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철·홍덕표 농민이 사망한 농민대회, 부산 아펙 반대 시위, 마침내 홍콩 반WTO 시위에 이르기까지 매스컴은 시위대 일부의 물리적 항의만을 보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왜 사람들이 항의에 나섰는지 또는 그들의 요구들은 무엇인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살을 에는 듯이 추운 날 또는 멀리 해외까지 원정 가서 함성을 지르며 절규했던 염원은 깡그리 무시됐다.

단지 전경·의경의 안전과 그 부모들의 안타까움만 보도됐다. 물론, 그 다수가 노동계급과 피억압 사회집단의 성원인 전경·의경의 안전과 그 부모들의 안타까움을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비폭력적 언행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려 하고, 시위와 파업을 탄압하기 위해 야만적인 경찰 폭력을 고무하고, 첨단무기 구매를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쓰고, 이윤을 위해 하루에도 8명씩 산업재해로 노동자들을 죽이는 자들이 사소한 폭력을 비난하는 것은 정말로 메스껍다.

한편, 낭만주의적 좌파는 진정한 대중 동원과 효과적인 요구사항 표현에는 무관심한 채 비효과적인 소수 실력행사나 개별 폭력을 찬양하곤 한다.

이러한 급진주의는 억압적 체제에 대한 건강한 반발이자 전투성과 투쟁정신의 발로이긴 하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 효과적일수록 대중의 요구와 염원은 그들의 행동에 가려진다는 모순이 있다.

비폭력은 마르크스주의도 공유하는 이상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 권력과, 강제력에 의한 자본주의 전복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주장해 왔다. 그들은 국제 노동계급이 자신을 억압하는 지배계급들에 맞서 혁명과 내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이 없는 사회라는 점 또한 분명히 해왔다.

개량주의자들은 이 때문에 그들을 이상주의자, ‘공상가’, ‘몽상가’ 따위로 여긴다. 사회와 개인들 사이의, 그리고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는 데 더는 폭력이 영구적으로 필요하지 않게 되도록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하는 염원은 이처럼 개량주의자들의 비웃음을 사 왔다.

비폭력적 사회라는 비전을 수용하는 데서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비폭력 평화주의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는 폭력의 근원을 밝혀냈는 데 반해 비폭력 평화주의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마르크스주의는 폭력의 근원을 공격한다. 단지 인간의 사상과 감정으로부터 폭력을 근절하려 한 것이 아니라 사회 생활의 물질적 토대로부터 폭력을 근절하고자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폭력이 사회의 계급 적대에서 자양분을 얻고 있음을 강조해 왔다.

자비, 이웃 사랑, 비폭력, 평화 등을 설교해 온 도덕가들은 폭력을 조금치도 감소시키지 못했다. 그 이유는 결코 폭력의 뿌리를 파헤치지 않았고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급 사회가 존속함으로써, 그리고 비폭력 평화주의 설교가 단지 폭력의 표면만을 공격함으로써 비폭력 평화주의는 쓸모 없을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주의도 비폭력과 평화를 꿈꿔 왔다. 이 점이 의심스럽다면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한 번 읽어 보라. 또한, 1917년 페트로그라드의 10월 봉기는 당시 러시아 주재 서방측 대사들의 적대적인 증언에 따르더라도 희생자는 모두 합쳐 열 명밖에 안 되었다.

이 봉기를 지도한 레닌과 트로츠키(당시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는 불필요한 인명살상이 없도록 최대한 주의하라고 적위대원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정부청사 공격에 앞서 트로츠키는 수도방위사령부 사병들에게 선동 연설을 먼저 한다.

러시아 혁명은 총이 아니라 말로, 주장과 설득으로 승리했던 것이다. 말은 매우 과격했고 격렬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 폭력에 ― 더구나 거의 1천 만의 인명을 앗아가고 있던 제1차세계대전에 ― 맞선 감정의 ‘폭력’, 언어의 ‘폭력’이었을 뿐이다. 1천만 명 대 열 명 ― 실로 새 발의 피였다.

휴머니즘은 마르크스주의와 러시아 혁명의 본질적인 요소였다. 소위 ‘폭력 혁명’은 비폭력 사회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 수단이었다. 반대편에서 피억압자들을 향해 비폭력을 설교했던 케렌스키 임시정부는 전선에서 전투를 거부하는 병사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마르크스주의의 변질과 폭력

혁명 후 러시아에는 내전이 도래했다. 폭력 사용이 증대했다. 하지만 이 때조차도 볼셰비키는 폭력보다 주장·설득에 의존하려 애썼다. 트로츠키가 이끄는 적군은 훨씬 우세한 화력을 가진 영국·프랑스·미국 등 14개 외국 군대와 이들의 지원을 받는 백군에 맞서 병사들의 의식에 호소했다. 트로츠키의 선동 연설을 들은 오데사 주둔 프랑스 해군 병사들은 볼셰비키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했다. 폭력을 예방한 비폭력의 승리였다.

서구, 특히 독일 혁명의 패배(1923년 10월)로 러시아 혁명이 고립되자 러시아인들은 주장·설득과 폭력 사이에서 점점 균형을 잃어갔다. 스탈린주의 관료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로부터 휴머니즘적·해방적 요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국가(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 국가)는 점점 제 구실을 못하고 ‘시들어’ 마침내 없어지게 된다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점진적 국가소멸론을 스탈린이 배격하고 혁명 후 국가는 오히려 강화된다는 이론으로 대체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스탈린주의는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적 비폭력이 집약돼 있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점진적 국가소멸론을 억압해야 했다. 이제 마르크스나 레닌 또는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언어로 폭력 남용이 정당화됐다.

마르크스주의는 다수 노동계급이 소수 지배계급을 억압하는 것이 혁명이기 때문에 폭력 사용이 최소한에 그칠 것이고 매우 제한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서방 열강과 자본 축적 경쟁에 돌입한 스탈린주의는 국내 노동자·농민의 피와 땀을 쥐어짜고, 외국 공산당들을 이를 방어하는 소련 국경 수비대로 만들기 위해 비폭력적 사회에 대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을 폐기해 버렸다.

그래서 오늘날 스탈린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북한에서 자행되는 온갖 끔찍한 국가 폭력(예컨대 사소한 범죄자들에 대한 가혹한 형벌과 심지어 사형, 동성애자 박해, 민주적 권리 억압 등)을 역시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불가피하게 폭력을 사용해야만 하는 경우에 그것이 필요악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 때 강조는 ‘필요’와 ‘악’ 모두에 놓인다. 혁명에 폭력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요성’을 미덕으로 격상시켜서는 안 된다.

게다가 혁명가들이 폭력 활동에 나섬으로써 혁명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계급투쟁이 비등하고 계급 적대가 더할 나위 없이 첨예해져 결국 고비점을 넘을 때 비로소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때 노동계급이 필요한 폭력 사용을 주저한다면 지배계급은 비할 데 없이 야만적이고 끔찍한 폭력을 피억압 계급들에게 대거, 주저없이 사용할 것이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우리는 결정적일 때 노동자 대중에게 폭력 사용을 호소할 태세가 돼 있어야 한다. 그것을 미덕으로 격상시키지 않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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