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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결합과 그 시너지 효과 — 룩셈부르크의 통찰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을 통해 노동계급이 스스로를 변화시켜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세계 자본주의가 크나큰 위기에 빠진 가운데, 그 위기의 한 표현으로 한국 윤석열 정부의 정치 위기가 벌어지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경제 위기의 고통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과제를 본격 추진하려다 지지율이 급락했다. 더구나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대중의 더 큰 공분을 사고 있다.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만만찮은 규모의 시위가 매주 열리고 있다.

물론 아직 윤석열을 퇴진시킬 만큼 투쟁의 동력이 충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투쟁이 더 커지면 중요한 돌파구가 만들어질 수 있다.

폴란드 출신의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는 이처럼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통찰을 준다.

룩셈부르크는 그런 통찰을 1906년에 쓴 소책자 《대중파업, 정당, 노동조합》(이하 《대중파업》)에서 발전시켰다.

그 소책자는 1905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1905년 혁명 동안 차르 독재하의 러시아에서는 1월과 10월, 11월에 대규모 파업 물결이 세 번 일었다. 첫 파업 물결은 매우 사소한 사건으로 촉발됐다. 당시 수도 페테르부르크의 푸틸로프 대공장에서 노동자 4명이 절반쯤 자주적인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것이다(그 노조는 경찰 첩자가 설립한 것이었는데도). 이에 노동자들은 일제히 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노동조합 인정, 정치 개혁 등을 차르에게 탄원하며 행진했다. 그러나 차르는 여기에 경찰 발포로 응답했다. 노동자 40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러자 러시아 제국 전역으로 파업이 확산됐다. 생활상의 문제 해결을 위한 경제적 요구들이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적 요구들을 불렀다. 경제투쟁이 정치투쟁을 낳았는데, 그 역도 마찬가지였다.

8월에 차르는 양보 조처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가 인정한 절반의 ‘의회’ ‘두마’는 입법 권한도 없는 자문기구에 불과했다. 두마를 선출하는 투표권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변화 열망을 배신당한 노동자들은 10월에 다시 파업 물결을 일으켰다.

결국 10월 17일 차르는 헌법을 도입하고 개인의 시민적 권리, 집회·결사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 어정쩡한 양보는 다시 노동자들의 투지를 자극해 11월에 경제적 요구를 중심으로 한 파업 물결을 낳았다.

룩셈부르크는 이런 러시아의 경험을 일반화하고 적용하려 했다.

룩셈부르크는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임금 인상 등을 위해 노동자들이 개별 일터에서 벌이는 투쟁)이 특정한 상황에서는 정치투쟁(정치 권력을 둘러싼 투쟁으로, 궁극으로는 국가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투쟁)으로 발전한다는 점을 포착했다.

노동자들은 경제적 요구를 위해 싸우면서 조직을 건설하고 집단적 힘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시야를 넓힐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경제적 요구 자체가 정치적 성격을 띨 수도 있고, 경제적 요구로 시작된 투쟁이 전 계급적 지지와 공감을 얻어 정치적 초점이 되기도 한다.

룩셈부르크는 또한 정치투쟁이 경제투쟁을 자극할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정치투쟁을 통해 자신감을 얻게 된 노동자들이 그 자신감을 갖고 일터로 돌아가 그동안 사용자에게 겪은 수모를 더는 감내하기를 거부하고, 임금 등 노동조건을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썼다. “정치 행동의 고양 뒤에는 언제나 기름진 퇴적물이 남아 수많은 경제투쟁의 싹을 틔운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자본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의 휴지기마다 노동자들이 버티게 해 준다.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에 항상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노동계급 역량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다.”

룩셈부르크가 이런 동역학에 주목한 것은 당시 독일 노동자 운동 내 논쟁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물가 인상과 생계비 위기로 파업이 급증하고 있었다.

독일의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여기에 두려움을 가졌다. 노동조합 지도층은 대규모 파업을 파업 기금을 바닥내고, 선거를 통한 점진적 사회 개혁 프로젝트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모험으로 여겼다.

그래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대중파업이 지배계급의 탄압을 부를 것이라며, 역량이 충분히 갖춰졌다는 판단을 자신들이 내리기 전까지는 노동자들이 섣불리 대중파업에 나서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꾸준히 노동조합원을 늘리고 사회민주당의 세와 의석을 늘려서 그런 역량이 갖춰질 쯤이면, 이미 사회민주당이 우세해져서 그런 모험을 벌일 필요도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했다.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론》에서 이런 단선적인 역사관을 비판했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의식과 투쟁 역량은 노동계급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함을 보이려 했다.

또, 룩셈부르크는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결합(때로 통일)을 통해 노동계급이 혁명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룩셈부르크는 그 과정을 다소 숙명론적으로 묘사하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노동조합 관료층(지도자들)에 기반을 둔 개혁주의의 영향력을 과소 평가했다.

또, 대중파업이 자동으로 기존 국가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수렴되는 것도 아니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결국 차르의 강력한 탄압에 직면해 패배했다. 1917년에 다시 일어난 혁명은 1905년의 교훈을 간직하고 의식적으로 적용하려 애쓴 혁명적 조직(볼셰비키 당)이 있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시너지에 관한 룩셈부르크의 통찰은 탁월한 것이다. 룩셈부르크가 묘사한 동역학은 이후 여러 거대한 투쟁에서 되풀이됐다.

예컨대, 이런 동학은 1987년 여름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났다. 6월항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면서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들은 그 자신감으로 7~9월에 자신들의 일터에서 경제투쟁을 벌였다. 이런 투쟁들은 6월 항쟁의 성과를 굳히는 효과를 냈다.

룩셈부르크가 말한 시너지는 혁명에 한참 못 미치는 상황에서도 작은 규모로 나타나기도 한다.

1996년 연말과 1997년 연시의 노동법 파업은 룩셈부르크가 말한 아래로부터의 대중파업은 아니었지만, 민주노총 지도부가 소명한 ‘관료적 대중파업’이었다.

그 파업에 고무받아 봄에 청년·대학생들의 김영삼 정권 퇴진 투쟁이 일어났고, 늦가을에는 ‘IMF(를 불러들인) 위기’에 맞서 노동자 저항이 일어났다.

이런 경제투쟁/정치투쟁 상호작용 덕분에 정치 지형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생겨 일당 국가가 와해되고 김대중이 집권할 수 있었다.

현재 윤석열에 맞선 정치투쟁은 아직 그 규모가 충분히 크지는 않다. 그러나 투쟁이 더 커지면 참가자들의 자신감을 높일 수 있다. 자신감이 오른 사람들은 자신의 일터에서 사용자들을 상대로 경제적 투쟁을 벌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투쟁은 다시 윤석열에 맞선 투쟁을 더욱 고무할 수 있다.

윤석열 퇴진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이런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