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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중재법 개정은 민주적 권리인 언론 자유 제약 시도다

국가의 언론 통제 강화는 민주적 권리의 핵심을 제약해서 노동자와 차별받는 사람들의 운동에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 ⓒ이미진

언론중재법 개정안 처리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 한 달 간의 주류 양당 협의체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여당인 민주당은 법안을 곧 단독 처리할 수도 있다.

개정안의 핵심은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로, 언론이 가짜뉴스를 보도해 명예훼손 손해를 입히면 법원 판단 하에 손해배상액을 최대 5배까지 늘릴 수 있다는 게 골자다.

이는 가짜뉴스를 명분으로 의혹 단계에서의 보도나 의견성 보도를 불온시하고 국가의 억압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국가가 ‘바람직한’ 언론과 그렇지 않은 언론을 판별하고 후자를 징벌할 수 있게 해 국가의 언론 통제를 강화하는 시도이다.

그래서 이를 단지 민주당의 대선용 치부 가리기 시도로만 봐선 안 된다.

그런 피상적인 관점으로는 첫째, 국민의힘이 자신들이 마치 민주 투사인 양 행세할 때 그 위선을 제대로 꿰뚫지 못하게 만든다.(하단의 “우파는 표현의 자유에 관심 없다” 기사를 참조하시오.)

둘째, 그들만의 이전투구라는 생각 탓에 민주주의 권리를 방어하지 않는 실수를 할 수 있다.

언론 통제의 본질

국가를 통한 언론 통제 강화 시도에는 장기 불황과 지정학적 위기, 팬데믹 등으로 인한 기존 질서의 불안정화에 대처하려는 지배계급의 의지가 반영돼 있다.

자본주의 위기가 지속된 2010년대에 가짜뉴스 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부상해 왔다. 지난해에는 코로나 관련 음모론이 세계적인 가짜뉴스로 유행했다. 이는 가짜뉴스 현상이 사회 불안정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반영이자 증상이라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다.

지배계급 다수는 가짜뉴스 유행 현상을 실제로 골칫거리이자 위협으로 여긴다. 그것이 정부 관료, 정부나 기업에 고용된 전문가, 대형 언론사 등 지배 이데올로기 기구 등의 신뢰 추락을 드러내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이런 현실의 진정한 원인을 찾아 해결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 그들이 수혜자인 사회 시스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의 억압적인 권력으로 매체와 언론을 감시하고 처벌해서 제약하는 것이 주된 대책일 수밖에 없다.

결국 정부가 가짜뉴스 검열·단속에 관심을 가지는 까닭은 민주주의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도 아니고, 진실된 미디어를 보호·육성하는 데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커져서도 아니다.

코로나19 방역이나 가짜뉴스를 명분으로 한 언론·집회의 자유 제한 조처들이 실제로 노동자들과 좌파를 겨냥해 얼마든지 휘둘러져 온 이유다. 민주노총 위원장 구속이 이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 국가는 언제나 언론을 통제하고 검열하려고 해 왔다.

보편적인 언론 자유가 피억압자들에게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체제와 지배자들을 마음껏 비판하고 폭로하려면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가장 유리하기 때문이다.

반면 국가의 역할은 체제와 지배자들의 질서를 수호하는 데 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계급 사회에서는 국가의 본질이 비민주적인 억압 기구일 수밖에 없다.

근대 여명기에 부르주아지는 신분제에 예속된 봉건제 국가에 대항한 저항을 지도하면서,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한 사회와 언론 자유를 약속했다. 그러나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자 그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자유와 실질적 평등은 노동계급에게는 이상화된 허울이었고, 현실과는 언제나 커다란 괴리가 존재했다.

가령 미국은 1791년 역사상 최초로 언론의 자유를 헌법에 명문화했지만,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표현을 형사 처벌하는 것이 위헌임을 연방대법원이 인정한 것은 무려 1931년이 돼서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떠밀릴 때만 민주적 권리를 양보하고, 그조차 가장 제한적인 조처들을 철회하는 수준에서 멈추려 해 왔다. 특히, 자본가 계급이 손쉽게 분쇄할 수 없을 수준으로 노동계급의 저항과 조직이 성장하고 지속될 때,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형식의 국가형태가 허용됐다.

한결같은 반대

국가의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본질 때문에, 언론의 자유 보장과 반동적 표현의 규제를 모두 국가에 의존하려는 개혁주의적 시도는 모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것은 현재 언론중재법 개정안과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대한 개혁주의 정당들의 반대가 혼란스럽고 취약한 이유기도 하다.

예컨대 우파와 국가로부터 ‘종북’ 공격을 받아 형·민사상 소송을 했던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는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2019)에서 국가가 언론에 더 많은 배상액이나 위자료를 물려야 한다는(민사 책임 강화) 제안을 하고 있다. 국가의 처벌 성격이 강한 형사와 달리 손해배상 등 민사 책임 강화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정의당과 언론 NGO, 언론노조를 포함한 언론현업단체들은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 입장을 펴 법안 강행을 비판한다. 그러면서도 그 대안으로 사회적 합의 기구를 구성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사회적 대화를 통해 몇 가지 수정(좀 더 명확한 기준 마련 등)을 거쳐서 더 나은 국가 개입 방안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이처럼 국가의 언론 규제에 다소 열려 있는 입장으로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졸속 추진’을 반대하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자칫 국가의 언론 통제 강화의 물꼬가 될 수 있는 조처들을 왼쪽에서 정당화해 줄 위험조차 있다.

물론 명예훼손이나 모욕을 중단시키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민사 절차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약자들이 있다. 이 경우 소송은 그들의 권리다.

그러나 소송은 계속되는 특정 가해나 더 나쁜 결과를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처일 수는 있어도 가짜뉴스나 혐오 표현,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가 낳는 폐해와 반동적 주장들을 근절할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징벌적 손해배상제 등 언론 규제 강화는 민주적 자유·권리에 대한 제약이라는 것이다.

국가는 반동적 사상과 행동들에 맞서 싸울 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중립적 존재가 아니다. 국가는 민주주의의 주된 증진자가 아니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국가의 언론 통제 강화를 지지하는 것은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국가에게 주어지는 어떠한 새로운 권력과 권한도 결국 노동자 운동과 좌파적 세력(그리고 그들의 언론)을 향해 사용될 것이다. 좌파가 이 점을 이해하고 분명하게 반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과제다.

언론의 자유는 왜 중요하고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국가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곧 가짜뉴스나 혐오 표현, 반동적 주장과 세력들을 방치하자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레닌과 함께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였던 트로츠키는 1938년 멕시코에서 반동적 언론을 국가 검열로 규제하려고 하는 스탈린주의자들(공산당)의 시도에 대해, 부르주아 국가를 강화하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노동자와 농민이 반동적 언론을 금지함으로써 반동적 생각에서 해방될 것으로 여[기는]” 것은 “한 치 앞도 못 보는 [것]”이다.

“실제로는 극대화된 표현의 자유만이 노동계급의 혁명적 운동을 전진시키는 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반동적 언론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조직과 언론을 통해 스스로 완수해야 할 과제를 부르주아 국가의 억압적인 주먹에 내맡길 수 없다.”

국가의 언론 개입을 반대하는 사회주의적 견해는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의 자유시장론’, 즉 서로 다른 주장과 사상들이 알아서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상대주의적 다원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완전한 자유시장 경쟁이 이론 속에만 존재하듯이, 사상의 자유시장도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 등을 이용할 능력의 격차가 계급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입장은 가짜뉴스나 반동적 주장이 판을 칠 때 무력하거나, 다시금 국가에 의존하는 길로 기울기 십상이다.

대중 스스로의 힘으로

이와 달리, 사회주의자들의 대안은 국가의 간섭과 개입을 반대하는 동시에 반동적 집단과 그들의 주장에 맞서 공개적으로 논쟁하고 투쟁함으로써 민주적 자유를 확대한다는 것이다. 대중 스스로의 힘으로 말이다.

이미 그러한 투쟁들은 저항의 역사 속에서 숱하게 벌어져 왔다.

제1차세계대전 시기에 미국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 노동자들은 전시에 착취와 억압을 강화하던 사용자와 정부에 맞서 싸움과 동시에, 이들을 규탄하기 위해 9년 동안이나 표현의 자유 투쟁(Free Speech Fight)을 벌였다.

또, 1960년대 버클리대학 학생들은 반전 운동과 흑인 평등권 운동에 고무받아 정치 활동을 활발히 했을 뿐 아니라, 이를 제약하려는 대학 당국에 맞서 연좌 농성과 점거 등으로 언론자유화운동(FSM)을 벌여 성과를 거뒀다. 이는 1968년 운동 물결의 일부였다.

1987년 반독재 항쟁 물결의 일부였던 언론 민주화 운동 ⓒ출처 민주언론시민연합

한국에서 벌어진 1987년 6월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파업도 한 사례다. 엄혹한 독재 치하에서도 노동계급 대중은 저항했고,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 폭로 등 언론의 자유 요구와 투쟁도 그 속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런 투쟁들에서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더 큰 사회 변화를 위한 급진적 사상과 주장을 담기 위해 필요한 소중한 ‘그릇’이었다.

국가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국가에 요구를 제기하거나, 또는 법률을 이용하거나 바꾸는 투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체제가 아직 유지되는 한, 그 체제가 강요하는 규칙에 저항하고 그것을 바꾸려 투쟁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국가와 법률이 더 나아지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대중 스스로의 행동으로 진정한 개혁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금 강조컨대, 아래로부터의 능동적인 대중 투쟁을 건설하기 위해서, 자유롭게 토론하고 비판하고 나아가 집단적 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돕는 언론·표현·출판의 자유가 중요하다.

이미 한국 국가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다양한 수단들을 갖고 있다. 허위사실뿐 아니라 사실 적시 명예훼손도 처벌할 수 있고, 방송통신위원회나 선거관리위원회 등이 법원조차 거치지 않고 게시물에 제재를 가할 수 있다. 여기에 잊지 말아야 할 것으로 국가보안법까지 있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본질적으로 민주적 권리의 핵심을 제약하는 시도다. 기존의 강력한 언론 규제들이 있지만 이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음이 드러나자 가짜뉴스를 명분으로 말이다.

우파는 언론의 자유에 관심 없이 위선 떨 뿐

언론중재법 개정 시도를 민주당이 대선을 앞두고 부패한 치부를 숨기는 데 급급해 시작한 일로 보는 것은 피상적인 관점이다.

특히, 국민의힘과 우파가 그렇게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권력에 맞서 저항하는 민주 투사라도 된 양 언론의 자유 운운하는 것은 지독하게 위선적인 것이다.

우파들은 갑자기 표현과 언론의 자유에 관심 있는 척하지만, 그들에게는 평화적으로 F-35 도입 반대 운동을 하다가 국가보안법으로 탄압 받고 있는 청주 활동가들의 자유는 안중에 없다. “공익을 저해할 요소가 있다”면서 퀴어문화축제 조직위를 불허한 서울시장 오세훈에게 성적 지향 표현의 자유는 어디 있는가?

국민의힘은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언론재갈법”이라고 비난하는 현수막을 들지만 그 뒤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번 국회에 인터넷 준실명제 부활 법안을 슬쩍 발의해 놓았다. 지난 5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법안소위는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언론 통제 강화 시도의 진정한 목적이 민주주의 제한에 있으므로 우파와 국민의힘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다.

국민의힘은 가장 오래 집권했던 정당이고 현재도 거대 야당으로서 대자본가들의 제1선호 정당이다. 무엇보다 내년에는 다시 집권할 수도 있다. 그들이 다시 집권한다면 언론 규제는 그들의 주된 무기가 될 것이고, 추가적인 공격도 얼마든지 할 것이다.

다만, 국민의힘은 아직은 야당이고 대선을 앞둔 힘 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는 지금 시기에 민주당이 추진하는 법안에 맞장구쳐 주지 않으려 한다.

국민의힘은 민주당과 정쟁을 벌이고 반사이익 이미지를 챙기는 데 진정한 관심이 있을 뿐, 민주당의 법안 강행을 제대로 저지할 생각이 없다.

우파와 지배자들은 표현의 자유를 늘리는 것에 관심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과 권력이 있는 만큼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은 거대한 이데올로기 기구이기도 한 국가를 이용할 수 있고, 원한다면 얼마든지 돈을 들여서 언론사를 설립하거나 활용할 자원들을 가지고 있다.

현 사회에서 미미하게 존재하고 따라서 정말로 쟁취해야 하는 언론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아래로부터 확장해야 하는 자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