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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WTO 시위는 홍콩에 무엇을 남겼나?

김용욱 기자가 반WTO 시위가 홍콩 대중의 의식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홍콩 반WTO 시위에 참가한 ‘다함께’ 회원 중 한 명이었던 강영만 동지는 12월 21일에 있었던 보통선거권 요구 시위에서 그런 영향을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홍콩 WTO 각료회담 개막식 날 한 OECD 소속 경제학자는 “홍콩은 무역과 해외 투자 개방이 얼마나 현명한 정책인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사례“라고 칭송했지만, 뜻밖에도 홍콩인들 중 다수는 그런 정책들에 반대하는 국제 시위대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여기에는 홍콩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홍콩인들이 한 경험이 깔려 있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홍콩 자본주의가 계속 자유개방 자본주의 모델을 따르지는 않았다. 특히, 1966∼67년 식민 통치와 빈곤에 맞선 까오룽반도 대소요 이후 홍콩 영국 총독부는 국가자본주의적 발전 방식을 채택했다.

이후에도 홍콩은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주거·의료·교육은 철저하게 국가 통제하에 뒀고, 동구권을 제외하면 공공주택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됐다. 홍콩은 1970∼80년대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했고, 노동자들의 실질임금도 크게 올랐다.

그러나 두 번의 변화가 홍콩 노동자들의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1990년대 초 홍콩 자본가들이 제조업 공장을 중국 본토로 옮기면서 불과 몇 년 만에 홍콩 제조업 인구가 9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급격히 줄어든 것이었다.

두 번째는 1997년 동아시아 경제 위기였다. 1998년 홍콩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그 후로 주거·의료·교육에서 사유화가 진행됐으며, 정리해고가 벌어졌다.

홍콩노총 교육선전국장인 멍시우탓은 노동자들의 의식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1997년은 분명 분수령이었다. 혁명이 일어났던 인도네시아 등에 비할 수는 없지만, 분명 홍콩 노동자들의 의식도 경제 위기에 반응해 급진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홍콩 실업률이 6퍼센트 아래로 떨어진 적은 드물다. 홍콩 신문에는 방과후 폐지를 팔아 학비를 마련하는 10대 소년 얘기 등 빈곤층에 대한 기사가 자주 등장했다.

오늘날 홍콩은 인도보다 훨씬 빈부격차가 심하며, 25만 명에 달하는 필리핀 이주노동자와 소수의 중국 이주노동자를 포함해 차별받는 다양한 노동계급이 존재하는 사회다.

이번 시위에 대한 홍콩인들의 반응은 이런 경험이 운동으로 일반화할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홍콩인들의 반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런 사회적 변화뿐 아니라 정치적 맥락도 볼 필요가 있다. 흔히 홍콩은 비정치적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몇몇 중요한 경험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1989년 천안문 항쟁이었다. 천안문 광장 진압 반대 캠페인 속에서 다수의 홍콩인들은 정치적 각성을 경험했다. 하루에 무려 1백20만 명이 모인 적도 있다.

다른 하나는 2003년 이후 시작된 민주적 권리 쟁취 운동이다. 처음에 이 운동은 중국 정부가 강요한 테러방지법(기본법 23조) 제정에 반대하는 방어 캠페인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곧 중국 정부에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적극적 운동으로 변했다. 2004년 7월에 무려 50만 명이 모였고, 2005년 12월 4일에도 25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이 운동은 아직까지 철저하게 자유주의 부르주아들(민주당)의 통제 아래 있다. 하지만 대규모 시위 참가 경험은 다른 종류의 시위대들에게도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다함께〉 기자가 만난 많은 홍콩 사람들은 “왜 한국 시위대에게 우호적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우리의 요구를 내걸고 시위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또, 소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고통과 소외에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에 대한 문제 의식을 던져주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보통 “나는 이런 문제를 고민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냥 순응해 살고 있고, 돈 버는 데만 관심이 있다” 하고 대답했다.

문제는 아주 오랫동안 그런 쟁점으로 싸운 대중 운동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었다. 따라서 체제에 문제의식을 가진 선진적인 사람들은 고립감을 느낀 채 살아 왔다.

불행히도 국제 시위대에 대한 호감에 비해 직접 시위에 참가한 홍콩인의 수는 극소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중의 호감를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직접 참가를 조직하는 데는 다소 소극적이던 홍콩민중동맹과 국제 참가단의 한계도 작용했다.

이제 공은 홍콩의 진보 세력에게 넘어 갔다. 지금까지 홍콩은 좌파의 황무지였다. 1960년대 마오주의 세력이 잠깐 성장할 수 있었지만, ‘문화혁명’의 재앙이 알려지면서 곧 지지를 잃었다. 홍콩 지배자들은 이들을 이용해 좌파가 쓸모없는 존재라는 신화를 선전해 왔다.

홍콩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시류에 거슬러’ 오랫동안 자신의 소신을 지켜 왔지만 불행히도 새로운 사람들을 조직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대중의 의식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건지도 모른다.

심지어 한 자유주의 언론인조차 “한국시위대는 홍콩인들에게 진정한 시위란 어떤 것인지,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주의를 끌 수 없는 요구를 가지고 어떻게 효과적인 행동을 조직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고 평가했다.

분명, ‘홍콩 발 혁명’을 말할 수는 없을 지라도 홍콩이 중국 투쟁을 고무하는 중요한 고리가 될 가능성은 존재한다. 역사적 선례는 존재한다. 1925년 홍콩 총파업은 1925∼27년 중국 혁명기 본토 노동자 운동을 고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