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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오부치 선언에 대해 말해야 할 점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선언’(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내세우며 이번 한일 합의를 변호한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두 국가가 ‘과거를 직시하며 미래로 나아간 모범’을 보인 합의라는 것이다. 또한 김대중-오부치 선언에 담긴 일본 측의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는 역사 인식을 기시다 정부가 계승했음을 밝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시다 정부가 계승 의사를 밝혔다는 것 자체가 이 선언이 별볼일없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기시다 정부는 계승 의사를 밝힌 바로 다음 날, 강제동원 현장인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계속 추진해 나가겠다고 했다.

역대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등 식민지 피해 문제가 1965년 한일협정에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인식을 바꾼 적이 없다.

1998년 10월 8일 일본 도쿄 영빈관에서 김대중과 오부치 게이조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출처 e영상역사관

김대중-오부치 선언에서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도의적” 사과만을 했을 뿐이다. 위안부, 강제동원 등 일본 국가가 벌인 범죄 문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현안 쟁점이었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도 포함되지 않았다.

김대중-오부치 선언 당시 신용하 서울대 교수는 “일본 측의 무성의로 과거사 문제에 전혀 진전이 없다”고 평가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 자체가 과거사에 얽매이지 말고 한-일 간 동반자 관계를 굳히자는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외무상이던 고무라 마사히코는 이렇게 말했다.

“파트너십 선언 당일 김대중 대통령이 [오부치 총리에게] ‘앞으로 한국 정부는 과거 역사 문제에 대해서 건드리지 않겠다’고 발언했다.”

김대중 정부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 말은 일본 제국 범죄의 피해자들이 이전에 그랬듯이, 자국 정부를 통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험난한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관계 개선의 대가로 한국은 30억 달러를 일본수출입은행에서 2.3퍼센트의 저리로 빌려올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은 ‘IMF 공황’ 이후 자금이 부족하던 때였다.

또한 당시에 한국과 일본은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며 군사 안보 협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한일안보정책협의회(1998), 한일 공동해난구조 훈련(1999) 등이 이때 시작됐다.

이렇듯 당시에도 일본과의 안보 협력 강화 흐름 속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자국 정부에 의해 냉혹하게 외면당한 것이다.

피해자 내치기의 원조

이것은 민주당이 과거사 해결 문제에서 일관되지 못하고 크게 미흡했음을 보여 준다. 민주당도 한국 지배계급의 역사적 이해관계를 이럭저럭 대변하려 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이해관계를 더 노골적으로 대변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구체제 세력과 그 후신인 윤석열과 국민의힘이다.

그들은 ‘윤석열이 친일이면 김대중도 친일이냐’며 민주당의 약점을 교활하게 이용하지만, 그들 자신이 이런 자국민 배신의 원조라는 사실은 감춘다.

윤석열과 국민의힘은 이 많은 문제를 잉태한 1965년 한일협정의 지지자이자 후계자들이고, 그것을 주도한 박정희와 김종필을 최근에 계승한 자들이다. 그 협정에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배상 책임 문제를 더 묻지 않기로 하고, 기업을 위한 경제 발전 자금을 받았다.

일본 국가가 지금껏 뻔뻔하게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을 떠들어댈 수 있게 합의해 준 장본인이 바로 현 여권의 대선배들이자 선친들인 당시 독재자들이다. 1960년대 한일 협정 추진 과정에서 당시 한국 측 대표 김종필이 독도를 폭파하자고 일본 측에 제의했던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때 이래 한국의 지배계급은 미일동맹에 스스로 부착돼,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성장(자본축적)해 왔다. 그 전략의 일부로서 일본과도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 군사 협력에서는 비록 ‘가다 서다를 반복’했지만 말이다.

독재자들의 이런 역사적 합의 때문에 위안부 문제 공개 제기는 절차적 민주화 전환이 시작된 1991년에야 가능했다. 국민의힘의 전신들은 시늉상의 도움조차 준 적이 없고, 심지어 2015년에는 박근혜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덮어버리려는 합의를 일본 아베 정부와 했다.

한국 우파에게 과거사 문제는 늘 한일 관계 개선의 걸림돌로 취급받았다. 지금 그들의 새로운 대표자 윤석열이 또다시 걸림돌을 치운다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미·중 갈등 고조 속에서 한·미·일 안보 협력 틀을 확고히 하는 것이 세 나라 지배자들에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좌파들은 민족적 굴욕에 대해 말하지 말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기를 애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