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9월 1일 같은 제목으로 진행된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문을 조금 손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언론을 통해 세계 각지에서 국경을 넘는 이주민이나 난민 행렬 광경을 봤을 것이다. 유엔난민기구는 지난해 말까지 전쟁과 국가 탄압 등을 피해 난민이 된 사람이 8900만 명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이 숫자는 1억 명에 달하게 되었다. 10년 전의 2배가 넘는 수치다.

커져가는 난민, 이주민의 고통

이렇게 난민이 늘어나는데, 선진국들은 국경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는 지중해와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향하다 목숨을 잃거나 실종된 이주민이 지난해에만 3000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국경 단속 강화가 낳은 비극이다.

지난 6월에는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외곽에 주차된 트레일러 컨테이너 안에서 53명이 고온의 열기에 질식해 사망한 채 발견되기도 했다. 이들은 그저 더 나은 삶을 위해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국경을 넘으려던 이주민들이었다.

이런 일은 한국과는 관계 없다고 생각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꼭 그렇지는 않다. 이제 한국에도 적잖은 난민이 들어오고 있고, 전체 이주민은 미등록 이주민을 포함하면 올해 7월 기준 208만 명이나 된다. 입국 금지, 억류, 단속, 구금, 추방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고, 정부는 이민 통제 정책을 정비하려 하고 있다.

난민은 더 이상 한국에 낯선 존재가 아니다

앙골라 난민 루렌도 가족의 사례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2018년 12월 인천공항에 도착한 이 가족은 입국을 거부당해 무려 288일 동안 인천공항에 억류돼 있었다.

최근에는 이집트인 난민 수십 명이 난민 즉각 인정을 요구하며 두 달 가까이 법무부 앞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 투쟁은 한국 정부가 난민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등 한국의 난민 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냈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수단으로 사막과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한국에 왔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한국에서 온갖 차별과 고통을 겪고 있다. 난민 심사 과정은 수년을 질질 끌고, 제대로 된 의료, 교육, 일자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정부가 난민 신청자의 가족 결합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가족과 수년째 생이별 중인 경우도 많다.

정부는 이주민에게 입국과 한국 체류를 허용하는 대가로 기본권을 빼앗기도 한다.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고용허가제가 그런 사례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 차별, 폭언, 폭행, 성추행을 당해도 이주노동자들은 고용주의 허락 없이는 사업장을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차라리 미등록 이주민이 되기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상시적으로 단속 위험에 놓이고, 단속에 붙잡히기라도 하면 감옥보다 못한 외국인보호소에 갇혀 있다 추방된다.

결혼을 통해 한국에 온 이주 여성들은 한국인 배우자와 혼인 관계를 유지하거나 한국 국적의 자녀를 양육하지 않을 시 체류 연장이 매우 어렵다. 사실상 이혼의 자유가 제약되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종속되고, 가정 폭력에 취약해지기도 한다.

난민과 이주민 통제를 정당화하는 거짓말

정부와 보수 언론은 이주민·난민에 대한 출입국 통제와 권리 제약을 정당화하는 온갖 거짓말을 퍼트린다.

가령 국경을 철저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난민이 대거 몰려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공포를 부추긴다. 그러나 사실 가장 많은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나라는 터키, 우간다, 파키스탄 등 내전이나 전쟁으로 난민이 발생한 나라의 인접국들이다. 선진국을 찾는 난민은 소수에 불과하다. 한국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또, “가짜 난민”이라는 비난도 많이 있다. 국제법이나 한국 난민법에서 규정한 난민 인정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한국에서 돈을 벌려고 허위로 난민 신청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과 내전, 빈곤과 기후 위기 등 정치적·경제적·환경적 위험을 피해 이주를 선택한 난민들을 ‘경제 난민’, ‘정치 난민’으로 칼 같이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 고향에서 먹고살 수 없게 됐다면, 그들은 정치 난민인가, 경제 난민인가? 원치 않지만 고향을 등져야 하는 이유에는 자본주의가 낳은 다양한 위기가 중첩돼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를 가려내야 한다며 난민 심사를 까다롭게 하고 난민을 배척하는 데 “가짜 난민” 논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주민이나 난민이 잠재적 범죄자라는 주장도 흔하다. 이는 완전한 거짓말이다. 공식 통계로도 외국인의 범죄율은 내국인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주민과 난민은 마치 나라의 한정된 재원을 갉아먹는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윤석열은 대선 기간에 “국민이 잘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외국인 건강보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주장했다. 한국 대선에서 주류 정치인이 인종차별을 이용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주민을 향한 윤석열의 거짓 비난

그러나 이 또한 완전 거짓이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외국인의 건강보험 재정 수지는 무려 1조 4095억 원 흑자다. 외국인은 낸 만큼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외국인 건강보험 지역가입자는 보험료 산정 방식이 불리해 실제 소득 수준에 비해 내국인보다 보험료를 더 많이 낼 가능성도 높다.

이주민이 내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주장도 거짓이다. 이주민 증가와 내국인 실업률 사이의 상관관계는 없다. 일자리 감소는 이주민 증가 때문이 아니라 대개 경기 변동, 즉 경제 상황 악화를 반영한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직후, 한국의 이주민 수는 거의 변동이 없었지만 실업률과 실업자 수는 큰 폭으로 증가했다. 거꾸로 2010년대 내내 이주민 수가 꾸준히 증가했지만 실업률은 큰 변동이 없었다.

일자리 감소의 원인은 경제 상황 악화

일자리를 공격하고 임금과 복지를 깎는 것은 이주민들이 아니라 바로 정부와 사장들이다. 윤석열 정부가 얼마 전 발표한 내년도 예산안도 복지 지출의 자연 증가분을 고려하면 사실상 복지 삭감안이다.

그런데도 마치 이주민이 내국인의 임금과 복지를 빼앗는 것처럼 거짓말한다. 이것은 생활 수준 악화에 대한 분노를 정부와 사장들이 아니라 이주민에게 돌리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국경, 국가, 민족주의

그렇다면 국경과 국경 통제는 언제, 왜 생겼을까? 여기에 답하려면 국경을 기준으로 나뉜 국민(또는 민족) 국가,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민족주의를 살펴봐야 한다.

흔히 국경은 마치 언제나 존재해 온,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세계가 민족국가로 나뉘게 된 것은 수십만 년 되는 인류 역사에서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동아프리카를 기원으로 하는 인류는 탄생 이래로 끊임없이 세계 곳곳으로 이주했다. 당시에는 당연히 국가도, 국경도, 국경 통제도 없었다.

근대 이전에는 일정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같은 운명을 공유한다는 관념(민족주의)이 매우 낯선 것이었다. 사람을 국적으로 구분하고 국경으로 나누는 국민 국가는 자본주의가 발흥하면서 생긴 것이다.

시장이 작동하려면 일정한 지역에서 일정한 관습과 법률, 언어 등이 통용돼야 했고 국가가 그것을 보장해 줘야 했다. 국경을 어떻게 경계 짓고 통제하느냐는 자본주의 경쟁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됐고 흔히 군사력이 결부됐다.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은 국경 확장에 열을 냈고, 자국의 이익에 따라 국경을 열어 상품이나 노동력을 들여오기도 하고 국경을 닫아 출입을 제한하거나 특정 집단을 내쫓기도 했다.

이것은 국내 노동계급을 통제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국경을 기준으로 “우리 국민”에 속할 자격을 부여하거나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함으로써, 노동계급에게 자국 지배자들과 같은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 줬다. 또, 외부의 적에 맞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독려했다.

이처럼 국경 정책은 경제 상황, 국내 세력 관계, 대외 관계 등에 따라 달라졌다. 최근 10여 년 동안에는 국경 단속이 강화됐다. 그럼에도 이주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실, 자본주의에서 이주는 자본 축적과 착취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는데, 자본주의 초기부터 그랬다. 자본가들은 필요하면 강제 이주까지 동원했다. 흑인 노예 무역이 바로 그런 사례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 흑인을 영국이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강제 이주시켜 착취하며 천문학적인 이윤을 올렸다.

근래에도 많은 이주가 이뤄져 왔다. 자본주의 발전이 국가와 지역별로 불균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자리와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찾아 이주한다. 그러나 국경 단속은 이주민을 더 열악하고 불안정한 조건에 처하게 만든다.

지배자들에게 이주 노동자들은 착취하기에 매우 좋은 집단이다. 물론 한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이주민들은 때로 인상적인 투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가혹한 이주 정책으로 인한 열악한 처지 때문에 저항에 나서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이주 노동자들에게 불안정한 처지를 강요하는 한국 지배자들

가령, 한국의 이주 노동자들은 체류 허용 기간이 짧다. 고용허가제가 처음 시행될 때는 불과 3년이었다.

그 뒤 여러 이유로 체류 기간이 점점 늘어나 지금은 최대 9년 8개월까지 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영주권이나 국적을 취득하는 것은 여전히 매우 어렵다. 심지어 10년 가까이 체류해도 가족을 데려올 수 없다. 한국에 영구적으로 정착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언제든지 쉽게 데려다 쓰고 처분하기 쉽도록 말이다. 정부와 사장들은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면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게 될 것을 우려한다.

이주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도, 이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지배자들의 모순은 미등록 이주민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내 미등록 이주민 수는 현재 40만 명에 달한다. 정부는 여론과 경제 상황에 따라 단속을 강화했다가도 노동력이 부족하면 단속을 완화하기를 반복하면서 미등록 이주민을 값싼 노동력으로 이용해 왔다.

연대의 중요성

이주민과 난민은 노동계급의 적이 아니다. 공동의 적인 정부와 사장들에 맞서 함께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다. 노동운동과 좌파는 국경 통제 강화에 반대하고 이주민·난민과 연대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노동운동 일각에서는 이주노동자가 들어오면 한국인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더 나빠지고 일자리가 줄어든다며 반대하기도 한다. 가령 건설 부문에서 일부 노동자들의 편견이나 잘못된 태도에 노조 지도부와 좌파가 타협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요 좌파 정당들은 선거 공약의 일부로 이주민 정책을 포함시키거나 때때로 입장을 내지만, 그 이상으로 적극성을 보이지는 않는다. 선거 득실을 따져 난민 방어를 보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난민·이주민 차별에 반대하고 연대하는 것은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라 한국인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마르크스가 차별받는 아일랜드인에 대한 영국 노동계급의 태도를 지적한 것은 곱씹을 만하다.

마르크스는 영국 노동자들이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노동자를 대할 때 자신을 지배 민족의 일원인 양 생각하는 것이 “영국 노동계급을 무기력하게 하는 비결”이라고 지적했다. 지배자들이 그런 차별을 통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노동계급의 분노와 불만이 지배자들이 아니라 아일랜드 노동자들에게 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 국경을 중시하고 민족에 일체감을 느끼며 지배계급에 얽매일 게 아니라 국제 노동계급이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그래도 국경 통제는 필요하지 않나, 국경 통제에 반대하는 건 공상적이지 않나 하고 생각할 수 있다. 난민과 이주민 운동 내에도 이런 생각이 암암리에 있다.

난민과 이주민 운동 내의 일부 NGO들은 법·제도 개선에 초점을 두고 활동을 벌이면서 국경 통제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법·제도 개선은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국경 통제 자체에 반대하는 원칙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이주민과 난민의 권리를 일관되게 방어하기가 어렵다.

“가짜 난민”이든 미등록 이주민이든 누군가를 걸러내야 한다면, 기준을 세워야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과연 어떤 기준이 합당한가? 누구의 눈에 합당한 것인가?

가령 미등록 이주민의 선별 합법화 기준으로 흔히 나이, 업종, 숙련도 등 노동시장의 요구에 따른 체류 기간 부여가 논의돼 왔다. 이런 조건부 합법화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하라는 압력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주는 앞으로 계속 증가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위기 심화, 즉 전쟁과 기후 위기, 기근 등 이 체제가 낳는 온갖 위기가 더 많은 사람들을 이주로 내몰고 있다.

노동운동과 좌파는 이주민, 난민 문제 관심을 가지고 연대해야 한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사회복지 서비스 영역에 저렴한 이주 노동력 투입이 증가할 수 있다. 선진국들에서 수십 년 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미 한국의 요양병원 간병인의 80퍼센트가 조선족이고, 정부는 이 부문을 더 확대하려 한다. 일부 지배자들은 더 일반적으로, 인구 감소에 대처하기 위해 이주민 유입 확대를 주장하기도 한다.

동시에 한국 정부와 지배자들은 불법 입국 방지 등 체류 질서 확립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이민청을 설립해 상반된 필요를 조율하고 더 체계적으로 이주민을 관리하려 한다. 이에 수반될 국경 통제 강화는 이주민들의 권리를 제약하고 노동조건을 공격하는 데 더 좋은 토양을 제공할 것이다.

이처럼 난민과 이주민 문제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혁명적 좌파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국경 통제에 반대하며 난민과 이주민을 환영하고, 정부와 지배자들이 온갖 거짓말을 동원해 이주민과 난민의 조건을 공격하는 것에 단호하게 반대해야 한다. 또, 한국인 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이 연대할 수 있도록 단결의 정치를 제공하고 실질적 연대의 확대를 위해 애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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