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영 기자는 미국의 개입도, 남한과의 경제 협력도 북한 인권을 개선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오로지 북한 노동자·민중의 아래로부터의 자기 행동을 통해서만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보진영 내 많은 사람들이 북한 인권 문제를 ‘뜨거운 감자’로 여긴다. 북한 인권 상황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면 마치 미국의 대북 압박 또는 한나라당의 반북 공세 편에 서는 것처럼 느껴지고, 미국의 대북 압박에 확고히 반대하려면 미국이 물고늘어지는 북한 인권 문제를 원천 부정해야 하는 듯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미국 부시 정부와 한나라당 편에 설 것이냐 북한 정권 편에 설 것이냐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양자택일 구도로는 현실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다. 왜냐면 1980년대 말 이래 미국은 인권 문제가 실제로 있는 나라들에 이를 빌미로 개입을 정당화해 왔기 때문이다. 군사 개입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상대국의 약점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이른바 ‘인도주의적 개입’이다.

1990년대 미국과 이라크의 걸프전쟁, 미국과 유고슬라비아의 코소보전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와 독재 국가의 전쟁으로 비쳐졌다. 처음에 이런 위선적 포장은 제국주의적 개입을 수월하게 만들어줬다. 한때 좌파였던 1999년 당시 독일 외무장관 요슈카 피셔(녹색당)가 “파시즘(밀로셰비치 하의 유고슬라비아)에 맞서는 전쟁”이라며 코소보전쟁을 지지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2003년, 미국이 이번에도 ‘인도주의’(그리고 세계 평화)를 앞세워 이라크에 대해 군사적 개입을 감행했을 때 1999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이 문제의 해법을 이해했다. 그것은 미국의 군사 공격에 직면한 나라가 아무리 잔혹한 독재정권 치하일지라도, 또 미국의 명분이 무엇일지라도 미국의 군사 개입에는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경제 제재가 평범한 사람들을 끔찍한 가난으로 내몰고, 군사 공격이 문자 그대로 야만을 가져온다는 것을 지난 10여 년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 개입 속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한 그 나라 민중의 노력도 여지없이 짓밟힌다. 1990년대 내내 유고슬라비아의 밀로셰비치는 미국의 군사적 압박 덕분에 오히려 자국 민중의 분노의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우리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 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 정책의 이유로 무엇을 갖다 붙이든 그들의 경제 제재와 군사적 위협을 일관되고 선명하게 반대해야 한다. 제국주의적 개입은 결코 민주주의도, 인권 신장도 가져오지 못한다.

비록 유엔 인권결의안이 군사 공격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미국의 대북 압박의 일환이다. 미국 지배자들이 걱정하는 것은 제 나라 패권이지 세계 어느 나라 민중의 인권도 아니다. 만약 미국이 북한 민중의 인권을 조금이라도 걱정했다면 북한에 식량 지원을 해달라는 세계식량기구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이 인권에 대해 위선적인 이중잣대를 들이밀고 있다는 점도 역겹다. 인종차별, 물 고문, 관타나모 수용소 등 미국의 인권 현실을 보면, “너나 잘하세요”라는 영화 대사가 절로 나온다. 또, 미국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이스라엘 같은 학살 정권과 동유럽의 독재 정권들을 수도 없이 비호하고 있다. 남한의 독재정권들도 대표적 수혜자였다.

북한의 인권 침해를 옹호하는 논리들

인권을 빌미로 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압박에 반대한다는 점을 먼저 분명히 해둔다면 북한 인권 문제 자체에 대한 진보진영 내 논의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그 논의는 필요하다.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압살하는 체제라는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고, 우리 운동 안에서 사회주의적 대안에 대한 신뢰 실추를 막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현재 진보진영은 미국의 대북 압박에는 명확히 반대하지만, 북한의 인권 문제는 은근히 덮어두거나 어떻게 다뤄야 할지 혼란을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에 ‘인권문제란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펴기도 하는데, 이것은 북한 당국의 공식 입장을 그대로 추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 납치는 반북주의자들의 날조’라고 강변해오던 북한이 어느 날 갑자기 입장을 바꾸고 일본인 납치 사실을 시인해 추종자들을 당혹하게 했던 식의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미 북한은 범민련남측본부에 “인권문제란 없다”는 글을 보내온 한편, 유엔인권이사회 심의과정에서 인권 침해를 여럿 시인했다.

예컨대 공개처형 문제가 있다. 민중운동 진영의 상당수는 ‘공개처형은 남한에서 몸값을 올려보려는 탈북자들의 거짓 진술에 의한 날조’라는 식의 얘기를 많이 한다. 그러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북한 인권에 대한 불신을 미국과 〈조선일보〉 류의 거짓말을 믿는 순진함으로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이미 북한은 2000년 3월 유엔인권이사회에 B규약 2차정기보고서를 제출한 이후 심의 과정에서 공개처형을 시인한 바 있다.

정치범의 존재 문제도 논란거리인데, 북한은 반국가사범 약 240명이 ‘형산교화소‘에 수용돼 있다고 1995년 국제앰네스티에 밝혔다.

이밖에도 국가전복음모죄와 조국반역죄 등 정치범에 대한 사형(2004년 개정 형법 59조 등), 반국가범죄에 대한 연좌제(은닉과 불신고 등 형법 70∼72조), 정치범에 대한 정상적 재판절차 거부(형사소송법 124조와 127조) 등의 존재는 형법과 형사소송법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북한 인권 문제 없다’는 노골적인 주장이 민중운동 진영의 다수 입장은 아니다. 캐물으면 대다수가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있느냐’며 이번에는 엄연히 존재하는 북한의 인권 문제를 사실상 두둔하는 여러 논리들을 개발해 제기하곤 한다.

공개처형

첫째, “국가 대 개인의 인권침해보다, 국가 대 국가의 인권침해가 훨씬 더 치명적”이라는 논리다. 물론 미국의 군사 위협이 북한 주민들의 삶을 파괴하는 데 마땅히 반대해야 한다. 하지만 이른바 ‘생명권’을 앞세워 민주주의 요구를 묵살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 없이는 제국주의에도 효과적으로 맞서 싸우기 어렵다. 제 나라 민중을 억압하는 정권은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데 민중의 힘을 동원하기(인민전쟁)를 두려워한다.

둘째, 가장 흔한 주장으로 이른바 인권의 상대주의라는 것인데, 어떤 체제든 그들만의 정의관, 인권관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자유보다 물질적 보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북한식 인권 개념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물질적 보장이라는 측면도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는 주장은 길게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의약품 부족이 무상의료를 무색케 만들고 있다는 점과 북한의 실업·불완전고용이 30 퍼센트에 이른다(세계식량계획 보고)는 얘기면 충분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시민적·정치적 권리(B규약)를 단순히 서구식 부르주아 개인주의로 취급한다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권들 같은 시민적·정치적 권리들은 노동자들의 자주적 활동을 위해 반드시 쟁취해야 할 권리들이다.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짝퉁

북한에는 바로 이런 권리들이 심각하게 억압돼 있다. 예컨대, 공화국을 반대하는 방송을 체계적으로 듣거나 유인물을 수집·보관·유포하는 것이 불법(형법 195조)이고, 시위도 원천 봉쇄돼 있다(형법 219조). 또, 오직 노동당의 지시에 의해 실시되는 결사만이 허용된다. 직업동맹을 포함한 모든 사회단체는 “조선로동당의 강령을 성실히 수행하는 외곽단체”로서만 활동할 수 있다(로동당 규약 제9장 56조).

민중운동 진영 일각에서 퍼뜨리는 황당한 오해와는 달리, 사회주의에서 시민적·정치적 자유는 이중으로 신장돼야지 억압돼선 안 된다. 사회주의가 되면 민주주의가 없어진다는 생각은 옛 소련과 동유럽 그리고 현존하는 북한 같은 스탈린주의 체제 때문에 생겨난 심각한 오해이다.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짝퉁일 뿐이다.

북한 당국은 2001년 유엔인권이사회의 심의 과정에서 자유권 제약의 이유로 “남북 분단의 특수성을 강조”한 바 있는데, 이것은 남한의 독재정권들과 보수 우익들의 논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셋째, 경제적 권리(이른바 ‘생존권’)에 배타적 강조점을 두는 주장이다. 물론 경제적 권리는 매우 중요하지만,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하다며 정치적·시민적 권리와 대립시킬 문제는 아니다. 노조결성권, 파업권 등은 먹고사는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권리들이다.

이와 관련해, 인권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생존권’이 미국의 대북 경제 제재 때문에 생겼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경제 제재는 평범한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리고 있다. 하지만 북한 경제의 위기는 북한의 지령경제적 성장 전략 자체에서 비롯한 것이다. 또, 북한의 인권 문제는 ‘생존권’이 위협받기 전부터 있었다. 일국적 산업 발전(이른바 민족경제)을 위해 국가를 동원해 노동자·민중의 욕구를 억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넷째,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함으로써 인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산업의 발전이 민주주의의 개선을 충돌 없이 수반하는 경우는 드물다. 중국이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간 지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인권과 노동자들의 처지는 개선되지 않았다. 더욱이 남한 자본이 저임금 노동을 좇아 진출한 개성공단 등지에 인권이 들어설 자리가 있을지 의문이다.

미 제국주의의 개입을 통해서도, 북한 당국의 위로부터 개혁·개방을 통해서도 북한 인권 개선과 민주주의 확장은 가능하지 않다. 남한의 노동자·민중이 그랬듯이, 북한 노동자·민중의 아래로부터의 자기 행동을 통해서만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다.

남한 민중운동 진영에 제기되는 중요한 정치적 선택은 북한 노동계급의 자기 행동을 기대하고 고무할 것이냐, 아니면 그런 행동이 서구식 부르주아 개인주의라는 의심스런 사상에 기초했다며 반대하고 나설 것이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