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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사망:
영국 지배계급의 이익에 헌신한 기생충

9월 8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사망하자, 국내외 정치인과 주류 언론들은 그를 추모하고 찬양하기 바쁘다. 윤석열도 9월 19일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는 그 죽음을 추모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지난 5월 엘리자베스 2세 즉위 70년에 맞춰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가 발표한 기사를 소개한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직무” 수행 70주년 행사를 준비하는 동안 주류 논평가들이 뀔 알랑방귀에 속 뒤집힐 것을 대비하시라. 그들은 “금욕적”이나 “평생 헌신” 등을 운운할 것이다.

엘리자베스 2세에 더 잘 어울리는 말은 따로 있다. “세금 도둑”이나 “기생충” 같은 말들이 떠오른다. 엘리자베스 2세는 오로지 자기 계급의 이익에 헌신했을 뿐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26년 4월 21일에 기생적 집단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엘리자베스의 계승 순위는 백부와 자기 부친에 이은 3위였다.

그러나 상황이 일변했다. 그녀의 백부이자 나치 동조자인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하고 마찬가지로 나치 동조자인 월리스 심슨과 결혼한 것이다. 1930년대에 부유한 기생충들이 나치를 좋아한 경우는 많았지만, 에드워드와 심슨은 대영제국을 운영하는 지배자들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면서까지 나치를 열렬히 지지했고, 그래서 퇴위해야 했다.

하지만 나치에 동조하고 심지어 나치 복장을 한 것도 영국 왕실에게는 별로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나치식 경례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엘리자베스 2세가 가족들과 나치식 경례를 하는 사진이 알려지자, 왕실이 불평한 것이라고는 자기네 개인적 사진이 “흥밋거리로 이용됐다”는 것뿐이었다.

재위 기간 내내 엘리자베스 2세는 우파적 정책의 나팔수이자 불만을 억누르는 도구로 쓰였다. 심지어, 즉위 이전의 엘리자베스는 웨일스 민족주의 운동의 성장을 분쇄하려는 모략의 장기짝 구실을 했다.

권력층

엘리자베스는 웨일스청년연맹의 후원자로 지명됐다. 핵심 권력층은 이 단체가 “[잉글랜드와 웨일스] 양국 관계를 영구적으로 증진하는 데서 귀중한 기여”를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엘리자베스가 1952년 케냐를 방문하는 동안 국왕 조지 6세가 사망했고, 엘리자베스는 왕좌를 물려받았다. 같은 해에 영국의 식민지 점령군이 마우마우 항쟁[케냐의 무장 독립운동]을 분쇄하는 데에 투입됐다. 뒤이은 공포 정치로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끔찍하게 살해되고 고문당했다.

1963년에 케냐가 마침내 독립을 쟁취한 후, 엘리자베스 2세는 전 대통령 음제 조모 케냐타에게 서한을 보냈다. “케냐가 신의 가호 아래 번창하고 케냐인들이 평화와 충만함을 한껏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하노라.”

영국이 2013년이 돼서야 마우마우 항쟁 때 저지른 잔학 행위를 사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온화한 말은 공허하기 그지없다.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할 무렵, 한때 광대했던 대영제국은 세계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전에는 식민지였던 곳들이 독립을 쟁취하고 있었다. 제국을 부지하려고 영국 지배계급은 영연방을 수립했다.

영연방 웹사이트에서는 영연방을 “민족들의 가족”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영국은 언제나 이 관계에서 득을 얻어 왔다.

1953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연방을 이렇게 묘사했다. “영연방은 과거의 제국과 닮은 데가 하나도 없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구상으로, 우정, 충의, 자유와 평화에 대한 염원 같은 인간 정신의 고결한 자질에 기초해 있다.”

영연방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영국이 노동력 부족에 시달릴 때 유용해졌다. 윈드러시 세대*가 대양을 건너와 노동력 부족을 메웠다. 영연방 구축은 제국의 잔혹한 과거를 지우고 옛 식민지들과 왕실, “모국”의 거짓된 단합을 구축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불만

엘리자베스 2세 즉위 이전부터 무너지던 광대했던 제국을 유지하는 것 외에도,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는 것이 영국 지배계급의 또 다른 우선순위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이 거행된 시점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8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당시 영국은 파산하고 있었다. 대도시들은 여전히 폐허였고, 몇몇 식료품은 여전히 배급되고 있었다. 극심한 내핍 속에서 영국 지배계급에게 대관식은 애국주의 정서를 부추기고 거짓된 국민 단결 의식을 심어 줄 절호의 기회였다.

이 큰 행사에 지배계급은 아낌없이 돈을 썼다. 이 호화로운 대관식에는 1953년 당시 돈으로 157만 파운드가 든 것으로 추산된다.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4700만 파운드[약 750억 원]나 된다.

대관식 후 엘리트들은 버킹엄궁에 가서 닭고기 카나페, 조개 무스, 거북이 수프로 만찬을 즐겼다. 이런 주지육림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박탈감을 안겨 줬다.

엘리자베스 2세는 ─ 이제는 다행히도 죽은 ─ 인종차별주의자·성차별주의자 에든버러 공작 필립 왕자와 결혼했고, 그 결실로 1948년 11월에 찰스 왕자가 이 세상으로 튀어나왔다. 뒤이어 엘리자베스는 1950년에 앤 공주를 낳았다.

거의 10년 후 여왕은 십중팔구 보수당의 선거 우세를 굳히려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자 앤드루 왕자를 낳았다. 1964년에는 에드워드 왕자를 낳았다.

이혼

여왕의 자녀들의 삶은 이후 스캔들에 휩싸였다. 지저분한 이혼과 인종차별적 망언으로 구설수에 올랐으며 백만장자 아동 강간범 제프리 엡스타인과의 우정도 널리 알려진 바 있다.

그러나 온갖 추문에도 왕실은 호화로운 삶을 누렸다.

여왕의 자녀·손주들의 호화로운 결혼식이 열릴 때마다 수천만 파운드가 들었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식에만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8000만 파운드[1280억 원] 넘는 세금이 쓰였다.

왕실은 방이 1000개나 되는 윈저성과 그보다는 소박해서 방이 스무 개뿐인 켄징턴궁 등 부동산 20곳을 소유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까지 “유색인 이민자 혹은 외국인들”은 여러 왕실 가구에서 성직을 맡는 것이 금지돼 있었다.

오늘날에도 영국 왕실이 인종·성차별 금지법을 무시할 수 있게 해 주는 법 조항이 있다.

권력자들은 여왕이 가는 곳마다 경애를 받는다고 믿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실 여왕과 그의 후손들은 야유를 당하거나 돌을 맞거나 때로는 암살 시도에 직면하기도 했다.

2021년에 캐나다에서 집단 매장된 선주민 어린이들의 유해가 발견되자 시위대가 여왕의 동상을 끌어내렸다.

영국과 세계 곳곳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70년 재위를 기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인종차별, 식민주의, 불평등이라는 유산을 기억할 것이다.

영국몽(英國夢)에는 지금도 미래가 없다

이번 즉위 70년 축하 행사는 엘리자베스 2세가 대관식을 치른 지 69년 되는 해에, 그러나 여왕 즉위일로부터는 5개월 후에 열린다. 왕실 일이 그렇듯이 퍽이나 합리적인 일이다.

신이 왕실을 선택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왕이 이끄는 영국 국교회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여왕이 영국의 수호자라는 신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거의 없다. 즉위 축하 행사를 두고 언론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든 말이다.

그러나 여왕이 탄 마차를 끄는 말에는 진짜 금이 덮여 있고, 왕관을 장식한 보석들은 제국에서 짜낸 피로 얻어 낸 것들이다. 영국 정부의 정식 명칭은 ‘여왕 폐하의 정부’다. 총리를 군주가 지명하고, 영국군은 정부나 국민이 아니라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드라마

영국 왕실은 마치 드라마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런 왕실 드라마는 넷플릭스에도 나온다. 영국 왕실을 전통 TV 드라마쯤으로 보는 관점은 영국 왕실이 왜 계속 존재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영국 왕실의 인기를 유지하려는 백여 년의 노력은 영국의 계급 구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그 절정은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급진적 변화에 맞선 반동의 보루 구실을 하면서 영국이 제국주의적 확장을 벌이고 영국 자본가들이 도둑질을 할 수 있게 해 줬다.

빅토리아 여왕이 제국을 상징하는 여왕이었다면, 엘리자베스 2세는 제국의 쇠락을 상징하는 여왕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의 여황제”라는 칭호를 받았다. 엘리자베스는 대관식 때 만들어진 닭 요리[인도 향신료로 맛을 낸 ‘풀레 레이네 엘리자베스’]에 이름을 올렸다.

쇠락은 상징적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했을 때 영국은 70여 곳에 해외 영토가 있었다. 현재 엘리자베스 2세는 이른바 영연방 15개국의 군주다. 게다가 최근, 2021년에 엘리자베스 2세는 바베이도스의 군주 자리를 잃었다.

탐험가 모자를 쓴 왕족을 무역 사절로 이용하는 것은, 영국 지배자들의 이미지 관리에 도움이 된다. 왕실 인사의 악수는 영국의 여러 무기 수출에 기름칠을 해 줬다. 하지만 왕실의 유용성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의 특징은 왕실을 일반 대중과 똑같은 사람들처럼 보이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 왕실이 서민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인상을 주려는 과거의 시도들은 비웃음을 사거나 때로는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담백한 왕실 이미지를 고수했다.

그러면서 왕실은 지나치게 평범해 보여서 무의미하다는 인상을 주거나 지나치게 위선적으로 비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위험은 커졌다.

왕세자비 다이애나가 죽은 후 서민 코스프레와 왕족 노릇 사이의 긴장이 불거졌다. 상류층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다이애나를 못마땅하게 여긴 왕실이 다이애나를 해코지하려 해 왔다는 정서가 언뜻 보기에는 팽배했다. 하지만 다이애나에 대한 동정론은 사실 왕실의 인기에 득이 됐다.

오늘날 왕자비 매건 마클과 나치 제복을 즐겨 입는 왕자 해리가 인종차별 관념에 찌든 친척들을 떠났을 때도 일부 왕족에 대한 동정론과 다른 일부 왕족에 대한 비난 여론이 동시에 생겼다.

왕실은 기생적이고 호화로운 삶을 살며 매우 천천히 쇠락하고 있다. 왕실이 언론에 의지했다가도 언론을 비난하고 언론의 비난을 받기도 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게임이 벌어지는 것도 그런 과정의 일부다.

축하?

1969년에는 군주제 폐지를 원하는 여론이 18퍼센트였다. 즉위 25년 기념 행사, 왕세자비 다이애나의 죽음, 즉위 50년 기념 행사 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그 수치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군주제 폐지 여론은 2021년 5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높은 24퍼센트를 기록했다.

41퍼센트 대 31퍼센트로 선출된 국가 수반을 군주제보다 선호한다고 답한 연령층은 18~24세였다.

엘리자베스 2세가 엄청나게 장수했기 때문에 그녀가 죽으면 위기가 있을 것이다.

영국 왕실은 이전에도 추문에서 살아남았다. 그들은 그저 가족 드라마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야만의 시기에는 안정성이 호소력을 띨 수 있다. 기업주들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도 말이다. 영국 왕실이 정치를 초월해 있다는 관념은 지배자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대중을 단합시키는 데에 이용될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자들을 숭상할수록, 그들이 사는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사회에 맞서 행동에 나설 가능성은 낮아진다.

하지만 그 반대도 진실이다. 군주제 철폐가 필요하고 가능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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