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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다음 소희〉:
그 다음의 소희가 없기를 바라며

2017년 특성화고 3학년 고(故) 홍수연 학생이 ‘현장실습’을 명분으로 콜센터에서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음 소희〉는 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나는 콜센터 노동자이다. 이 영화는 콜센터 노동자들이 겪는 문제를 꽤나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다.

영화는 춤을 좋아하는 건강한 소희(김시은 분)의 영혼이 콜센터 일을 하며 어떻게 파괴되는지 과장하지 않고 현실을 담담히 보여 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얼마나 노동자들을 천대하고 도구화하는지 느낄 수 있다.

영화 제목이 〈다음 소희〉인 것은 그 다음의 소희는 더는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이번 소희는 왜 우리 곁을 떠나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출처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이게 학교입니까? 인력사무소이지”

영화에서 오유진 형사(배두나 분)가 소희가 죽은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은 현장실습 제도의 민낯을 밝혀내는 과정으로 그려진다. 오유진 형사는 학교의 취업률이 중요한데 “이런 일”이 벌어져서 짜증난다는 식으로 함부로 말하는 교감에게 “이게 학교입니까? 인력사무소이지”라는 일침과 함께 주먹을 날린다.

그렇다. 소희의 죽음은 현장실습생 제도의 부당함 때문이다. 고교 현장실습은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조기 취업을 강요하며 학생들을 저임금 노동력 제공 수단으로 활용한다. 학생들은 현장실습 후 취업해서도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로 내몰린다. 현장실습제도는 저임금 노동력을 원활하게 수급받으려는 기업주들의 이해관계에 정부가 부응한 것이다.

‘취업률 경쟁’도 학생들을 괴롭힌다. 모든 특성화고가 학생들을 취업률 지표로 취급한다. 취업률이 높아야만 교육부에서 재정을 지원받을 수 있다. 학교는 노동조건이 어떤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학생들을 열악한 일터로 몰아넣는다.

현장실습생들의 고충은 이 사회의 청년 노동자들이 겪는 열악한 처지의 일부다. ‘다음 소희’들이 계속 생겨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제주 현장실습생 고(故) 이민호 학생, 태안화력발전소 청년 노동자 고(故) 김용균, 평택항 대학생 노동자 고(故) 이선호.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청년 노동자들의 죽음이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업무 스트레스로 먼저 자살한 콜센터 팀장의 비극 앞에서 그를 추모할 시간도 없이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애써 밝은 목소리로 뱉어 내야 하는 소희와 노동자들의 현실은 노동 소외의 비정함을 보여 준다.

또, 소희는 실적 경쟁에 반강제로 내몰려 고통을 겪는다. 심지어 소희는 실적을 달성해도 실습생이라는 이유로 인센티브도 지급받지 못한다. 게다가 소희가 실습생이라는 이유로 사측은 근로기준법까지 어기며 기본급도 낮게 지급했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콜센터 노동자들의 현실은 실제와 매우 가깝다. 콜센터는 콜 실적으로 임금 수준이 결정되고, 실적이 낮으면 혹독한 질책에 시달린다. 할당된 콜수를 채워야 퇴근이 가능하다거나, 콜 실적에 따라 등수를 매겨서 모멸감을 주는 등. 콜센터는 인센티브를 차등으로 지급해 노동자들을 이간질시키고, 전체 임금 수준을 낮춘다. 대체로 콜센터는 기본급이 최저임금 수준이기에 인센티브가 없으면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영화 속 실습생들도 사측에 의해 부추겨지는 경쟁 때문에 서로 갈등한다. 하지만 결국 소희의 죽음 앞에서 현실의 부당함을 깨닫는 존재로도 묘사된다.

계속해서 ‘다음 소희’를 만들어 내는 사회

소희를 죽음으로 몰아간 핵심에는 자본주의적 경쟁 논리 그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잡고 있다. 더 많은 이윤을 얻고 착취율을 높이고자 기업주들은 비인간적인 성과급 경쟁을 강요한다. 또 자본주의에서의 교육은 어떤가. 어떻게든 저렴한 노동력을 자본에게 공급하기 위해 기능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보고 ‘어른이 아이를 죽였다’며 어른들의 책임을 보여 주는 영화라고 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영화 속 어른들에 대한 캐릭터 묘사는 입체적이다. 소희를 콜센터로 소개한 담임 교사는 소희에게 지옥과 같은 콜센터를 “버티라”라고 강요하기도 하지만, 소희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기도 하고, 그 자신이 스스로 경쟁 논리 속에서 무력한 존재라는 점에 괴로워한다. 자살한 팀장도 소희에게 업무 경쟁을 강요하지만, 자신이 실습생에게 강요해야 했던 부당한 행위를 폭로하며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따라서 소희의 죽음에 어른들이 관여돼 있지만, 소희를 둘러싼 어른들은 자본주의의 경쟁 논리에 고스란히 놓여 있는 구조적 문제의 일부이자, 어쩌면 그들 또한 이 무정한 체제의 피해자라고 보는 것이 맞다.

끝으로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자본주의의 경쟁 논리가 얼마나 체제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지 느꼈다. 오유진 형사는 조사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찾아간 장학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현실을 보세요. 일개 지역 교육청 장학사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교육부로 가시게요?” 형사가 조사해서 무엇이 바뀔 수 있겠냐는 대사다.

물론 영화는 구체적 대안을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계속해서 다음 소희를 만들어내는 사회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느끼게 한다.

소희는 부당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다 관리자와 갈등을 겪어 무급휴직을 당한다. 복귀를 하기 전 날, 소희는 스스로 저수지로 천천히 걸어갔다. 소희가 서서히 저수지로 가라앉을 때 슬픔과 분노가 마음에 차오른다.

다음 소희가 없기를 바란다면, 영화를 통해 그 이유를 얻어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