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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화 노동사회과학연구소 편집위원의 ‘트로츠키주의 비판’:
스탈린주의의 핵심과 본질을 되살리려 (헛되이) 애쓰다

노동사회과학연구소가 발행하는 《정세와 노동》 2021년 7/8월 호에 김용화 편집위원(이하 존칭과 직함 생략)의 글 ‘《뜨로츠끼주의란 무엇인가?》를 읽고’가 실렸다. 이 글은 영국의 소규모 스탈린주의 토론 서클인 공산당동맹의 토니 클라크가 쓴 《뜨로츠끼주의란 무엇인가?》의 서평이다.

김용화도 밝히고 있듯이, 그 글은 서평이라기보다는 서평 대상 도서의 발췌·요약이다. 그러므로 괄호 안의 숫자를 통해 《뜨로츠끼주의란 무엇인가?》의 쪽수를 나타낼 필요가 있겠다.(러시아어 명칭은 국립국어원의 표기를 따랐다.)

김용화는 글의 서론에서 트로츠키주의가 레닌주의를 계승한다면 왜 트로츠키주의라는 별도의 용어를 사용하느냐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뜨로츠끼주의자들은 뜨로츠끼주의라는 용어는 레닌 사후의 쓰딸린과 뜨로츠끼 사이의 논쟁에서 생겨났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많은 딱지들(예컨대 ‘그리스도인’,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이 그렇듯이, ‘트로츠키주의(자)’는 그 적대자들(스탈린과 그 지지자들)이 비꼬는 뜻으로 붙인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는 유일한 건 내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트로츠키의 정당관은 1917년 이전까진 레닌적이지 않은 범좌파당

이어서 김용화는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옛 소련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중상모략과 날조를 이어받아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멘셰비키’, ‘청산주의자’, ‘기회주의자’ 등의 꼬리표를 붙인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1904년 9월 멘셰비키와 결별했다. 멘셰비키가 자유주의자들과 동맹하겠다고 하는 데다 멘셰비키 자체도 트로츠키의 볼셰비키/멘셰비키 화해론에 반대했기 때문이다.(Richard Cavendish, ‘The Bolshevik–Menshevik Split’. History Today. 53 (2003), p.11.)

김용화는 1911년 트로츠키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에서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있었을 때 레닌이 트로츠키를 멘셰비키보다 더 해악적이라고 비판한 구절을 인용한다(27쪽). 실제로 1917년 이전 트로츠키의 양 분파 화해론은 공허한 메아리였을 뿐 아니라, 그가 볼셰비키 파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그 자신이 훗날 자기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인정한 바였다. 또한 1912년 초 레닌의 분당 실행이 불가피한 일이었다고까지 인정한다.

심지어 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은 트로츠키의 1906년 시베리아 재탈출 이후 제1차세계대전 개전 때까지 그 긴 기간을 그의 “허송세월”이라고까지 부른다(2020년 그의 트로츠키 관련 유튜브).

그러나 트로츠키는 1917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했고 레닌과 협력하며 10월 혁명의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토니 클라크도 감히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어 트로츠키가 “러시아 혁명에 참가하여 지도적 역할을” 했음을 인정했다.(119쪽) 김용화도 트로츠키가 1917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주도적 구실을 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볼쉐비끼가 레닌 지도하에 반자본주의적 혁명 단계로 계속 나아간 것은 뜨로쯔끼의 이론적 고려 때문이 아니라 객관적인 상황의 발전 때문이었고, 뜨로쯔끼가 볼 때, 이는 실제로 영구 혁명[연속혁명]의 실현이었으며, 이를 근거로 그는 볼쉐비끼 대열에 들어갔다. 1917년은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뜨로쯔끼주의가 레닌주의에 가장 근접한 때였다.” (24쪽)

1917년이 트로츠키주의가 레닌주의에 가장 근접했던 때라면, 레닌주의도 트로츠키주의에 가장 근접했던 때이기도 했다는 뜻이다. 즉, 김용화가 인정하듯이, “볼쉐비끼가 레닌 지도하에 반자본주의적 혁명 단계로 계속 나아간 것”은 “객관적인 상황의 발전”이 트로츠키가 연속혁명론에서 전망한 방향대로 흘러갔기 때문이고, 그래서 트로츠키주의와 레닌주의 사이의 공통분모가 컸던 것이다.

이론과 전략의 혁신

이 대목에서 혁명 전략 문제를 살펴봐야겠다. 김용화는 레닌의 1905년 정식, “노동자·농민의 혁명적 민주 독재”를 변호하고 연속혁명론을 비판하면서, 트로츠키가 농민을 과소평가했다고 주장한다. “뜨로쯔끼가 혁명에서 농민층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30쪽)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자로서 농민층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레닌주의적 이해를 완전히 결여[했다.]” 트로츠키가 농민층의 구실을 무시했다는 스탈린주의의 상투적 왜곡에 대한 트로츠키 자신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반박을 의식해서인지, 김용화는 트로츠키가 농민층의 구실을 인정했지만 그 중요성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트로츠키가 농민을 혁명적 세력으로는 인정했지만 새로운 사회를 이끌 세력으로는 보지 않았다는 뜻인 듯하다.

그러나 레닌도 농민을 이렇게 보지 않았던가? 그러지 않았다면 그가 왜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를 여러 차례 강조했던가? 김용화에 따르면, 트로츠키에게 “완전히 결여돼 있다는 레닌주의적 이해”는 그의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1905년)에서 정식화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인데, 사실 레닌의 이 정식은 모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레닌도 농민이 혁명적 집단인 것은 맞지만 단일한 집단이 아니고 또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할 세력도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닌 자신이 같은 책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를 수차례 강조한 것과 일치하는 것은 오히려 트로츠키의 정식화였다. 트로츠키는 ‘농민의 지지를 받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라는 정식을 제시했다.

트로츠키의 전망은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 검증됐다. 레닌도 ‘먼곳에서 온 편지’(1917년 3월)와 더 결정적으로는 1917년 ‘4월 테제’에서 트로츠키의 정식과 사실상 일치하는 제의를 하며 볼셰비키에게 그 실행을 강력히 촉구해, 혁명 전략의 문제에서 이를테면 레닌이 ‘트로츠키주의자’가 됐다. 그러나 김용화는 레닌이 제국주의 전쟁(제1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혁명 전략을 수정했던 사실을 무시할 뿐 아니라, 레닌이 1915년 이전에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이 농민층을 과소평가했다고 (부정확하게) 본 것을 두고 마치 1917년 이후에도 레닌이 그렇게 평가한 듯이 말하고 있다.

김용화는 “뜨로쯔끼는 《영구 혁명》에서, 권력을 장악한 후에 노동계급은 최소강령을 수행하고, 계속하여 사회주의로, 즉 최대 강령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며, 이렇게 주장한다. “러시아가 1914-1918년의 제국주의 전쟁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토록 단기간에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시킬 수 있게 했던 상황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43쪽) “특수한 환경” 때문에 레닌이 노동자 혁명을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인 제1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단순히 그 상황에 적실한 전술들만을 내놓은 것이 아니다. 그는 변화된(1905년에 비해) 전략을 제출했다. 더구나 이것은 심대한 이론적 재고찰을 거친 결과였다. 카우츠키와 각국 사회민주당들의 배신을 목격한 후 그는 전쟁 중에 세 가지 이론적 분야에서 혁신을 이루었다. 첫째, 제국주의론. 둘째, 국가론. 셋째, 변증법(헤겔 재독해). 이 (새로 성찰한) 이론들 각각에 대해 여기서 상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인간 주체 레닌은 단지 객관적 조건에 정확하게 반응하는 ‘기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반응한 방식과 그의 동료 당 간부들(레닌이 말한 “낡은 볼셰비즘”의 구현자들)이 1917년 봄에 날카롭게 견해가 충돌한 게 단지 전술적 차이였던가?

사실 레닌이 《두 가지 전술》을 쓰던 때는 1905년 6~7월이었고 당시도 제국주의 전쟁인 러일전쟁(1905년 9월에 끝남) 중이었다. 그리고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1906)도 제국주의 상황을 이론의 전제로 삼은 것이다. 김용화는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에 대해 읽어 보지 않았을 테지만, 트로츠키가 다가올 러시아 혁명이 프롤레타리아의 지도로 전개될 것이라고 본 핵심 근거는 바로 세계 자본주의가 러시아에 가한 압력 때문에 러시아가 서구를 의식한 중무장을 하기 위해 중공업을 발전시켜야 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는 (부르주아 혁명 전야의 프랑스와는 달리) 대도시와 대공장에 집중된 프롤레타리아가 형성됐고, 바로 이들이 혁명의 주체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혁명에 대한 부정확한 개념

김용화는 2월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었다고도 하고 “민주주의 혁명”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첫째, 2월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었나? 부르주아 혁명이라면 무엇보다 지주제도가 폐지돼야 했다. 또, 비러시아계 민족들에게 민족자결권이 부여돼야 했다. 과연 그랬나?

한편, 2월 혁명과 동시에 노동자 소비에트들이 등장했다. 부르주아 혁명들에서 노동자 소비에트가 등장하는 역사적인 경우가 있었나?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혁명은 없었다. 2월 혁명은 10월 혁명의 서곡으로, 둘 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다. 물론 사회주의적인 혁명은 10월 혁명이었다.

둘째, 2월 혁명은 민주주의 혁명도 아니었다. 2월 혁명으로 집권한 임시정부는 사회혁명당 지도자 케렌스키가 이끌고, 소비에트를 지도하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지지해 주고 있던 좌파적 개혁주의 정부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핵심적인 개혁 과제(빵, 토지, 평화)를 전혀 수행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볼셰비키 주도로 소비에트가 일으킨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2월 혁명은 혁명의 “에피소드 국면”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이 없었고 사회주의 혁명만이 있었다. 러시아에서 혁명의 성격 전환은 벌어지지 않았다 1917년에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됐다는 김용화의 주장은 부정확한 개념일 뿐이다.

‘일국 사회주의’론

김용화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와 세계 혁명은 대립적이지 않으며, 상호 보완적이기 때문에, 한편은 다른 한편을 이바지하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의 필요는 없다”는 스탈린의 말을 근거로, 이 주장을 부정하는 트로츠키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분열시켰다고 주장한다. 김용화는 레닌이 1915년에 쓴 ‘유럽합중국 슬로건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다. 레닌이 유럽합중국 슬로건이 올바르지 않은 이유로 첫째, 그 슬로건이 사회주의와 구분이 안 되게 섞이고, 둘째,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불가능하다”(56쪽)는 오해를 낳거나 그 국가와 다른 국가들의 관계에 관한 잘못된 이해를 낳을 우려가 있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레닌이 언급한 사회주의의 “승리”는 무계급 사회주의 사회의 성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 혁명의 승리를 뜻하는 것으로,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시작할 조건이 마련됐다는 것을 뜻했다. 위의 구절 바로 뒤에서 레닌이 친절하게도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경제적·정치적 발전의 불균등성은 자본주의의 절대적 법칙이다. 그래서 여러 국가들이나 심지어 한 국가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는 가능하다. 그 국가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는 자본가들을 착취하고 자신들의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한 뒤에 세계의 나머지 지역 – 자본주의 세계 - 에 맞서서 그들의 대의로 다른 국가의 피억압 계급들을 끌어들이고 그 나라에서 자본가들에 맞선 봉기를 촉구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착취 계급과 그 국가에 맞서 무장력도 사용할 것이다.”(Lenin, On the Slogan for a United States of Europe, Sotsial-Demokrat No.44, August 23, 1915)

요컨대 “사회주의의 승리”는 (한줌밖에 안 되는)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노동자 국가가 수립되는 것을 의미했다.

문맥에서 떼어낸 구절 하나만 갖고 레닌이 ‘일국사회주의’를 옹호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통적인 스탈린주의의 상투적 수법이다. 레닌은 정치 생애 내내 자본주의는 세계적 체제이므로, 제국주의도 세계적 체제이고, 노동자 혁명도 국제적으로 확산돼 사회주의가 국제적 수준에서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물론 ‘세계적 수준’은 일차적으로 선진 자본주의 세계를 의미했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둘러싼 논쟁에서나 1918~1923년 독일 혁명에 대해 레닌이 주장한 것을 보면, 그가 일관된 국제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1924년 스탈린이 주장한 ‘일국사회주의’론은 1923년 독일 혁명의 실패와 그에 뒤이은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화에 대한 스탈린과 신흥 관료층의 수세적 대응이었다. 러시아에서 점차 득세하고 있던 당과 국가의 관료 집단은 국제 혁명이라는 위험에 도전하기보다는 보수적으로 사태의 안정화를 바랐는데, 그들의 상태와 염원을 반영한 민족주의·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바로 ‘일국사회주의’론이었다.

정작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분열시키고 제국주의의 이익에 봉사한 장본인은 바로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코민테른 의장이었던 지노비예프와 후임인 부하린을 통해 국제 혁명이 아니라 소련 국가의 생존을 우위에 두는 정책을 펼쳤다.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을 장제스에게 종속시킴으로써 1925~1927년 중국 혁명을 유산시켰고, 영·러위원회를 매개로 영국 공산당이 노동조합 좌파 관료에 의존하게 함으로써 1926년 영국 총파업을 패배하게 만들었다. ‘사회주의 소련’ 수호의 결정판은 1939년 스탈린이 히틀러와 체결한 독소불가침조약이었는데, 이로 인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사기 저하되고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관료주의 문제

김용화는 1920년대 초반 러시아공산당 내부에서 벌어진 노동조합 논쟁이 관료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의 시작이고, 이 논쟁에서 레닌이 트로츠키를 비판했다고 주장한다. 노동조합 논쟁에서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에 이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거기서 트로츠키는 노동조합을 국가에 종속시키자고 (잘못) 주장했다. 레닌은 트로츠키의 안에 반대하면서, 소비에트 기구 등에 접근하기 어려운 광범한 노동 대중의 물질적·정신적 이해관계를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7년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중에서 사형집행인 스탈린만 살아남았다

당시 상황에서 관료주의 문제는 당과 국가 기구에서 나타났다. 김용화는 소련의 관료주의가 “짜리즘의 낡은 행정공무원들”(103쪽) 때문에 벌어진 일로 묘사하고, 소련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전문가들에게 어떤 특권을 할당해야만”(105쪽) 했다고 주장한다. 그럼으로써 정작 스탈린이 지도하는 관료층의 부상이라는 핵심 문제를 슬쩍 지나쳤다.

하지만 레닌이 죽기 직전에 트로츠키와 함께 투쟁하기로 했던 관료(주의)의 우두머리가 바로 스탈린이었다.

안타깝게도 레닌은 이 투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죽었고, 트로츠키는 우물쭈물 머뭇거리고 주저하다가 기회를 놓쳤다[지금은 절판된 《레닌의 반스딸린 투쟁》(레닌 외 지음, 신평론, 1989)은 레닌의 유언장과 레닌이 죽기 직전 동지들과 나눈 서신을 담고 있는데, 주요 내용이 스탈린을 상관으로 한 관료에 맞선 투쟁이었다].

1920년대 초에 내전과 경제 붕괴, 외세 개입으로 러시아 혁명이 고립되면서 국가 관료와 당 관료의 물질적 특권과 엘리트주의, 보수성, 형식주의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가의 핵심부에 자리 잡은 관료들은 독일 혁명 패배 뒤 국제 혁명이라는 불확실하고 위험한 길과 ‘일국사회주의’(실제로는 국가자본주의로 귀결될)라는 안정적이고 편안한 길 중 후자를 선택했다. 그 뒤로 관료들은 서방 제국주의(처음에는 영·프·독, 그 뒤에는 주로 미국)와의 경쟁 속에서 소련 국가의 생존을 보장하고자 1928년에 10월 혁명의 성과를 다 분쇄하는 반혁명을 일으켰다. 그 뒤로 소련은 착취와 억압이 본질적 성격을 이루는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후퇴했으며, 국가 관료층은 집합적 자본가 구실을 하며 지배계급으로 변신했다.

김용화는 트로츠키가 소비에트에서 관료주의를 제거하는 정치 혁명을 주장했던 것은 “날조된 이미지”(111쪽)에 따른 것일 뿐이고, 1936-1938년에 벌어진 모스크바 재판과 숙청의 진정한 표적은 소비에트 기구 내부의 제5열 분자들(이른바 간첩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트로츠키가 제시한 스탈린 체제의 분석과 경제적 토대를 그대로 놔두는 정치혁명이라는 대안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부적절했던 것으로 판명났다. 그러나 그가 묘사한 소련 사회는 현실(실재)이지, “이미지,” 심지어 “날조된”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소련 사회의 정치적 상부구조뿐 아니라 경제적 토대도 허무는 사회 혁명을 대안으로 제시했었어야 했다고 본다. 그리고 모스크바 재판은 스탈린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 반대파들을 제거하는 것임을 입증한 역사적 사실들이 넘치지만 김용화는 이를 완전히 무시한다.

이행기 강령 문제

김용화는 트로츠키가 1938년에 《이행기 강령》을 저술하고 그와 그 추종자들이 같은 때 제4인터내셔널을 설립한 것을 두고 이렇게 썼다. “비혁명적인 상황에서 혁명적 요구들을 수행할 것을 선동해 오면서, 노동자 운동에서 사이비 좌익적이고, 분파주의적인 조류로서의 그 본질을 유지했다.”(119쪽)

그러나 1938년 세계 정세가 김용화의 말처럼 단순한 비혁명적 상황이었나? 이듬해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났는데? 그림의 오른편에서는 파시즘의 확장과 제국주의 전쟁의 임박 같은 “세기의 어둠”이 있었지만, 그림의 왼편에서는 1936~39년 스페인 혁명이 일어났고 1936년 프랑스에서는 인민전선 정부가 들어서고 사상 최대의 총파업과 공장 점거 투쟁이 벌어졌다. 김용화가 1938년 상황을 비혁명적 상황이라고 평면적으로 판단한 데에는 아마도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결정한 인민전선 전략에 따라 공산당의 목표가 노동자 혁명이 아니라, 파시즘에 맞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으로 설정된 것 때문으로 보인다. 인민전선 전략 때문에 각국 공산당들은 설사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이 보여도 부르주아 동맹 세력이 놀라지 않게 혁명을 단속해야 했다. 그래서 1936년 스페인에서 스탈린 지지자들은 공화정을 수호함으로써 노동자 권력의 맹아가 싹튼 상황에 이른 혁명을 억제하는 구실을 했다.

트로츠키는 혁명적 조건이 무르익었지만 제3인터내셔널이 전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또 각국 공산당들도 혁명적 지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관적 요소, 즉 혁명적 지도력을 세우기 위해 제4인터내셔널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다. 혁명가다운 일관된 노력이었다. 물론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극소수만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구성된 단체를 제4인터내셔널이라고 선언한 것은 과오였다. 하지만 그런 조직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당시로선 필요한 일이었다.

결론

김용화와 토니 클라크는 트로츠키가 농민층의 혁명적 구실을 인정했고, “러시아 혁명에 참가하여 지도적 역할을 했”고, 러시아 혁명이 ‘특수한’ 조건 때문에 트로츠키가 말한 연속혁명의 과정을 밟았다고 인정하는데, 이것은 이들의 정치적 선조인 스탈린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이다.

스탈린은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뒤이어 벌어진 내전에서 수행된 트로츠키의 공헌을 역사적 기록에서 깨끗이 지움으로써, 트로츠키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인물처럼 취급했다. 또, 스탈린은 자신이 1917년 2월혁명 직후 임시정부를 지지했던 정치적 오점을 숨기기 위해, 레닌의 4월 테제를 왜곡하고 러시아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단계적으로 전개됐다고 주장했다.

스탈린 자신의 주장과는 약간 다르긴 해도, 죽은 스탈린주의의 본질을 소생시키려고 애를 쓴다는 점에서 김용화도 스탈린주의 전통을 따른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와 달리, 레닌과 트로츠키는 둘 다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인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에 헌신한 혁명가들이었다. 1930년대 이래 스탈린주의자들이 해 온 두 혁명가를 대립시키려는 시도는 헛된 노력이었다. 반면, 1930년대 모스크바 재판과 숙청 등이 보여 줬듯이 레닌과 스탈린 사이에는 “피의 강물”이 흘렀다. 미래는 레닌의 몇몇 문구, 자구만 갖고 진실을 왜곡해 온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레닌의 정신과 실천, 전체적인 사상·이론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