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석 달이 됐다. 그 사이에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과 나토가 우크라이나를 전장으로 삼아 러시아를 상대로 벌이는 제국주의적 대리전이라는 점이 좀 더 분명해졌다.

또한 강대국 지배자들이 부와 영토를 재분할해 자신들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관심이 있을 뿐,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 고된 나날을 보내는 평범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삶과 안녕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도 드러났다.

그러나 전쟁의 성격과 본질이 좀 더 분명해지고 있다 해서 그에 비례해 즉각 반제국주의적 반전 정서와 행동이 크게 늘어난 것은 아니다.

가령 영국의 여론 조사 기관 유고브가 영국과 16개의 유럽연합 회원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여론 조사를 했다(2022년 5월 5일). “우크라이나 전쟁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고, 응답자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세 가지였다. 1) 나토가 전적으로 또는 러시아보다 책임이 더 크다, 2) 러시아가 전적으로 또는 나토보다 책임이 더 크다, 3) 둘 다 똑같다.

불가리아와 그리스를 뺀 나머지 조사 대상국들에서 러시아가 전적으로 또는 나토보다 책임이 더 크다는 답변이 우세했다. 둘 다 똑같다는 답변은 소수였다.

한국에서 비슷한 여론 조사를 실시해도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을 듯하다. 게다가 8000킬로미터나 되는 지리적 거리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그저 먼 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로만 느끼는 듯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맞서 반전 운동을 건설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위대한 대중 운동도 언제나 소수에서 시작됐음을 알아야 한다.

반전 운동의 초석을 놓다 5월 21일 ‘러시아군 철군, 나토 확전 반대, 한국 정부 개입 반대’를 요구하는 국제공동행동 참가자들 ⓒ이미진

예컨대, 제1차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독일 노동자들의 혁명으로 마침내 종식됐다. 그러나 독일의 반전 운동은 극소수에서 시작했다.

1915년 독일 베를린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이 발의하고 조직한 두 번의 반전 시위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100여 명이 참가했고 두 번째는 1000여 명이 참가했다. 독일이 참전국이었는데도 그랬다.

국수주의적 광풍이 전쟁 초기 독일에 크게 일었기 때문에, 반전 운동 건설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배자들의 선전 기구의 영향을 받아 대다수 노동자들은 전쟁을 지지했다.

특히, 오랫동안 노동계급의 정당 구실을 해 온 사민당이 전쟁을 지지한 것이 이런 상황이 비교적 지속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돼 대중의 불만이 증대하면서 1916년에는 불법 집회였는데도 1만여 명이 참가했다. “전쟁을 반대하라! 정부를 타도하라!”고 연설하다 구속된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재판받던 날에는 군수 공장 노동자 5만 5000명이 파업했다!

1918년 10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자 정부는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석방했다. 마침내 11월 9일 카이저(황제)가 혁명으로 물러나면서 제1차세계대전은 사실상 끝났다.

이런 역사적 경험이 오늘날 우리에게 장밋빛 미래를 자동으로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일의 경험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혁명가들이 고립무원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 기층에서 끈기 있게 반제국주의적 선전과 선동을 했다는 점이다.

5월 21일 서울에서 이삼백 명이 ‘러시아군 철군, 나토 확전 반대, 한국 정부 개입 반대’를 외치며 행진했다. 작은 규모였지만, 미래를 위한 씨앗을 뿌린 행동이었다. 씨도 뿌리지 않고 수확을 기대하는 사람은 평생 수확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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