력을 지닌 나라다. 파키스탄이 미국의 오랜 우방이긴 했지만 인도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그래서 미국은 카슈미르 분쟁에 대해 전통적으로 파키스탄을 편들었던 태도를 버리고, 지난 1999년의 인도-파키스탄 전쟁 때는 인도의 손을 들어 주었다.

카슈미르

1947년에 인도는 영국에서 독립했지만, 식민지 시절 영국의 분열지배 전략에 따른 힌두-이슬람의 갈등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해 독립했다. 이 때 영국의 간접 통치를 받던 6백여 왕국들도 인도와 파키스탄 중 하나를 선택했다. 가장 큰 문제가 생긴 곳은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던 북부의 카슈미르 왕국이었다. 카슈미르의 지배자 하리 싱은 힌두교도였지만 피지배자의 절대 다수는 무슬림이었다. 하리 싱은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서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자 일부 파키스탄인이 수도 스리나가르를 점령했고 이에 놀란 왕이 인도군의 도움을 받아 파키스탄인들을 쫓아냈다. 결국 하리 싱은 인도를 선택했고,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에 위치한 카슈미르는 끊임없는 분쟁의 대상이 됐다.

카슈미르를 둘러싼 양국의 대립은 1947년 10월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폭발했다. 전쟁 뒤 카슈미르의 3분의 1은 파키스탄, 나머지는 인도 영토가 됐다. 파키스탄이 점령한 지역은 아자드 카슈미르, 인도 점령지는 잠무 카슈미르라고 불렀다. 1965년에 파키스탄은 잠무 카슈미르를 차지하려고 “그랜드 슬램” 작전을 개시했지만 실패했고, 1971년의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도 패배했다. 파키스탄은 무력으로 카슈미르를 점령할 수 없자 분쟁의 해결책으로 주민 투표를 주장해 왔다. 카슈미르 주민의 60퍼센트 이상이 무슬림인 까닭이다. 그러면서 1989년부터 그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무자헤딘을 지원해 왔다. 반면, 인도는 카슈미르의 영유권을 계속 주장하면서 그 지역이 국제적인 분쟁 지역으로 부각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편, 냉전이 끝나자 과거에는 파키스탄의 입장을 지지했던 미국은 ‘불개입’ 정책으로 돌아섰다. 1999년 5월에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다시 전쟁이 벌어지자 미국은 파키스탄과 인도 총리를 각각 워싱턴으로 불러들여 “해결책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평화적 대화뿐”이라며 인도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 결과 파키스탄의 “독립 이래 가장 강력한 민간인 지도자”라는 평을 듣던 나와즈 샤리프 총리는 군부의 반발을 사면서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됐고,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무샤라프를 해임하려다 오히려 자신이 쿠데타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사실, 파키스탄 사람들의 대다수는 인도와의 관계가 정상화되기를 바라고, 카슈미르 문제를 협상으로 해결하고 싶어한다. 지금 카슈미르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의 수는 팔레스타인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다.

파키스탄의 이슬람 근본주의

현재 파키스탄 민중 대다수가 미국의 전쟁에 반대하고 있지만 그들이 모두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정당들은 선거에서 7퍼센트 이상의 득표를 한 적이 없다. 오히려 파키스탄에서 대중적인 이슬람 전통은 세속적이고 관용적인 것이었다. 파키스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 독재 덕분이었다. 1977년에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무함마드 지아 울 하크는 파키스탄의 이슬람화를 추진하여 군부 요직에 무슬림을 중용하고 사회 각 부문의 상층을 무슬림으로 채웠다. 이슬람식 신체 절단이나 태형과 같은 형벌을 도입하고 종교적 소수의 투표권을 박탈했으며 이슬람 재판소를 설치하는 등 샤리아를 제도화했다.

1980년대 이후 성장한 모든 근본주의 세력은 언제나 국가의 후원을 받아 왔다. 파키스탄 군부와 국가 기구의 후견이 없었다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파키스탄 사회에서 발판을 마련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1920년대 터키의 세속적인 지도자 케말 파샤에 비유하곤 했던 무샤라프는 집권 초기에 근본주의자들에 대항하는 조치를 취하고자 했지만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군부가 분열할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샤라프 주변에서 다수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세력은 강경파 근본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노동자 계급

무샤라프는 9월 27일을 ‘국민 화합의 날’로 정하는 한편, 직접 노동조합 지도부를 만나 그들의 신뢰를 얻으려 했다. 9월 24일 이슬라마바드에서 무샤라프를 면담한 파키스탄노동자연맹(PWC)의 지도부는 무샤라프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렇게 정부를 지지하는 노조 지도부의 입장은 노동자 대중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지난 9월 19일 무샤라프가 TV 담화를 통해 미국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한 뒤에 실시된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부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응답은 32퍼센트였던 반면 반대한다는 응답은 62퍼센트나 됐다. 시위 참가 노동자들은 미국에 대한 군사 기지 제공을 반대하면서, “미국이나 영국 같으면 원치 않는 전쟁을 하라고 다른 나라에 땅을 내주겠느냐”고 분개했다. 그들은 또 무샤라프가 미국에 군사 기지를 내준다면 거대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시위 노동자들은 영토 사용을 미국에 허가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과거에 아프가니스탄을 내세워 소련과 싸우게 했을 때도 미국은 파키스탄을 통해 막대한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지만,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게 뭐냐”며 반대했다.

미국의 공습이 시작된 뒤에 실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폭격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70퍼센트로 더 늘어났다. 카라치처럼 노동자 계급이 큰 규모로 거주하는 도시에서는 시위 양상이 격렬해졌다.

오늘날 파키스탄 인구 1억 4천만 명 중에 4천5백만 명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4천만 명의 노동자 중에 1천만 명 이상이 도시에서 일하고 있으며, 2천만 명 이상이 비농업 노동자다. 전체 노동력 중에서 농업 노동력이 차지하는 비율은 44.1퍼센트인 반면, 국민총생산에서 농업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26퍼센트에 불과하다.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경제적 비중이 그만큼 크고 정치적 잠재력도 크다.

지금의 파키스탄은 농업 국가가 아니라 개발도상국가다. 매우 소규모 정당이지만 1999년 10월의 무샤라프 쿠데타에 유일하게 반대했던 파키스탄노동당과 같은 정치 좌파, 실업과 민영화에 반대하는 노동자 투쟁, 여성 운동 등과 같은 투쟁 전통도 있는 나라다. 지금 파키스탄의 반정부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듯하다. 그들이 지금의 위기 국면을 주도할 수 있는 이유는 대중의 반미·반전·반정부 정서를 대변하지도 못하고 지도하지도 못하는 PWC 노동조합 지도부와 같은 기존 운동 지도부의 정치적 무능력 때문이다. 미국의 보복 전쟁이 계속되고 대중 속에서 반미·반정부 분위기가 더욱 확산되는데도, 기존의 운동 지도부가 제대로 대중을 이끌지 못한다면 대중은 더욱더 이슬람 근본주의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1979년의 이란 혁명과 같은 상황이 벌어져 파키스탄에서도 이슬람 근본주의가 혁명의 성과물을 가로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정돼 있지 않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파키스탄 노동자 계급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정치와 조직을 발전시키면서 진정으로 올바른 대안을 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