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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1923~2023):
제국주의가 사랑한 전범이 죽다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전쟁에서부터 라틴아메리카와 그외 지역까지 유혈 낭자하게 피를 뿌린 헨리 키신저가 11월 29일 죽었다.

5월 27일 키신저 100세 생일에 즈음해 이사벨 링로즈가 쓴 살인자 키신저의 이력을 재게재한다.

도청과 폭격을 일삼은 전쟁광 ⓒ출처 US National Archives

혐오스러운 전쟁 범죄자 헨리 키신저가 곧 자신의 100세 생일을 경축할 것이다.

키신저의 긴 수명은 그에게 희생당한 이들의 수명과 대조된다. 희생자 대다수는 성년에 되기 전에 죽었다.

미국 국무장관을 지냈고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국가안보보좌관을 맡았던 키신저는 쿠데타, 살인, 폭격, 납치, 대량 학살에 관여했다.

1969년 키신저와 닉슨이 백악관에 입성했을 때, 미국은 정치적으로 붕괴 직전이었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은 베트남전에서 패배하고 있었고 국내의 전쟁에도 점점 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군대 징집과 끝없는 폭격 작전에 반대하는 반란이 급진적 변화 요구가 커지던 것과 결합됐다.

키신저의 임무는 미국 제국주의를 부흥시키는 것이었고, 그리하면 미국 거리에도 질서가 회복되리라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키신저는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었지만, 미국은 그가 끌어들인 전투에서 대부분 패배했다. 그로 인해 쇠락하는 제국이라는 인상만 가속화했다.

지옥

1960년대 초부터 미국은 베트남을 침략해 폭격하고 약탈했는데, 이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 자신의 장악력을 견고히 하려는 더 큰 구상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내 명백해진 사실은 미국이 지원한 괴뢰 정부가 대중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하고, 반대로 괴뢰 정부에 맞선 저항이 지지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베트남이 곪은 종기가 돼 가고 있었음에도 키신저와 닉슨은 군대를 철수하면 미국이 “나약해” 보일까 봐 두려웠다. 철수는커녕 키신저와 닉슨은 베트남의 이웃 국가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전쟁을 확대했다. 저항을 고립시키려는 것이었다.

작전명 “오퍼레이션 메뉴”의 캄보디아 전쟁 동안 미국은 여섯 개 지역에 각각 2만 5000발이 넘는 폭탄을 투하해 5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사망자 수는 더 많을 것이다.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는 1969년과 1970년 사이 있었던 3875회의 폭격을 매회 승인했다.

키신저는 미국 의회가 작전을 막을까 봐 염려해 폭격 작전을 의회에 비밀로 했다.

폭격 작전이 〈뉴욕 타임스〉 신문에 유출되자, 키신저는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에게 국가안보보장회의 전화를 도청해 누가 유출에 책임이 있는지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캄보디아 전쟁은 안 그래도 절망적으로 가난한 나라를 파괴했고, 미군 장성들은 자신들이 캄보디아를 폭격해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고 흡족해했다. 최소 60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죽은 뒤에야 미국이 지원하던 [캄보디아] 정부가 1975년 마침내 타도됐다.

이 잿더미 위에서 크메르 루즈가 권좌에 올랐다. 이어진 학살에서 크메르 루즈 정권은 최대 220만 명을 “계급의 적들”이라 지목하고 학살했다.

또한 키신저는 1972년 북베트남 융단 폭격의 배후였다.

총 17년의 전쟁으로 약 200만 명의 베트남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5만 8000명 이상의 미군 병사들이 사망했다. 전쟁 비용은 8436억 3000만 달러[약 1100조 원]였다.

1973년 회담으로 베트남전은 휴전했다. 그리고 키신저는 피에 흠뻑 젖은 살인마였음에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군부 쿠데타의 배후

라틴 아메리카는 키신저가 남긴 피비린내 나는 흔적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 또 다른 대륙이다. 1973년 칠레 군사 쿠데타는 미국이 다른 나라의 선거에 “개입”한 81번의 사례 중 하나였다.

칠레의 사회주의 대통령 후보 살바도르 아옌데는 36.2퍼센트를 얻어 1970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미국은 아옌데의 좌파적이고 쿠바에 우호적인 정치로 인해 공황 상태에 빠졌다.

키신저는 이렇게 말했다. “그 나라 국민들의 무책임함 때문에 한 나라가 공산화되고 있는데 왜 우리는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1973년 6월에 쿠데타가 한 차례 실패한 후, 군 총사령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9월에 다시 쿠데타를 시도했다. 피노체트는 대통령궁을 탱크, 헬리콥터, 보병으로 포위하고 포화를 퍼부었다. 아옌데는 싸우다가 죽었다. 그러나 그가 사살당했는지 자살했는지는 논란거리다.

미국이 지원한 군사 정권은 공포 정치를 시작했다. 군부는 칠레의 최대 축구 경기장을 수용소로 만들어 그들이 검거한 1만 2000명의 좌파들을 가뒀다. 군사 정권은 모두 합해 3만 명에 이르는 이들을 학살했고 더 많은 이들이 고문당하거나 망명해야 했다.

아옌데 정권이 전복됐다는 소식을 듣고 키신저는 미국의 역할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불평했다. 닉슨은 이렇게 답했다. “그래, 우리 역할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이 건에서는 우리의 손이 드러나지 않잖아.”

칠레 쿠데타는 “콘도르 작전”의 일환이었는데, 콘도르 작전은 1968년부터 1989년까지 남아메리카에서 암살, 쿠데타, 정보 공작 등의 정치 탄압을 자행한 억압 체제로 미국이 지원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974년에서 1983년 사이에 미국이 지원한 군사 정권이 좌파 정권을 축출하고 대중의 반대를 억압하기 위해 “더러운 전쟁”을 벌였다. 미국은 군사 정권에 5000만 달러[약 660억 원]의 군사 원조를 제공해 급진주의자들을 쓸어버리게 했다.

1976년 6월 키신저는 군사 정권에 대규모 탄압을 시작해도 좋다는 “청신호”를 보냈다. 키신저는 아르헨티나 외무장관 세사르 아우구스토 구세티에게 미국이 그들을 지지하지만 미국 의회가 다시 열리기 전에 “정상 절차로 복귀”하라고 말했다.

국가 테러 기간에 3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살해되거나 실종됐다.

대규모 총격이나, 약물로 납치해서 발가벗기고 반쯤 의식이 없는 상태로 대서양에 버리는 방식으로 암살이 자행됐다. 국가는 약 1만 2000명을 재판도 없이 투옥했고, 400개 이상의 비밀 수용소를 만들었다. 당시 죽은 사람들은 오늘날 “사라진 사람들”이라고 불린다.

파키스탄 전쟁

키신저와 닉슨은 아시아에도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미국은 파키스탄 군사 독재를 지지하고 1971년 이 정권이 당시 동파키스탄으로 알려져 있던 오늘날의 방글라데시에서 유혈 낭자한 작전을 벌이는 것을 지원했다.

당시 파키스탄은 동과 서로 갈라진 하나의 나라였다. 서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 군사 정권이 양쪽 영토 모두를 정치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지만 동파키스탄에서 저항하는 반란이 있었다.

벵골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의 국가를 운영하고 서파키스탄과 분리되길 원했다. 이슬라마바드의 군사 정권이 이들을 분쇄하려 했고 이는 동파키스탄에서 내전을 촉발했다.

미국은 서파키스탄 정권을 지지했는데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면 인도와 손을 잡을까 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인도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소련과 제휴하고 있었다.

파키스탄 군부는 폭격, 살인, 강간을 저지르며 동파키스탄을 유린했다. 그것은 벵골 독립투사들뿐 아니라 그들에게 동조하는 모든 이들을 쓸어버리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파키스탄 군인들의 손에는 미국산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키신저는 동파키스탄 주재 미 영사 아처 블러드가 보낸 첫 번째 전보를 무시했는데 블러드는 키신저에게 “선택적 대량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고 알렸다. 두 번째 전보가 다시 그것을 “대량 학살”이라고 묘사하자, 키신저는 블러드를 해고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 기간에 키신저는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를 “암캐”라고 불렀고 “인도인들은 개자식들이야”라고 말했다. 2005년 이 사실이 공개됐을 때, 키신저는 이제는 죽고 없는 전 대통령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닉슨에게 배운 것이었다.”

닉슨은 가도 키신저는 남아

닉슨과 키신저의 테러 통치는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다섯 명의 괴한들이 워싱턴에 있는 워터게이트 호텔의 민주당 전국위원회에 침입하다 붙잡혔다.

닉슨 재선위원회 구성원들이 전화에 도청 장치를 달려고 사무실에 잠입했었지만 도청에 실패했다. 그들은 나중에 새로운 마이크로 재시도를 했지만 전화에 도청 장치를 달고 문서를 훔치다 체포됐다.

닉슨은 자신은 스캔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맹세했고 1972년 11월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다. 닉슨은 괴한들에게 입막음 돈을 주고 CIA에게 이 사건 수사를 엄격히 단속하라고 지시했다.

괴한들은 재판에 회부돼 유죄를 인정했다. 그러나 한 사람 제임스 맥코드가 판사에게 편지를 써 백악관이 침입의 배후에 있다고 말했다.

상원위원회가 조사를 시작했고 닉슨의 백악관 집무실 대화가 모두 녹음된 사실을 발견했다. 닉슨은 녹음테이프를 넘겨주지 않으려다 결국 일부를 넘겨줬지만 많은 테이프가 누락되거나 훼손된 채였다. 1974년 여름 닉슨은 모든 테이프를 넘겨줘야 했다.

그때쯤 닉슨이 워터게이트 공작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고 그의 명령으로 전화가 불법 도청됐다는 것은 명백했다.

닉슨이 도청 사건 때문에 정신이 빼앗겨 있는 동안에도 키신저는 외교 정책에서 무제한적 자유를 누렸다.

키신저는 1976년 대선에서 공화당이 패배할 때까지 국무장관으로 살아남았고, 그때 이후로 미국 정부의 이라크, 이란, 우크라이나 정복 시도에 대해 조언해 왔다.

100세가 되는 키신저는 위대한 외교관이나 관리로 기억돼서는 안 된다.

키신저는 흉악한 미국 제국주의의 화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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