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6월 30일 노동자연대TV 온라인 토론회 “미국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 ― 낙태권을 어떻게 방어해야 할까?”의 발제 내용을 평어체로 바꾼 것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50년간 유지돼 온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했다. 역사적 후퇴이고 수많은 여성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끔찍한 결정이다.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은 낙태권을 헌법상 권리로 인정했다. 그 뒤 미국에서는 임신 24주 이내의 낙태가 허용돼 왔다. 그러나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에 따라 이제 미국은 각 주가 낙태를 규제할 권한을 갖게 됐다.

미국의 50개 주 중 최소 26곳에서 낙태권이 박탈될 것이다. 낙태에 반대하는 공화당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한 주가 26곳이다. 이미 22개 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 자동으로 낙태를 금지할 수 있는 법을 통과시켜 놓았다.

오하이오와 아칸소 주 등에서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6월 24일부터 낙태 클리닉이 문을 닫았다. 아이다호, 노스다코타, 텍사스 주는 대법원 판결 30일 뒤부터 거의 모든 낙태를 불법화한다고 밝혔다.

낙태 금지는 수많은 여성의 생명과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위협한다. 지난해 미국의 한 연구는 낙태가 금지되면 임신 관련 사망이 21퍼센트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미국의 모성 사망률은 이미 부국들 가운데 가장 높다.

대법원 결정으로 노동계급 여성, 특히 가난한 흑인이나 히스패닉 여성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낙태를 허용하는 다른 주로 이동하는 데 드는 많은 비용과 시간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가령 텍사스주는 남한 면적의 7배나 된다. 직장에 휴가를 내고 낙태 시술을 받는 것도 힘들다.

사실 미국인의 다수(10명 중 6~7명)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것에 반대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대법관 9명 중 6명이 보수 성향 판사인데, 모두 공화당 대통령들이 지명했다. 대법원 구성에서 보수파가 압도 우위가 된 것은 트럼프 정부 들어서다. 트럼프는 대선 때 기독교 우파의 지원을 받으려고 대법원 낙태권 판례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당선 뒤 보수 성향 판사 3명을 대법관으로 지명했다. 미국 대법관은 종신직이다.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는 미국 우파의 오랜 염원이었다. 우파의 낙태권 공격은 1960~1970년대 급진적 대중운동이 남긴 성과를 없애려는 반격의 일환이었다.

1970년대 이전에는 낙태 반대가 공화당 의제는 아니었다. 1970년대 이전에는 많은 공화당원들이 낙태 합법화를 지지했다. 1972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이 가톨릭 신자와 남부의 민주당 표를 가져오려고 처음으로 낙태 반대 입장을 취했다.

공화당은 1980년 대선부터 기독교 우파와 동맹을 맺었다. 기독교 우파는 레이건을 지지하며 막대한 선거 자금과 투표 기반을 제공했고, 아버지 부시 집권기(1989~1993)와 아들 부시 집권기(2001~2009)에 그들을 지지하며 세력을 엄청나게 확대했다.

트럼프가 후보였던 2016년 대선 당시 공화당은 미국 전역에서 다양한 기독교 우파 조직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는데, 이 조직들의 회원 수가 수백만 명에 달했다.

미국에서 우파는 낙태 문제를 자기 세력을 결집하고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며 평범한 사람들의 지지를 모으는 데 이용해 왔다. 우파 정치인들의 낙태권 제한이 꼭 종교적 신념에 따른 결과인 것은 아니다.

보수 우파는 전통적 가족 가치를 강조하며 가족 내 여성의 열등한 지위를 옹호한다. 낙태권 공격은 보수적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데서 중요하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통제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은 여성이 가정에서 양육과 돌봄을 묵묵히 수행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보수적 가족 이데올로기는 권력자들이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통제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우파는 낙태권 말고도 트랜스젠더 권리, 인종 차별 같은 문제를 똑같은 목적으로, 즉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자신들의 의제로 노동계급 사람들의 지지를 모으는 데 이용해 왔다.

마침내 우파는 수십 년간 계속된 신자유주의 공격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차오른 상황을 이용해 1960~70년대 급진 운동이 남긴 성과를 쓸어버리는 숙원을 성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표를 던지는 게 해결책일까?

미국 대통령 바이든은 대법원 결정을 비판하며 낙태권 보장 방안을 마련할 테니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투표해 달라고 말한다. 상원에서 법을 통과시킬 수 있는 충분한 의석을 확보하면 낙태권을 보장하는 연방법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투표하는 것으로는 낙태권을 방어할 수 없다. 사실 지난 수십 년간 우파의 낙태권 공격이 점차 성공을 거두게 된 것에 민주당의 무기력과 기회주의가 큰 몫을 했다.

낙태권을 보장하는 연방법 제정 약속은 이번에 처음 나온 얘기가 아니다. 이미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시절에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선 뒤 민주당은 입법을 추진하지 않았다. 클린턴과 오바마 정부 모두 초기에는 민주당이 의회 다수를 차지했는데도 말이다.

오마바는 개혁 염원에 힘입어 당선했지만 기대를 저버렸고, 부유한 특권층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책을 실시해 대중의 삶을 악화시켰다. 이에 따른 환멸 때문에 트럼프가 당선됐다.

민주당은 공화당 의원들이 주 의회에서 낙태 금지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막는 데도 무기력했다. 남부에서는 민주당 의원과 주지사가 공화당이 발의한 낙태 금지법에 찬성하기도 했다. 2019년 켄터키 주 민주당 의원 존 심스는 낙태를 사실상 전면 금지하는 ‘심장박동법’에 찬성표를 던졌다. 2019년 루이지애나 주에서도 비슷한 법안이 주의회를 통과했는데, 민주당 주지사 존 벨 에드워즈가 이 법안을 승인했다.

민주당은 우파의 낙태권 공격에 제대로 맞서지 않았고, 끊임없이 절충안을 찾으려 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 4년 뒤 통과된 ‘하이드 수정안’에 대한 태도가 대표적 사례이다. 1976년 공화당 의원 발의로 국회 통과된 ‘하이드 수정안’은 낙태 시술 대부분에 연방정부 기금 사용을 금지한 안으로, 노동계급 여성과 청소년들에게 큰 타격을 줬다. 그러나 민주당은 연방의회 다수를 차지했을 때도 ‘하이드 수정안’을 계속 승인했다.

바이든도 ‘하이드 수정안’을 확고히 지지했다. 그러다 2020년 대선 때 입장을 번복해 ‘당선되면 하이드 수정안을 폐기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를 지키지 않았다. 그는 취임 후 낙태의 ‘낙’ 자도 꺼내지 않다가 최근에서야 선거를 의식해 낙태권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지금도 대중행동을 고무하기보다 민주당에 투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 낙태권 운동의 전략 돌아보기

우파의 공격에 맞서 낙태권을 방어하고 확대하려면 민주당에 의존하지 말고 노동계급의 여성과 남성이 참가하는 대중투쟁을 벌여야 한다.

1973년 낙태 합법화를 이룬 것도 대중투쟁을 통해서였지 사회 엘리트들의 선물이 아니었다. 1969년~1973년에 미국 전역에서 낙태 합법화를 요구하는 집회가 수백 개 열렸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여성의 권리를 위한 광범한 대중투쟁의 산물이었다.

50년을 후퇴시킨 미국 대법원의 판결에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 직후부터 미국 전역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대법원 판결문 초안이 유출된 5월에도 100만 명 규모의 전국적 시위가 있었다.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는 데 성공한 우파는 공화당이 우세한 주에서 낙태를 금지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미국 전역에서 낙태를 금지하는 입법도 추진하려 한다. 또 연방대법원 보수 성향 판사들은 더 광범한 공격도 예고하고 있다. 클래런스 토마스는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폐기하며 피임, 동성애,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판례도 재고돼야 한다고 밝혔다.

낙태권을 방어하고 극렬한 우파의 공세를 저지하려면 운동이 더 강력해져야 한다. 이를 위해 그간 미국 낙태권 운동의 약점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우파들은 낙태 반대 운동을 극렬하게 조직해 왔다. 이에 비해, 미국 주류 낙태권 운동은 민주당 정치인들에 의존하면서 운동을 온건하고 수세적으로 벌였다. 가족계획연맹, 전국낙태권행동동맹, 전미여성기구 등 대규모 재생산권* 단체들은 전통적으로 민주당과 긴밀하게 연관을 맺어 왔다.

물론 미국 여성운동은 우파의 낙태권 공격에 맞서 대규모 집회를 열기도 했다. 트럼프 정부하에서는 거대한 여성 투쟁이 분출했다. 트럼프 취임 직후 약 500만 명이 참가한 ‘여성 행진’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주류 페미니스트들은 대중행동을 강화하는 데 힘쓰기보다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당선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런 전략이 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1990년대 경험이 잘 보여 준다. 당시 힐러리 클린턴은 낙태권 지지자들이 낙태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빌 클린턴과 함께 낙태가 “안전하고 합법적이고 드물게”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주류 페미니스트 단체들은 이런 타협적 입장을 비판하지 않고 자신들의 메시지로 수용했다. 운동을 온건화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다.

주류 여성운동 단체들은 민주당 정부하에서 여러 배신을 겪었지만 계속 막대한 정치자금을 대며 민주당을 지지했다. 그러는 동안 여성이 낙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미국 전역에서 계속 축소돼 왔다.

낙태권 운동이 강력해지려면 민주당에 의존하지 않고 대중운동 건설을 중심에 놓는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한국 우파와 낙태권 운동 상황

미국 대법원의 낙태권 폐기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우파를 고무하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 낙태 반대 단체들은 국민의힘 의원들과 함께 낙태를 대부분 금지하는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각각 임신 6주, 임신 10주 이내에만 낙태를 허용하고 이를 어길 경우 처벌하는 법안을 발의해 놓고, 최근 국회 토론회를 열었다. 향후 2년간 전국 단위 선거가 없기 때문에 국민의힘은 그 기간에 낙태 관련 법안을 처리하려 들 수 있다.

민주당이 국회 다수당이니 우파를 견제할 수 있다고 기대해선 안 된다. 지난 3년 동안 민주당은 낙태권을 보장하는 법을 제정하라는 요구를 무시했다. 국회 다수당인데도 낙태권 입법을 하지 않은 것이다. 또 문재인 정부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인 2020년에 낙태죄를 유지하며 낙태를 제한하는 법 개정안을 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에 반발이 일자 선거를 의식해 법안 처리를 중단했을 뿐이다.

3년 전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은 여성운동의 성과였다. 그러나 그 뒤 개선된 게 별로 없다. 낙태죄는 효력 정지됐지만, 여전히 병원비가 비싸 가난한 여성들의 고통이 크고 낙태에 대한 낙인도 여전하다. 낙태권 운동이 대중운동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주류 정치인들은 여성들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압력을 크게 받지 않았다.

기성 여성운동 바깥에서 새롭게 급진화한 청년 페미니스트들이 벌였던 낙태권 운동은 한때 활력을 보여 줬지만, 전략과 정치적 전망의 부재로 안타깝게도 헌법 불합치 판결이 나자마자 중단됐다.

엔지오가 주도하는 여성운동은 민주당에 의존해 입법 중심으로 활동하며 운동을 협소하고 온건하게 펼쳤다. 여성단체연합은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며 비판을 꺼리는 일이 많았다. 민주노총, 정의당, 진보당은 대중 동원 능력이 있음에도 몇몇 간부가 기자회견에 참가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수준에 그쳤다. 자기 조합원이나 당원을 동원해 운동을 확대하려 하지 않았다.

낙태권 문제에서 실질적 진전을 이루려면, 민주당에 의존하지 않고 기층에서 대중운동을 건설하는 전략을 택해야 한다. 대중운동을 건설하려면 낙태권이 노동계급의 문제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부유한 여성들은 낙태권이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아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낙태권이 일정하게 보장된 나라들을 보면, 모두 노동계급의 여성과 남성이 참가하는 대중운동을 통해 성과를 거뒀다. 물론 미국의 사례에서 보듯, 자본주의에서는 투쟁을 통해 얻은 성과도 공격받고 빼앗길 수 있다. 무자비한 우파에 대중운동으로 반격해야 성과를 보존할 수 있다.

미국에서 광범한 대중운동이 발전해 빼앗긴 권리를 되찾고 나아가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이 성장하기를 바란다. 한국에 사는 우리도 우파의 낙태 반대 공격에 맞서 기층에서 낙태권 운동의 초석을 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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