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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 일본 제국의 노예가 되다

조선인 강제동원 광부 석탄은 핵심 전쟁 자원이었다 ⓒ출처 국가기록원

윤석열-기시다의 강제동원 ‘해법’ 합의가 피해자들을 짓밟기 무섭게, 3월 28일 일제 강제동원의 강제성을 희석해 표현한 2024년용 일본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 검정 결과가 발표됐다.

새 교과서는 노동자 강제동원을 서술할 때 강제 연행을 암시하는 “끌려갔다”는 표현을 “동원됐다”라는 말로 대체했다. 그리고 징병된 조선 청년들에 관한 서술에서 “지원해서” 병사가 됐다는 말을 추가하거나, “징병되어”라는 표현을 삭제했다.

3월 16일 한일 정상회담 때도 기시다는 강제동원의 강제성을 희석시키는 용어인 “한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표현은 2018년 한국 대법원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최초의 피해 배상 승소 판결을 내린 직후, 당시 일본 총리였던 아베가 판결을 부정하기 위해 쓴 말이었다. 당시 아베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재판의 원고들은 모두 모집에 응한 경우이므로 ‘한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라고 얘기한다.”

일본 정부의 역사 교과서 왜곡은 1980년대 수면 위로 떠오른 이후 집요하게 시도됐고 계속 쟁점이 돼 왔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집요하게 달려드는 이유는 과거 침략 역사가 오늘날 일본이 추진하는 군사대국화에 차질을 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사 문제는 경쟁자인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며 아시아 주변국을 포섭하는 데는 유리한 쟁점인 반면, 일본이 주변국을 중국 포위 전략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

2015년 아베가 한 말처럼, 일본 지배자들은 “전쟁 이전의 강한 일본을 되찾”아야 하고, 당시의 침략 역사는 “부끄러운 역사가 아닌 재현해야 할 영광이며 아시아에 이로운 것”이었다는 제국주의 역사관을 퍼트리려 한다.

교과서 역사 왜곡은 그런 이데올로기를 정치인들의 망언 수준을 넘어 학교에서 정식 교육으로 가르치려는 시도이다.

일본 제국의 체계적 동원 실태

일제 강점기에 최소 20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들(당시 조선인 인구는 2000만 명 정도였다)이 체계적으로 전쟁터나 탄광, 군수 공장 등으로 강제 동원됐다. 이것은 결코 자유로운 모집-지원 관계 속에 이뤄진 일이 아니다.

강제동원은 당시 일본 제국의 면밀하고 폭력적인 동원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1937~1941년에는 형식적으로는 모집 방식이 주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 경찰이 깊이 관여했고 조선인들이 경찰관의 모집을 거부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강제동원은 특히 1942년부터 집중적으로 증가했다. 이때부터는 일본 정부가 조선의 마을마다 동원 목표를 할당하고 조선총독부와 경찰, 기업이 협력해서 다짜고짜 끌고가는 방식의 동원이 시작됐다. 1944년에는 국민징용령을 내려 더욱 강력하게 실시했다.

1942년부터 1945년 패전까지 몇 년 사이에 강제동원 조선인 규모는 그 이전의 3배 가까이로 증가했다.

동원 방식이 무엇이었든 간에 특히, 10대 어린 남녀 청소년들까지 무지막지하게 가둬 놓고 노예처럼 초착취했다는 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끔찍한 중노동에 시달리다 숱하게 다치거나 죽었다. 공습 당하기 일쑤인 공장에서 공포에 떨어야 했고, 결국 전쟁의 참화 속에 숨진 경우도 많았다. 여러 연구들은 강제동원 됐다가 사망한 사람의 수가 적어도 20만 명이 넘는다고 추정한다.

임금은 강제로 저축돼 실제로는 지급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좁고 열악한 방에서 지내며 항상 굶주림에 시달렸다.

확전과 총력전, 강제동원 본격화

일제의 강제동원이 본격화된 과정은 같은 시기에 일본과 미국 등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의 각축전이 태평양전쟁과 제2차세계대전으로 확대된 과정의 일부였다.

1930년대 세계적인 대불황이 터지자, 일본은 기존 식민지인 대만·조선과 중국 북부의 조계지를 발판 삼아 중국 본토로 더 깊숙이 진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방대한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영국·프랑스 등에 견줘 일본은 시장과 자원, 값싼 (식민지) 노동력 확보 등에서 불리한 처지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1931~1932년 만주를 침략해 수탈한 데 이어 4개월 동안 일본 국토의 3배에 달하는 중국 영토를 점령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그 과정에서 난징대학살도 저질렀다.

그러나 그런 잔학 행위에도 불구하고 중국 점령은 쉽게 끝나지 않는 장기전으로 이어졌다. 영토가 넓은 데다 중국 내에서 무장 저항이 계속됐던 것이다.

일본은 새로운 전쟁을 더 벌임으로써 교착 국면을 돌파하고자 했다. 석유·고무 등 중요한 전략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가 다음 목표가 됐다.

하지만 당시 동남아시아는 무주공산이 아니었다. 영국·프랑스·네덜란드·미국이 수많은 섬과 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의 전쟁 확대는 태평양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는 일이었다.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차지하자, 미국은 대(對)일본 석유·철강 금수 조처를 내리고 중국 대륙에서 완전 철수하라고 요구하며 압박했다. 이는 일본 입장에서는 그간의 제국 확장 기도 전체를 되돌리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일본 지배자들은 미국의 압박에 맞서 전쟁 자원을 더 확보하기 위해 침략 전쟁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41년 독소 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12월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해군기지를 기습 공격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석탄 채굴 등 자원 확보와 군수 물자 생산을 위한 노동력 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그러한 총력전 속에서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의 민중을 강제동원해 극한으로 쥐어짰던 것이다.

1945년 일본은 결국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전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세계대전으로 가장 고통받은 것은 그 전쟁을 결정했던 지배자들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전쟁터로 끌려가야 했던 패전국과 승전국의 민중이었다.

일본 천황과 A급 전범 지배자 대부분은 전후 냉전 구도 아래 일본을 소련·중국 견제 수단으로 재편하려 했던 미국의 필요에 적극 부응한 덕분에 처벌을 면하고 권력도 유지했다.

반면 전쟁 내내 대다수 일본 노동자들은 전선의 전방과 후방에서 죽고 다치고 집을 잃고 마른 걸레 쥐어짜듯 착취당했고, 패전 후에도 폐허가 된 땅 위에서 극심한 빈곤과 내핍을 강요당했다.

평범한 일본인 노동자들의 처지는 일본인 지배자들보다 조선인 노동자들과 훨씬 더 가까웠다. 그래서 1945년 패전 직후 일본에서의 첫 노동자 소요가 조선인과 중국인 광원들 사이에서 일어났을 때, 이 투쟁은 곧 일본인 광원들에게로 번졌다(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민음사, 2009.)

오늘날에도 한국과 일본의 노동계급은 군사적 동맹을 강화하고 있는 윤석열과 기시다 그리고 서방 제국주의에 맞설 같은 이해관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