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30년 전에 소련이 붕괴했다. 미국을 견제할 냉전의 한 축이자 ‘사회주의 종주국’을 표방해 온 소련의 붕괴는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서구 지배자들은 소련 붕괴가 자본주의의 승리를 뜻한다고 주장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사회가 그 본질적 성격을 계속 유지하다가 1991년에 무너졌다는 것이다.

냉전 시대를 이끈 양대 진영이 모두 소련을 사회주의로 봤기 때문에, 소련 붕괴가 사회주의의 패배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상식(경험주의적 인식)이 돼 있다.

그러나 1991년 붕괴한 소련의 체제는 스탈린주의 체제로,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으로 등장한 사회 체제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인류 최초로 성공한 노동자 혁명이었다. 혁명으로 탄생한 새 사회는 당시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보다 비할 데 없이 민주적이고 평등했다.

자본주의 의회의 의원들과 달리, 러시아 소비에트 대표자들은 대중에 책임을 졌고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면 즉시 소환될 수 있었다. 소수가 제멋대로 지배하고 착취하는 상황은 없어졌다.

유급 출산 휴가가 도입되고, 낙태와 이혼의 자유, 성적 지향의 자유가 허용됐다. 차별을 극복하려는 국가적 차원의 시도로는 최초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대로 발현되지 못한 대중의 잠재력이 속박에서 풀려났다. 새 사회 건설과 교육에 대한 노동자들의 의욕과 헌신이 넘쳤다.

고립과 변질

그러나 혁명은 곧 커다란 객관적 어려움에 봉착했다. 대내외의 반혁명적 요인이 혁명을 위협했다.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모두 러시아 혁명의 미래는 궁극적으로 국제(특히 독일) 혁명의 성공에 달려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18년 11월에 시작된 독일 혁명이 1923년 11월에 끝내 패배하면서 혁명 러시아는 고립됐다. 이미 영·일·미 등 16개국이 직접 개입하거나 후원한 반혁명 내전을 극심한 고통 속에서 물리친 지 2년밖에 안 된 뒤였다.

많은 노동자들이 반혁명에 맞서는 군사 전선에서 희생되거나, 내전 탓에 경제가 붕괴하면서 식량을 찾아 도시를 떠났다. 살아남은 혁명적 노동자들 중 상당수는 공장(대부분 파괴된)을 떠나 국가기구에서 직책을 맡았다.

300만 명이 넘었던 러시아 노동자가 1921년 겨우 120만 명으로 줄었다.

봉쇄와 내전 과정에서 노동자 민주주의의 주체가 돼야 할 혁명적 노동계급이 와해돼 버렸다. 이제 기반이 무너져 공중에 붕 뜬 당과 국가기구는 점차 관료화됐고, 관료층이 부상했다. 스탈린은 이 관료층을 이끄는 자였다.

관료층이 부상하면서 당의 이데올로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자, 스탈린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사회주의 전통을 부정하고 ‘일국사회주의’론을 주창했다.(정확히 말하면 부하린이 주창한 것을 스탈린이 도용했다.)

관료층은 신생 국가 소련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국제 혁명보다는 소련에서 (관료들이 장악한 국가기관의 주도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주장에 솔깃했다.

국제 혁명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해도, 신생 국가는 적대적인 서구 열강과의 경쟁 속에서 생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소련 국가 차원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맹목적 경쟁 체제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스탈린을 비롯한 신흥 관료층은 그 방향을 향해 무자비한 걸음을 내딛었다.

반혁명

스탈린은 1928년 제1차 5개년계획에 착수했고, 이를 계기로 거의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1920년대 중반까지 소련에서 생산의 중심은 (비록 부족한 양이어도) 대중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재화 생산에 있었다. 그러나 1·2차 5개년계획을 거치면서 소비재 생산은 절반으로 줄었다.

군비를 키울 수 있는 중공업 기반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마련하는 것으로 우선순위가 대체됐다.

1931년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 뒤처져 있다. 우리는 10년 안에 그들을 따라잡아야 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더 많이 생산할수록, 노동자들이 생계를 위해 받는 몫은 적어졌고, 공업 투자, 탱크와 전투기 등에 쓰이는 몫은 갈수록 늘어났다.

스탈린 정권은 곡식을 더 많이 확보하려고 농업을 강제로 집산화했다. 졸지에 자기 땅과 가축을 잃게 된 농민들은 크게 반발했다.

스탈린 정권은 이를 무자비하게 제압했다. 농촌 곳곳에 차르 시절이나 내전 시기에 보던 검문소가 설치됐고, 저항하는 농민들은 강제수용소로 추방됐다.

스탈린 시절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일하는 어린 소년

강제 집산화의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1939년 소련 인구가 1933년에 비해 1000만 명가량 줄어들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1917년 혁명의 성과들이 잇달아 파괴됐다. 예컨대 이혼의 자유와 낙태의 자유가 폐지됐다. 여성 해방이 자본 축적의 과제를 성취하는 데 걸림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신 모성이 찬양됐다.

혁명 직후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이었던 소련의 노동법은 이제 완전히 억압적인 법률로 바뀌었다.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자신을 보호할 실질적 권리를 상실했다.

스탈린 정권은 아래로부터의 통제나 (작을지라도) 일터에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모두 제재를 가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끌고 갔다.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병사한 레닌을 제외하면, 1917년 혁명 당시 볼셰비키 중앙위원 중 1930년대 말에 살아남은 사람은 스탈린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당시 스웨덴 주재 대사로 해외에 있었던 덕분에)뿐이었다. 다른 중앙위원들은 모두 처형당하거나 살해당하거나 자살을 강요받았다.

이처럼, 1917년 혁명을 일군 한 세대의 혁명가들이 제거됐고, 그 빈 자리는 스탈린에게 충성하는 자들로 채워졌다.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스탈린이 재편한 소련은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사회가 됐다. 스탈린 체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철저히 부정하고 파괴한 결과물이었다.

스탈린주의 관료층이 국가와 생산수단을 통제했고, 이를 이용해 사회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통제했다.

지배 관료는 경제를 ‘계획’했다. 그러나 소련의 ‘계획’ 경제는 해외로부터 강제된 경쟁 압력이 반영된 관료적 지령경제였지, 진정한 계획 경제가 아니었다. ‘계획’의 우선순위는 소련을 강력하게 만들어 서방의 선진국들과 경쟁해야 하는 압력이었다.

소련은 미국을 비롯한 다른 자본주의 강대국들과 군사적·지정학적 경쟁을 했다. 이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경제의 효율과 생산성이 경쟁국보다 뒤처지지 않게 애써야 했다.

그래서 소련의 지배 관료는 전 세계 다른 나라의 지배계급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그리고 농민)을 희생시켜 자본을 축적하는 방식으로 생산을 조직했다.

흔히들 사기업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없는 국유·국영 경제를 사회주의로 여긴다. 그래서 소련이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었다고 하면 다들 의아해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국유화가 아니라 노동자 통제다. 국유 경제의 존재만으로 그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볼 수 없다.

모든 경제가 국유화된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국가를 통제하느냐’다. 형식적인 소비에트 대회도 열리지 않는 나라에서 국가의 주인은 관료층이었다.

자본주의는 국가와 기업들의 세계로서 존재해 왔고,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국가의 구실은 더 중요해졌다. 오늘날에도 서구 경제들에서 국가 부문이 차지하는 몫은 적어도 30퍼센트를 넘는다.

다만, 소련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부재했다는 점에서) 국가자본주의 경향이 다른 경제에 견줘 전면적으로 발전한 경우였을 뿐이다. 이것이 가능한 데는 러시아 혁명의 패배라는 역사적 조건이 필요했다.

따라서 소련은 사회주의 사회가 전혀 아니고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 사회의 작동 원리라는 본질이 서방 자본주의와 다르지 않은 사회였다.

흥망성쇠

노동자와 농민의 엄청난 희생을 바탕으로 급속한 축적을 이루면서 소련 국가자본주의는 한때(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소련 스탈린 체제는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서 [각 민족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이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세력권 분할 합의를 통해] 동유럽을 차지했다. 곧이어 중국·북한·쿠바 등지에서도 유사한 체제가 수립됐다.

1950년대 소련 경제는 세계 2위의 공업 경제가 됐다. 소련은 세계가 양대 진영으로 갈라져 치열하게 경쟁한 냉전 시기에 제국주의 경쟁의 한 축을 이뤘다. 소련은 한때 미국보다 한 발 앞서 인공위성을 발사할 만큼 경제적·기술적 성취를 이루기도 했다.

1956년 헝가리 노동자 혁명 스탈린 동상을 박살내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소련 경제도 자본주의에 내재된 근본 문제들에 봉착하게 됐다. 소련 경제는 1960년대 이후 성장률이 점차 둔화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서구 경제가 위기에 빠져들 때 소련 경제도 성장이 둔화돼 평균 성장률이 2.6퍼센트에 불과했다. 1980년대 소련 경제는 정체했다.

특히, 세계 자본주의의 추세가 바뀌고 있었다는 점이 소련 경제에 악재였다. 1970년대 들어 제조업의 지리적 재배치를 포함해 국제적 분업 생산이 확대되는 세계화 경향이 유력해지기 시작했다. 서방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들은 판매뿐 아니라 생산도 국제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한 기업들이었다.

소련의 폐쇄적 국가자본주의 방식의 생산은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으로 변해갔다. 더 발달한 생산성의 결과물들을 이용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그랬다. 미국 등 서방 선진국들과의 기술 격차도 점점 벌어졌다.

소련 경제가 세계 시장에 통합되지 않는다면 소련 경제의 정체를 타개하기 어렵게 됐다.

이런 위기를 배경으로 1980년대 중엽부터 새 서기장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개혁파 소련 관료들이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스탈린 체제를 유지하면서, 부분적 개선으로 위기를 탈출하려는 위로부터의 개혁 시도였다.

그러나 곧 이런 위기 대처 방향을 놓고 지배 관료들 간에 쟁투가 벌어졌다. 개혁의 속도를 둘러싼 상이한 이해관계 때문에 관료들이 위기 앞에서 단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1989년 소련 광원 노동자 파업

지배계급의 분열을 틈타 노동계급도 저항에 나섰다. 특히, 이 저항은 1989년 광원 파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소련 내 비러시아계 민족 독립 투쟁도 가열됐다.

지배계급의 분열과 쟁투, 계급투쟁과 민족 운동은 사회적 격변을 일으켰다. 결국 1991년 소련은 자체의 모순을 이겨내지 못하고 붕괴해 버렸다.

이 여파로 소련 바깥의 많은 공산당들이 큰 타격을 입고 곳곳에서 해체되거나 더 많은 경우 개혁주의 정당으로 변신했다.

소련 붕괴는 사회주의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 혁명의 성과들을 파괴하고 권위주의적 일당 통치를 해 온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진 일이었다.

또한 서방 자본주의의 승리도 아니었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는 1970년대 초부터 위기를 겪기 시작해, 소련이 무너질 무렵에도 그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서구 지배계급이 소련 붕괴를 자축한 지 얼마 안 돼, 그들도 경제 불황과 대중 저항(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과 1999년 이후 반자본주의 운동 등)에 부딪혔다.

소련의 경험에서 우리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노동계급이 건설하려 한 사회, 그 이상과 전통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것으로, 오늘날 세계자본주의 위기의 대안을 찾는 이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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