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혁명가가 말한다: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비방을 반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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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사회과학연구소(이하 노사과연)는 《정세와 노동》 173호(2021년 7/8월)에 그리스 공산당 이론지 《코메프》(공산주의 평론) 2006년 제6호(11/12월)에 실린 “기회주의 운동으로서의 트로츠키주의”를 번역해 실었다. 다음은 그리스에서 그 글이 나오고 얼마 후(2007년 1월)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선임 당원이자 그리스 〈노동자 연대〉 신문 편집자인 파노스 가르가나스가 발표한 반박문이다.
[ ] 안의 내용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번역자가 덧붙인 것이다. 파노스 가르가나스가 첨가한 경우가 두 군데 있는데, 그때는 특별히 밝혔다.
그리스 공산당
어떤 점에서 이는 긍정적 변화다. 《코메프》 지면으로 주장
파파스타브루는 모든 면에서 틀렸다. 트로츠키를 뻔뻔스럽게 왜곡하고, 트로츠키의 정치적 계승자들을 비난하는 데 그칠 뿐, 오늘날의 전략 문제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수많은 기회를 그냥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이 문제를 먼저 살펴보기보다는 파파스타브루의 논지 전개에 따라 필자도 논지를 전개하겠다.
트로츠키는 1917년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러시아 혁명이 한창 휘몰아치던 때였다. 트로츠키는 자서전에서 고백하기를, 더 일찍 볼셰비키에 가입해 혁명적 당 건설에 더 많이 기여하지 못한 것이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고 했다. 물론 1917~1927년
파파스타브루는 용케도 이에 관해 일언반구조차 안 한다. 애초에 레닌이 왜 혁명의 그토록 중요한 시기에 트로츠키를 받아들였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파파스타브루에 따르면 그전까지 트로츠키의 그룹
레닌과 트로츠키의 전략적 합치는 그후 깨지지 않고 쭉 이어졌다. 파파스타브루는 이를 무시한 채 레닌을 일국사회주의 지지자로 묘사하고, 트로츠키를 추상적인 전 지구적 혁명의 지지자로 묘사해서 둘을 대립시킨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예를 들어, 파파스타브루는 유럽합중국 슬로건을 다룬 레닌의 글을 인용하는데, 그가 인용을 마친 대목에 바로 이어서 레닌은 이렇게 썼다.
경제적·정치적 불균등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 법칙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승리는 여러 또는 한 자본주의 나라에서 먼저 일어날 수도 있다.
[파파스타브루의 원래 글은 레닌을 여기까지만 인용한다. 《정세와 노동》에 실린 번역본이 근거한 영역본은 다음 내용까지 인용에 포함시켰다.] 그 나라의 승리한 노동계급은 자본가들에게서 생산수단을 몰수해 자신들의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한 뒤 나머지 세계—자본주의 세계—에 맞서 들고일어날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나라들의 피억압 계급을 자신의 대의로 끌어들이고, 그 나라들의 자본가에 맞선 항쟁을 고무하고, 필요한 경우 착취 계급들과 그들의 국가에 맞서 무력을 동원할 것이다.
위와 같이, 레닌은 당시 러시아 혁명에서 열리고 있던 전망을 간단히 요약했다. 이러한 전망을 고수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포기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트로츠키였는가, 스탈린이었는가?
이것이 두 역사적 인물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의 정치적 핵심이다. 이것은 개인 대 개인의 대결이 아니었다. 상이한 사회 세력에 근거를 둔 상이한 전략들의 충돌이었다.
트로츠키는 새로운 혁명 물결이 소련을 고립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실제로 1927년 중국 혁명과, 1936년 프랑스와 스페인 반파시즘 투쟁으로 러시아 노동계급에게 “다른 나라들의 피억압 계급을 자신의 대의로 끌어들일” 기회가 열렸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 기회를 강탈했다. 그리스 레지스탕스가 바르키자 협정
이 모든 것을 무시한 채 트로츠키의 “기계적 인식”을 문제 삼고, 스탈린을 대중의 의식 수준에 조응할 줄 아는 지도자로 묘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테다.
그러나 파파스타브루는 더 상상을 뛰어넘는 일도 해낸다. 트로츠키가 농민과 노동조합 문제에서 “행정적” 폭력을 휘둘렀다면서, 스탈린은 “과도함과 실수가 있긴 했지만 ⋯ 집단농장화를 통해 빈농의 대다수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1930년대에 농민들을 상대로 벌인 야만적인 시초 축적을 이보다 더 ‘우아한’ 말로 포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트로츠키의 계승자들을 다룬 대목은 그냥 수준 이하다.
혁명 전략의 최고봉을 자처하는 이 《코메프》 필자는 결국 오늘날의 사회주의노동자당을 다루는 대목에서 이런 방식으로 뒷담화의 늪에 빠지고 만다. 파파스타브루는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자매 단체인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시 그리스 공산당은 명백히 위기에 빠져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그러나 그리스 공산당의 위기는 단지 그리스 바깥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단지 고르바초프와 마시모 달레마
1980년대 중반경 그리스 공산당은 사회당과의 공동 강령 협약과 연립 정부를 추구하는
1980년대 중반 그리스 사회당은 자본가들의 자본 도피 위협에 굴복하며 사회주의 약속을 저버렸다. 당시 경제부 장관이었던 코스타스 시미티스가 추진한 최초의 긴축 정책은 진보적 개혁 입법을 추구하는 노선이 어떻게 정반대 결과를 낳는지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줬다. 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에서도 공산당이 참여하거나 참여하려 했었던 정부 하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제 그리스 공산당 지도부는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급격한 우경화를 택했다. 그들은 그리스 공산당이 그리스 사회당이나 신민주당의 정부 구성 여부를 좌우할 수 있는 의회 게임의 조정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 공산당 제12차 당대회가 열리고 안드룰라키스와 다마나키가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들은 새로운 “사업 수완”을 개발하는 것을 선호했고, “노동계급 너머에서 좌파의 새로운 기반”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1989~1990년 그리스 공산당이 신민주당
당연히 그리스 공산당은 그 과정에서 많은 청년 당원을 잃었다. 그리스 공산당과 결별한 청년들은 ‘신좌파경향’을 형성했다. 이처럼, 그리스 공산당이 위기에 빠진 것은 “반공주의 음모” 때문이 아니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전신인 OSE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출범시킨 후에도 우리는 이런 전략적 선택을 고수했다. 2000년에는
이 논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학생들이 9개월 사이에 세 번째나 점거 투쟁을 하는 등 새로운 급진화가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 어떤 길을 밟아 왔던 간에 모든 좌파 세력들은 운동 내에서 하는 구실과 자신이 제시할 전략적 관점으로 시험대에 서게 될 것이다. 우리들도 모두 그 시험대에 서게 될 것이며, 우리들은 여기에 응할 의무가 있다. 우리
레닌은 이렇게 썼다. “모든 노동계급 운동은 처음에 아무리 작고, 대단찮고, 그 대의가 사소한 것일지라도 필연적으로 애초의 목표를 뛰어넘고 기존 질서 전반을 거스르고 파괴하는 세력으로 발전한다. 이 계급이 자본주의 하에서 본질적으로 갖게 되는 특성 때문에 이 계급의 운동은 궁극을 향해 발전하는, 즉 착취와 억압을 자행하는 사악한 세력 일체에 맞서 최종적인 승리를 얻어 내기 위한 투쟁으로 발전하는 경향을 강하게 띤다.”
우리는 그러한 운동의 초입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품은 사상은 운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혁명적 사상은 운동의 동력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 사상을 부인하고, 더 나쁘게는 헐뜯는 것은 운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 공산당에 요구한다. 비방과 낙인찍기를 그만두고 운동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힘을 쏟아라. 운동을 전진시킬 방법에 관한 대화에 임하라. 얼마 전 교사 파업이 벌어졌을 때 그리스 공산당은 자신들이 파업 지도자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파업 집회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들은 종파적 배제가 아니라 논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우리는 모두 배우는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