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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과 기후 위기로 강화되는 식량 보호주의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세계 곡물 가격이 급등하는 가운데, 농산물 수출을 금지하는 국가가 늘면서 식량 보호주의가 강화되고 있다.

5월 14일 인도 정부가 밀 수출을 즉각 금지한다고 발표하자 세계 밀 시장은 다시 요동쳤다.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밀 가격이 오르자, 인도는 올해 밀 생산 예상량 1억 1000만 톤 중 1000만 톤 이상(2021년 780만 톤)을 수출할 계획이었다. 지난 4월 한 달간 인도의 밀 수출량은 140만 톤에 이를 정도로 급증했었다.

그러나 최근 인도에서 폭염이 발생해 올해 밀 수확량이 10퍼센트에서 많게는 50퍼센트까지 줄어들 것으로 전망되자 인도 정부는 급작스레 밀 수출을 중단했다. 지난달 인도의 식량 물가가 8.3퍼센트나 오르면서 대중의 불만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량 수출 제한은 연쇄적으로 다른 국가들로 확산되는 추세다. 러시아·우크라이나의 밀 수출이 중단되자 이집트, 카자흐스탄, 세르비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 35개국이 식량 수출을 통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제국주의 전쟁만이 식량 보호주의를 자극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도의 폭염이 밀 생산에 타격을 주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세계적인 기후 위기는 식량 공급의 불안정성을 높이고 있었다.

유럽연합(EU)의 최대 밀 수출국인 프랑스는 올해 가뭄 위험 때문에 밀 생산과 수출이 감소할 수 있다고 한다. 프랑스의 올해 밀 생산량이 예년보다 30~50퍼센트가량 감소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러시아에 이어 세계 2위의 밀 수출국인 미국도 수년간 지속된 극심한 가뭄으로 밀 생산이 타격을 받고 있다.

이윤이 남지 않아 호주에서 버려진 아보카도들 식량 위기로 수억 명이 기아 위험에 처해 있지만, 막대한 식량이 버려지고 있다 ⓒ출처 Jan De Lai(페이스북)

이윤을 위한 생산

그러나 올해 전 세계 밀 생산량이 급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호주의 밀 생산 증가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미국 농무부는 올해 전 세계 밀 생산이 7억 7483만 톤으로, 지난해보다 100만 톤가량만 줄어들 것으로 예측했다. 세계 밀 재고도 2억 6700만 톤가량 있어서 세계 밀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다른 식량도 여전히 충분히 생산되고 있다. 미국 농무부는 올해 세계 곡물 생산량이 27억 6500만 톤을 기록해 지난해보다 조금 감소하지만, 세계 곡물 재고량은 여전히 7억 8000만 톤을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그런데도 식량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것은 이윤을 위해 운영되는 식량 생산 체제 때문이다.

거대 식품기업들은 가격이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식품을 비축하려고 하고, 그것으로 충분한 돈을 벌어들이지 못하면 갖다 버리는 세상이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등에 따르면 매년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식량 40억 톤 중 3분의 1이 버려지고 있다. 이 중 상당량이 ‘가격 방어’를 위해 버려진다.

여기에 금융 투기까지 가세해 식량 가격을 더욱 널뛰게 만든다. 그럴수록 수억 명의 생존이 위협받는데도 말이다. 세계은행은 올해 밀 가격이 40퍼센트 이상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식량 가격이 치솟으면서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치솟는 생계비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가장 가난한 나라에 사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재앙을 겪고 있다.

WFP의 조사를 보면, 현재 ‘식량 불안정’ 상태에 처한 인구도 2억 7600만 명으로 2019년의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식량 불안정은 건강을 유지할 만큼의 식량을 구매·섭취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유엔은 또한 43개국 4900만 명이 기아 상태 직전에 몰려 있다고 밝혔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산 밀 의존도가 높은 중동과 아프리카의 피해가 클 것이다.

이처럼 이윤을 위한 식량 생산 체제는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하다. 여기에 더해 기후 위기와 제국주의 간 전쟁은 식량 생산과 공급을 교란하며 식량 가격을 끌어올리고 있다. 각국 지배자들은 대중의 불만을 무마하고 자국 기업을 지원하려고 식량 통제를 강화하고 있지만, 이는 온갖 혼란과 낭비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식량이 안정적으로 공급되게 하려면, 시장 경쟁에 기초한 체제가 아닌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안정적인 식품 공급에 돈 쓰기 아까워하는 한국 정부

한국도 최근의 식량 위기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은 쌀을 제외한 주요 곡물 자급률이 매우 낮아 세계 곡물 시장 변동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특히 밀, 콩, 옥수수 같은 주요 곡물을 전적으로 국제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밀 자급률은 0.5퍼센트, 콩 6.6퍼센트, 옥수수 0.7퍼센트에 불과하다. 곡물 자급률은 2000년 30.9퍼센트에서 2020년 20.2퍼센트로 20년간 10퍼센트포인트 넘게 하락했다.

그간 한국 정부는 계속해서 곡물 자급률 인상을 목표로 제시해 왔으나, 늘 말뿐이었다. 대규모 투자로 식량 생산과 공급을 안정화하는 것보다 수입에 의존하는 것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후 위기, 제국주의 간 경쟁 강화와 이에 따른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으로 안정적인 식품 공급과 식품 가격 안정을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국제적인 식품 시장의 변동에 내맡긴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식량 가격 폭등과 식량 공급 위기를 피할 도리가 없다.

막대한 예산을 군비 경쟁에 쏟을 게 아니라, 충분한 보조금을 지급해 밀·옥수수·콩 등 주요 곡물 가격을 안정화시켜야 한다. 필요하다면 국내 곡물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정부가 직접 투자와 고용을 늘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