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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전선의 계급 타협과 협력

한국에서 민중진영 단일 연대연합체 건설을 둘러싼 논쟁에서 곧잘 거론되는 성공 사례가 1930년대 프랑스 민중전선이다. 게다가 올해는 프랑스 민중전선 정부 취임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영국의 좌파 주간지 〈소셜리스트 워커〉 편집자인 크리스 뱀버리가 프랑스 민중전선의 신화와 현실을 20년 전에 살펴봤다. [ ] 속의 말은 편집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것이다.

최근 몇 달 동안 《맑시즘 투데이》(Marxism Today)[1991년에 폐간된 영국 공산당 이론지]는 그들이 ‘대처리즘’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저지하기 위한 광범한 동맹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이 글은 1985년 초에 씌어졌다. ‘대처리즘’은 당시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의 통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민당(SDP)과 자유당[사민당과 자유당은 둘 다 중간계급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 정당으로, 1988년에 통합해 자민당이 됐다], 심지어 ‘진보적인’ 보수당원들까지 포함하는 중간계급 유권자들을 대표하는 정당들과 노동운동을 이어주는 동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동맹의 필요성은 대처리즘이 새로운 현상 ― 민족주의, 법질서를 앞세운 위협, 선택의 자유 같은 사상을 이용해 대중적 지지를 얻은 우익 경향 ― 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맑시즘 투데이》의 주장은 소수 공산당원들뿐 아니라 폭넓은 청중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맑시즘 투데이》 스스로 50년 전[1935년] 여름에 만들어진 프랑스 민중전선을 그들이 주장하는 ‘민주대연합’의 모범으로 꼽는다.

민중전선을 뒷받침한 사상은 공산당의 사상이었다.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는 파시스트들이 지지를 얻으려고 민족주의 같은 사상의 흡인력을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좌파는 자기 나름으로 그런 사상들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중전선 전략을 설명하며 토레즈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적들이 우리에게서 훔쳐가서 유린한 것들을 과감하게 빼앗아왔다. 우리는 라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와 삼색기[프랑스 국기]를 되찾았다.”

한 선거 방송에서 그는 청취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애국자 여러분에게, ‘불의 십자가’ 소속 재향군인들에게 손을 내밉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민중의 아들이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무질서와 부패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라가 몰락하고 파멸하는 것을 막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불의 십자가’는 주요 파시스트 단체였다.

민중전선이 만들어지고 난 직후에 토레즈는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우익 정당들도 포함하는 ‘프랑스 전선’ 결성을 호소했다. 이 모든 것은 노동계급만으로는 파시즘의 위협을 저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정당화됐다.

프랑스에서 파시즘의 위협은 실질적인 것이었다. 다양한 파시스트 단체들의 회원이 1백만 명에 달했다. 1934년 2월 그들은 급진당[당명과 달리 중간계급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 정당] 정부를 쫓아낼 목적으로 프랑스 의회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할 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다. 급진당은 사임했고, ‘강경’ 우파 정부가 들어서, 파시즘에 길을 내주기 시작하는 듯했다.

이에 대응해 사회당과 주요 노조연맹인 노동총동맹(CGT)은 하루 파업을 호소했다. 파리에서만 1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그 날 파리 동쪽 끝에서 두 개의 시위대가 행진을 시작했다. 하나는 사회당과 노조 지도자들이 이끌었고 다른 하나는 공산당이 지도하는 대열이었다. 행진 도중에 두 대열이 만났다. 잠시 동안 그들은 서로 마주보다가 ‘단결, 단결’ 하는 외침 속에 하나로 합쳐져 파리 전체를 휩쓸었다.

그 단결된 시위로 좌파의 새로운 시기가 열리는 듯했다. 독일에서는 좌파가 분열해서 실질적인 반파시즘 운동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에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유럽의 다른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사회당도 강력한 급진화를 겪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당 내 좌파는 당원 가운데 3분의 1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파리의 핵심 지역을 통제했다.

1934년 7월 사회당과 공산당은 ‘공동행동협약’을 맺었다. 10월에 토레즈는 그가 중간계급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던 급진당을 포함하는 범 민중전선을 호소했다.

많은 협상을 거친 뒤 1935년 바스티유 데이[프랑스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에 대규모 행진과 함께 민중전선이 새로 출범했다.

1936년 5월 선거에서 민중전선 정부가 당선했다. 투표 전에 민중전선은 급진당이 총리직을 맡기로 합의했었다. 그러나 급진당의 득표율은 형편없었다. 사회당이 최대 다수 정당이었고 사회당 당수 레옹 블룸이 총리가 됐다. 공산당도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선거를 계기로 노동계급 역사상 최대 규모 파업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1년 전 벌어진 브레스트와 툴롱의 해군조선소 파업은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높아지고 있다는 징조였다. 노동자들의 자신감 상승은 좌파가 파시즘을 물리쳤다는 생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런 급진화는 사회당 내부에 반영됐다. 좌파는 조직상으로는 단결했지만 정치상으로는 분열해 있었다. 한쪽 그룹은 공산당 정치를 공유하면서도 충실하게 블룸을 지지했다. 다른 한쪽, 마르소 피베르가 이끄는 ‘혁명적 좌파’는 혁명적 사회주의에 가까운 입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피베르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그는 민중전선의 강령 내에서의 모든 것을 말한 것이지만 그 구호는 당시 정서에 잘 들어맞았다. 프랑스 전역에서 공장 점거가 벌어졌다. 미조직 상점노동자들과 심지어 폴리 베르제르[파리의 뮤직홀 겸 버라이어티쇼 극장] 무용수들까지 파업 물결에 동참했다.

토레즈는 “가능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말한 뒤에, “파업을 끝낼 줄도 알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인류)는 ‘공산당은 질서를 뜻한다’라는 표제를 실었다. 레옹 블룸은 이렇게 썼다. “위대한 개혁만이 혁명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 됐다.”

노조 지도자들은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유급휴가가 포함된 협상안을 서둘러 받아들였다. 저항이 있었으나 파업은 철회됐다.

1937년 3월 사회당 소속 내무장관은 파시스트 행진 대열 바깥에 있던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명령을 경찰에 내렸다. 4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사회당과 공산당이 파시즘에 맞서 함께 싸우기를 거부하던 시기에 망명중인 트로츠키는 노동계급 단체들의 공동전선을 호소했었다. 이제 그는 비판의 화살을 새로운 민중전선 전략으로 돌렸다.

트로츠키는 사회당이 ‘사회파시스트’라는 스탈린의 생각을 비판했었다. 그것이 개량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노동자들과의 공동행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히틀러를 패퇴시키기 위해 필요한 노동자들의 대중 동원을 가로막았다. 트로츠키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주요 정당인 급진당과의 민중전선도 똑같은 효과를 낼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로츠키는 개량주의적 노동자들과 혁명적 노동자들을 모두 동원할 수 있는 공동전선을 호소했다. 이와 달리 민중전선은 그 지지자들의 활동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강령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프랑스 민중전선은 처음부터 사회당과 공산당이 자신들의 정치 활동을 급진당의 통제 아래 두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심지어 일부 급진당원들도 민중전선의 강령이 너무 온건하다고 비난했다. 파시즘 문제에서 민중전선은 국가 규제를 요구하는 데 그쳤다. 특히, 민중전선은 프랑스의 재무장을 지지했다. 바로 두 달 뒤 러시아와 프랑스는 군사협약을 맺었다.

민중전선은 노동자들을 공동행동으로 단결시킨 것이 아니라 대중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들 사이의 협약이었을 뿐이다. 이 지도자들은 서로 일체의 상호 비판도 삼가기로 합의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비판을 효과적으로 잠재웠다.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이 아닌 부분들과의 동맹을 배제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농민의 지지가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토레즈는 급진당과의 동맹이 노동계급과 중간계급과 농민의 동맹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토레즈를 비판하며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프롤레타리아와 도시나 농촌의 중간계급 사이의 동맹은 중간계급의 전통적인 의회 대표자들에 맞선 비타협적 투쟁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트로츠키는 중간계급을 두 주요 계급 ―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 ― 사이에서 동요하는 계급으로 묘사했다. 위기의 시대에 중간계급은 필사적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파산한 상점주인이나 저당 잡힌 재산을 잃게 된 농민은 은행가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조치를 원했다.

그런 상황에서 중간계급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듯이 보이는 쪽으로, 극우나 극좌 어느 한 쪽으로 끌릴 수 있었다. 민중전선은 중간계급과 농민들이 외면하던 바로 그 정치인들을 지지하면서 단결을 추구했다. 트로츠키의 말을 빌면, 급진당은 중간계급들을 은행가들과 다국적기업에 묶어두는 정당이었다.

트로츠키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제한된 요구를 둘러싼 단결을 지지했다. 그런 단결 속에서 모든 조직들은 자신의 입장을 유지하고 비판의 자유를 누릴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대중의 투쟁과 참여를 고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달리 민중전선은 대중 운동의 ‘브레이크’라고 트로츠키는 묘사했다.

사회당의 일부였던 피베르의 ‘혁명적 좌파’만이 민중전선 정부를 반대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는 뒤죽박죽이었다. 그들은 ‘투쟁하는 민중전선’을 요구했다. 피베르는 ‘혁명적 행동 위원회’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파업이 절정에 달했을 때, 피베르는 블룸의 홍보보좌관 자리를 받아들였다!

한 피베르 지지자는 이렇게 썼다. “제2민중전선(‘투쟁하는 민중전선’)을 위해 우리는 스스로 제1민중전선에 충실히 참여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이런 타협을 위해 그럴 듯한 변명거리를 찾아냈다. 제1민중전선을 견인하기 위해 그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피베르는 레닌의 노선을 따르는 혁명정당을 주장했지만, 사회당을 내부에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피베르 그룹은 진짜로 혁명적 사상에 이끌렸다. 그러나 그들은 블룸과 단절하고 프랑스 노동계급의 관료 지도자들에게 도전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그들을 가차없이 비판했다.

“마르소 피베르는 이런저런 혁명적 구호를 되풀이하지만, 그것을 ‘조직적 단결’이라는 추상적 원칙에 종속시킨다. … 피베르 경향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혁명적’ 구호들을 받아들이지만 그로부터 필연적인 결론을 끌어내지 않는 것. … 이렇게 되면 온갖 ‘혁명적’ 구호들은 아무 소용도 없는 공허한 것이 된다. 현 단계에서 피베르의 운동은 혁명적 노동자들에게 일종의 아편과 같다. 피베르는 혁명적 노동자들에게 혁명적 투쟁, ‘혁명적 행동’에 찬성하면서도 … 쓰레기 같은 국수주의자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다고 가르치려 한다.”

사회당에 집착했기 때문에 피베르는 ‘민중전선의 체계 속으로’ 들어갔다.

블룸은 뒤로 물러나 공산당과 사회당 내 공산당 동맹 세력들이 피베르를 공격하는 것을 보며 흡족해 했다. 그는 투쟁이 퇴조해 피베르가 고립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혁명적 좌파’를 당에서 쫓아냈다. 피베르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고 애썼지만, 사회당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뒤로는 지지자들 가운데 소수만을 획득할 수 있었다.

민중전선은 사회당 지도부가 계급 전투성의 고양기를 무사히 통과하는 수단이 됐다. 전투성이 가라앉자 그들은 좌파 협력자들을 제거했다. 특히 블룸은 공산당의 주장 ― 이 주장은 사회주의를 내팽개치는 좌파적 구실이 됐다 ― 을 이용해 사회당 좌파를 고립시키고 분쇄했다.

프랑스 민중전선은 결코 진정한 의미의 대중운동이 아니었다.

파업 물결이 거세질수록 급진당은 점점 더 겁을 먹었다. 급진당을 민중전선에 묶어두기 위해 점차 공산당은 모든 것이 민중전선의 강령 범위, 즉 급진당이 설정한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1938년 7월, 혼자 힘으로 다시 정부를 통제하게 된 급진당은 주 40시간 노동제 등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쟁취한 여러 성과들을 뒤집었다. 노동조합을 통제하던 공산당은 협상을 시도하다가 결국 하루 파업을 호소했다.

그 파업은 무엇보다 공산당의 영향력이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파업 당일 조직자들이 ‘비정치적’이라고 주장한 시위에 2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파리 경찰은 파업 참가자들을 물리적으로 공격했다. 정부는 파업이 실패라고 선언하며 노동자들에게 작업에 복귀하라고 말했다.

그 동안 잠시 자신들의 희망을 좌파에게 걸었던 중간계급들은 민중전선이 너무나 익숙한 정책들을 추진하는 것을 봤다. 다시 한번 그들은 우파 정당들을 지지하는 쪽으로 옮겨갔다.

오늘날 유러코뮤니스트 이론가들이 민중전선의 성과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프랑스에서 사회주의가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으려 했다면 제국주의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나찌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개입했을 것이다. 만약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으려 했다면 1백50만 급진당 지지자들이 겁먹고 파시즘의 품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 주장은, 사실상 모든 기록자들이 지적했듯이, 중간계급의 여러 부문들이 1936년 여름에 벌어진 파업과 공장점거에 상당히 동조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또한 그 해 여름 피레네 산맥 너머 스페인 노동계급이 카탈루냐와 주요 도시들에서 권력을 장악했다는 사실도 무시한다. 스페인 내전을 부른 혁명 물결은 그로부터 1년 뒤 스페인 민중전선 정부가 자신의 군대를 이용해 바르셀로나의 노동자 권력을 분쇄했을 때 끝나버렸다.

프랑스 민중전선 정부는 이상적인 지리적 위치에 있었는데도 프랑코에 맞선 투쟁을 군사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거기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민중전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민중전선 때문에 좌파가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와 그 밖의 지역에서 공산당이 성장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또, 프랑스 노동조합원은 1백만 명 이하에서 1936년 여름에는 8백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3년 뒤 그 숫자는 1백만 명으로 다시 줄었다. 이것은 사용자들의 공세를 보여 주는 지표다.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좌파는 혼란에 빠졌다. 한때 강력하던 사회당 좌파는 산산조각났다.

프랑스 공산당은 극우파의 대중적 인기를 ‘잠식하기’ 위해 정말로 애썼다. 민중전선이 분열되자 공산당은 ‘법률 존중, 민족경제의 옹호, 조국의 자유와 독립 수호’에 기초한 새로운 동맹을 제안했다.

당연히 이런 호소는 파시스트 사상이나 우익 사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로부터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반면에, 대중 파업은 전에 파시스트 단체를 지지했던 많은 노동자들을 끌어당겼다. 그런 주장의 실제 효과는 노동자들이 직면한 중대한 위협(민중전선 내 공산당의 옛 동맹들이 가하는)을 가리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과연 민중전선은 파시즘 저지라는 목표를 이루었는가? 1933년에 독일 지배계급은 노동계급이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히틀러를 선택했다.

1934년 초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은 파시스트들의 권력 장악을 분명 고려하고 있었다. 공장점거에서 절정에 달한 노동계급의 거의 자생적 대응이 파시스트에게 권력을 넘겨준다는 생각을 막았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은 사회주의의 위협을 느꼈다. 사회주의는 의제에 올라 있지 않다는 토레즈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노동계급을 패퇴시키기 위한 길로 나아갔다. 급진당과 그 밖의 다른 부르주아 정당들은 너무 취약해서 이런 일을 할 수 없었다.

프랑스 지배계급은 1940년 6월 국경 밖에서 구원자를 발견했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비극은 좌파가 프랑스 노동계급에게 진정한 지도를 조금치도 제공할 수 없는 처지였다는 것이다.

하나 더 지적해야 한다. 이 모든 문제에서 오늘날 유러코뮤니스트들은 민중전선을 그 전의 초좌파 노선과 대립시키면서 초좌파 노선을 스탈린 탓으로 돌린다. 당시 스탈린의 주장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며 토레즈와 디미트로프를 영웅 대접한다.

즉, 오늘날 유러코뮤니즘의 스탈린주의 비판이 이미 50년 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디미트로프와 토레즈는 모두 스탈린의 충성스러운 추종자였다. 그들은 모스크바가 정책을 변경하자 충실하게 민중전선 노선을 따른 것과 똑같이 그 전의 초좌파 노선을 따랐던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는다. 1935년의 민중전선이 비극으로 끝났다면 《맑시즘 투데이》 편집진과 데이빗 오웬[영국 사민당 지도자]이나 테드 히스[1970∼74년 영국 총리를 지낸 보수당 정치인]의 동맹이라는 생각은 희극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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