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축구는 산업혁명과 함께 영국에서 시작됐다.

1700년대 중반까지 영국인들은 대부분 농업 노동에 의존하는 전원생활을 했다. 근근이 생존하는 가혹한 삶을 버티는 데는 수많은 풍물 장터와 축제가 큰 힘이 됐다.

풀밭, 마당, 장터, 술자리 등은 평민들이 신체적인 유희들, 현대식으로 말해 춤, 달리기, 복싱, 레슬링, 크리켓, 축구 등을 하던 공간이었다.

“민속 축구” 또는 “축제 축구”라 불리는 군중 축구는 영국 전역에서 유행했고 현대 축구와 럭비의 전신쯤 된다. 마을 전체가 즐겼고 남자만 참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흔히 지배계급은 하층민들이 노는 걸 싫어했다. 가난한 사람들도 여가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부자들에게 항상 충격이었다.

1300년부터 1650년까지 “민속 축구”는 최소 30차례 금지됐다. 1365년 에드워드 3세는 “공을 던지고 차는 행위를 포함한 모든 무가치한 경기”를 금지했고 1603년 제임스 1세는 “축구와 같은 거칠고 폭력적인 운동”을 금지했다.

하지만 왕들의 금지령은 실패했다. 평민들이 무시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층민의 여가와 놀이를 억압하려는 시도는 자본주의 초기에도 유지됐다. 산업혁명 당시 축구는 사회 혼란의 요인으로 취급됐고 위로부터 억압됐다.

산업혁명

그러나 자본주의의 역학은 이전 시대들과 전혀 달랐다.

불과 수십 년 만에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의 여가와 놀이를 급속히 변화시켰다. 자본주의에서 스포츠의 성장은 오래된 놀이 방식과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산업혁명과 비슷한 시기 영국 국가는 인클로저 운동을 일으켰다. 1700년에서 1845년까지 의회는 전에는 공공의 공간으로 여겨지던 토지의 절반을 사유화했다. 놀이와 여가를 위한 공간들이 급속히 잠식되기 시작했다.

들판과 공유지에 생긴 울타리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여름 저녁이나 하루 노동을 마친 후, 휴일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곳들이 하나둘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산업도시로 내몰렸고 굶주려 죽거나 가혹한 착취를 당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땅에서 쫓겨나 공장에 내몰린 사람들의 삶은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이제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공장의 요구에 순응해야 했다. 자연의 시간이 시계의 시간으로 대체됐다.

자본과 국가는 새로운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노동규율과 노동습관을 강제했다. 자본주의는 노동의 세계에 대변혁을 일으켰고 그럼으로써 놀이의 세계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모든 경기장은 새로운 돈벌이가 됐다. 사람들이 공짜로 뛰놀던 곳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게 됐다.

자본가들은 이 신흥시장을 재빨리 알아챘다. 관료들과 자본가들이 합심해 오락을 산업으로 뒤바꿨다. 새로운 목적에 어울리게 규칙들이 변경됐다. 변화가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변화의 방향은 분명했다.

스포츠의 인기와 수익성은 자본주의의 다른 발전들 덕분이기도 했다. 철도는 팀과 관중이 경기와 대회를 위해 더 멀리 이동할 수 있게 했고 전보 덕분에 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경기 결과를 전할 수 있게 됐다.

신문의 성장도 한몫했다. 신문들은 스포츠에 대한 정보를 끊임없이 실어날랐다.

19세기 동안 스포츠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스포츠는 상업적인 가치와 함께 이데올로기적인 역할도 획득했다.

사립학교들은 상층 중간계급 자식들의 남자다움과 리더쉽을 발전시키는데 팀 스포츠가 제격이라 믿고 장려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난잡한’ 스포츠 대신 건실하고 건강한 심신의 미덕을 설교했다.

노동계급 공동체는 저항도 했고 거부도 했다(넷플릭스 드라마 〈잉글리시 게임〉). 그러나 변화는 그들 자신이 선택한 조건에서 벌어진 게 아니었다.

주도권은 자본가 계급에게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이 즐기던 공놀이는 급속하게 그리고 엄청나게 변화했다.

축구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가 됐다. 월드컵은 올림픽보다 인기 있고 FIFA(국제축구연맹)는 UN(국제연합)보다 회원국이 많다.

자본과 국가가 축구 산업을 소유하고 운영한다. 푸틴의 절친이지만 젤렌스키의 부탁으로 미국이 제재를 취하지 않은 올리가르히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첼시 FC를 가졌고 아랍에미리트의 왕족 만수르는 맨체스터 시티 FC를 가졌고 카타르의 국왕은 파리생제르맹 FC를 가졌다.

이들은 축구로 돈을 굴리고 불리고 이미지 세탁을 한다. 국가들은 축구로 국민의 단합을 호소할 수 있다.

축구에서 약팀이 강팀을 이기는 이변은 항상 가능하다. 그러나 세계 최고 선수들은 빅 리그들과 부자 구단들이 데려가고 리그 우승은 부자 구단들이 훨씬 많이 한다. 모두 통계로 입증됐다.

사실, 자본주의에서 돈과 이윤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 축구보다 훨씬 단순한 달리기같은 운동조차 글로벌 대기업의 지배력이 강력하다.

혁명과 축구

특히 권위주의적인 정부 하에서 축구가 좌절한 젊은이들의 분노를 안전하게 해소하는 구실에 더 충실하다. 이 점은 팔레스타인이나 이집트에서도 비슷했다.

“울트라스”라고 불리는 열혈 축구팬들은 정치에 대한 증오를 상대팀 “울트라스”나 경찰들을 향해 표출하는 경향이 있다.

중동에서 이런 현상은 더 두드러졌다. 울트라스는 가난한 청년들의 사회적 분노를 조절하는 안전 밸브 역할을 해줬다.

그런데 진짜로 혁명이 일어나니까 어떤 일이 있었나?

2011년 1월 25일 이집트 혁명이 시작되자, 혁명 첫 주부터 가장 조직적이고 투쟁적인 축구 팬클럽인 울트라스 알 아흘리와 화이트 나이츠는 다년간의 경험을 활용해 혁명을 방어했다.

그들은 이집트 혁명의 중심지인 타흐리르 광장을 사수하기 위해 선두에 섰다. 그들은 바리케이드를 세워 경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서로 다른 축구팀의 울트라스들이 “울트라스 타흐리르 광장”이란 연합 조직을 만들어 하나의 적, 이집트 정부에 맞섰다.

독재자 무바라크는 모든 축구 경기를 중단시켰고 경찰은 공공장소에서 축구팀 옷을 입은 사람들을 공격했고 한밤중에 축구 팬클럽 운영진들의 집에 난입해 잠든 이들을 구타했다.

울트라스의 정치투쟁 진입에 혁명가들도 깜짝 놀랐다. 축구가 유일한 탈출구였던 이집트의 가난한 청년들이 보여 준 놀라운 변화였다.

군부는 잊지 않고 보복했다. 2012년 2월 1일 포트사이드 축구 경기장에서 군부는 79명을 학살했다. 사고나 폭동이 아니었고 알 아흘리 팬 클럽을 겨냥해 군부가 기획한 학살극이었다.

전부터 알 아흘리 축구팀은 스스로 가장 정치적이고 가장 노동계급 팬을 많이 보유한 팀이라고 자랑해왔다.

혁명의 지지자들은 군부의 학살을 폭로하고 시위와 파업을 일으켜 알 아흘리 축구팀과 팬들 편에 굳건히 섰다.

축구든 다른 스포츠든 대부분 사회 변화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전장은 아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 종종 스포츠 현장에서 사회적인 투쟁의 대결이 벌어진다. 진지한 투사라면 그런 가능성을 결코 기각하지 말아야 한다.

1910년대 후반과 1920년대 초반 영국에서 여자 축구는 남자 축구보다 훨씬 인기 있었다. 전쟁으로 수많은 여성이 노동 현장에 진출했고 여자 축구는 노동조합 운동과 연계돼 있었다. 곧 축구협회(FA)가 성차별적으로 여자 축구 경기를 금지시켰다. 안타깝게도 저항이 충분하지 못했다.

무하마드 알리, 존 카를로스, 토미 스미스, 빌리 진 킹, 콜린 캐퍼닉, 셀틱 FC 팬클럽은 잘 알려진 스포츠계의 저항과 투쟁 사례일 뿐이다. 더 많은 선수들, 팬들, 팬이 아닌 다른 많은 사람들까지 연관된 투쟁들이 스포츠계에서 일어났었고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스포츠도 사회와 투쟁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놀이와 자유

우리는 세상을 창조한 게 누구인지보다 세상을 파괴하는 게 누구인지가 훨씬 중요해진 시대를 살고 있다. 거대 기업들과 정부들이 지구를 불태우면서 세상도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이지만, 노동하는 다수가 없다면 단 하루도 굴러가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노동하는 다수에게 재미있게 놀 시간과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자유는 결정권이 있어야 누릴 수 있고 소수가 아니라 다수에게 결정권이 있으려면 소수가 아니라 다수에게 권력이 있어야 한다.

현재 우리 다수를 지배하는 저들 소수는 자본가들이다. 어떤 자본가도 자본주의라는 이름에 이견을 달지 않는 것만 봐도 그들에게 권력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권력 관계를 뒤집으려면 반드시 혁명이 필요하다. 다행히 자본주의 시대는 혁명이나 혁명이 될 뻔 했던 투쟁들이 이전 시대에 비할 수 없이 훨씬 많아졌다.

그때마다 “억압받는 자들의 진정한 축제”가 펼쳐졌다. 그만큼 혁명과 혁명적 투쟁 과정에서 사람들은 가장 강렬한 해방감을 느낀다.

소수만 자유로운 자본주의를 끝내고 다수가 자유로운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면 그때 가서 미래 세대가 즐길 놀이는 어떤 것이 될지 아무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전적으로 훗날의 세대가 토론하고 결정할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