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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동독 노동자 반란 70년:
동유럽 스탈린주의 체제에 맞선 저항의 신호탄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1953년 6월 17일 동독에서 대규모 노동자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견고해 보이던 스탈린주의 체제의 균열을 보여 줬다. 또한 냉전이 끝날 때까지 동유럽에서 거듭 벌어진 노동자 반란과 저항의 시작을 알렸다.

이 반란은 소련 군대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됐지만, 3년 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벌어진 노동자 혁명으로 바통을 넘겼다. 그리고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 1980~1981년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 등 아래로부터 저항은 1989년 동유럽 스탈린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 되풀이됐다.

1953년 동독 노동자 반란은 동독 지배자들을 악몽처럼 따라다녔다. 1989년 10월 동독의 보안 경찰 슈타지(국가보안부)는 상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1953년 6월의 반혁명 상황에 처해 있다.” 다음달인 11월 베를린 장벽이 파괴되기 시작하자 공산당(SED) 관료 쿠르트 하거는 이렇게 말했다. “1953년보다 심각하다.”

대체 1953년 동독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1953년 6월 17일 브란덴부르크의 철강 노동자들이 행진을 벌이고 있다 ⓒ출처 Archiv der sozialen Demokratie

1953년 6월 15일 동베를린의 ‘스탈린 가로수 길’ 인근의 프리드리히샤 병원 건설 현장에서 노동자 수십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스탈린 가로수 길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사회주의적’ 건설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그 한가운데서 노동자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노동자들은 정부의 책임생산량 증가 조치에 항의하는 결의문을 작성해 정부에 보냈다.

다음 날인 16일, 파업 노동자들은 모두 정부청사까지 행진하기로 했다. 그들은 행진하며 다른 직장의 노동자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노동자들은 “작업복 차림으로 사방에서 달려나와 마치 쇳가루가 자석에 달라붙는 것처럼 시위대에 합류했다.” 청소노동자, 세금 징수원, 지나가는 전차 승객과 운전수까지 대열은 금방 불어났다. 건설 노동자들이 대중에게 불씨를 던졌고, 그 불씨는 커다란 불꽃으로 타올랐다.

대열이 커질수록 구호도 정치적으로 변했다. “정부는 퇴진하라,” “우리는 자유 선거를 원한다,” “우리는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싶다.”

정부청사 앞에 무려 1만 명이 모였다. 성난 노동자들 앞에 나타난 하급 공무원들은 책임생산량 증가 조치가 취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대다수는 자리를 지켰다. “울브리히트![당시 공산당 서기장] 그로테볼![당시 정부 총리]”라고 외치며, 시위대는 정부의 최고 지도자들이 직접 나오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가 거절되자 그 자리에서 즉시 총파업이 결의됐다. 노동자들은 다시 한 번 “총파업을 호소한다,” “베를린 사람들은 동참하자,”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곳곳을 행진했다. 밤새 라디오 방송과 화물 노동자들의 차량, 회사 전화 네트워크 등을 통해 반란 소식이 퍼졌다.

노동강도 강화에 반대하는 정부 청원은 순식간에 정부와의 정면 대결로 바뀌었다.

정면 대결

6월 17일 아침 집에서, 출근하면서, 직장에서, 그리고 노동자들이 만나는 곳 어디에서나 ‘베를린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논의됐고, 동독의 산업 도시 대부분에서 파업과 시위가 일어났다.

동독 내무부의 공식 보고에 따르더라도 약 50만 명이 반란에 가담했다. 최근의 연구는 100만~150만 명이 참가했다고 추산한다. 이는 당시 전체 동독 인구의 6~9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치다. 도시와 마을 700곳이 반란의 영향을 받았고, 1000여 개 일터에서 최소 50만 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17일 아침 파업 노동자들은 시내를 행진했고, 정권 퇴진, 자유 선거, 구속자 석방 등 정치적 구호를 외쳤다. 감옥을 습격해서 수감자를 석방시키고, 관공서에 불을 지르거나, 일부 관공서를 접수했다. 경찰서를 포함한 관공서 250곳 이상이 습격당하고, 수감시설 12곳에서 재소자 1400명 이상이 풀려났다.

이 모든 것이 매우 빠르게 전개됐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틀 동안 동독 지배자들은 완전히 마비됐다.

소련군 탱크만이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16일부터 이미 소련군 약 2만 5000명과 탱크 300대가 베를린으로 이동해 왔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17일 오후부터 계엄령이 선포됐다. 시위 금지령이 포고되고, 길거리에 3명만 모여 있으면 체포돼 재판에 회부되기 일쑤였으며, 야간엔 통행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노동자들은 화염병과 쇠파이프, 각목을 들고 격렬히 저항했다. 하지만 압도적 우위의 무장력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반란을 진압됐고, 반란 지도자들은 수감되거나 처형됐다. 60~100명이 경찰과 소련 군대의 발포에 의해 죽었다. 최소 20명이 즉결 처형됐고, 1만 2000~1만 5000명이 체포됐다.

하지만 크게 타오른 저항을 한 번에 진압할 수는 없었다. 여진은 7월까지도 계속됐다.

동독 정부는 경제적 요구들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책임생산량 증가 조치가 철회되고, 7월 초 최저임금이 인상되고, 생필품 가격 인하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나 탄압은 더 강화됐다. 반란에 동참한 공산당 SED의 당원들은 대대적으로 숙청됐다. 억압적인 법이 통과되고, 경찰력이 강화되고, 슈타지가 크게 강화됐으며, ‘공장 민병대’(정권에 충성하는 준군사 조직)가 설립됐다.

노동자들의 저항은 압도적 무력으로 진압됐지만 정부는 경제적 양보를 일부 해야 했다. 반란 진압에 투입된 소련군 탱크 ⓒ출처 Süddeutsche Zeitung Photo

노동자들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동독 정부의 공식적인 설명은 서방이 사주한 “제국주의적 책동”이자, “반혁명적인 파시스트의 국가 전복 음모”라는 것이었다. 체포된 시위 지도자 대다수가 평범한 노동자들이었지만, 정부는 이들이 서독, 또 나치와 연결돼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뒤늦게 서독 정부도 이 반란을 친서방적인 것으로 묘사했다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고 치켜세우고, 6월 17일을 국가 기념일인 ‘독일 통일의 날’로 제정했다.

하지만 반란이 진행 중이던 때 서독 정부는 아무 지원도 하지 않았다. 16일에 처음 파업이 일어난 후 서독 총리는 동독에서 누구든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 것”이며 사람들은 “위험한 행동을 멀리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게다가 반란 물결이 서베를린으로 넘어오는 것을 봉쇄하려고 서독 경찰이 국경선에 배치됐다.

소련 탱크가 베를린의 시위대를 공격했을 때 파업 지도자들은 서베를린 경찰서나 노동조합 본부로 달려가 무기 지원을 호소했지만 거절당했다.

반란의 진정한 원인은 첫째, 동독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 수준이었다. 1947년 냉전이 시작되자 동독 사회는 스탈린주의 노선에 따라 재편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건설 가속화라는 소련의 지령 아래 동독은 20년 전 소련과 마찬가지로 소비재 생산을 희생시키며 중공업에 자원을 집중하고, 농업을 강제 집산화했다.

불만을 가진 농민들은 서독으로 달아났다. 경작지의 10퍼센트가 방치돼 우유, 감자 등의 기본 농산물 생산량이 목표에 훨씬 못 미쳤다.

냉전의 최전선 국가로서 동독은 군대에 많은 인력과 재원을 투자했다. 15만 명을 군에 입대시켰고, 1952~1953년에만 국가 예산의 10퍼센트인 20억 마르크를 군사비에 투입했다. 이로 인해 노동인구가 부족했고, 정부는 긴축을 실시했다. 인구 대부분의 생활수준이 급격히 하락했다. 서독으로의 주민 이탈도 계속 증가했다.(베를린 장벽은 동독 정부가 주민 이탈을 막으려고 1961년에 세웠다.)

대중의 이런 생활수준 압박은 이후로도 여러 해 지속됐다.

지배 관료의 분열

1953년 노동자 반란을 촉발한 둘째 원인은 1953년 공공연히 나타난 동독 사회 상층부의 분열이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었다. 그러자, 25년간 그의 심복 노릇을 하던 자들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들은 서로 누군가가 모든 권력을 가로채 스탈린이 했던 것처럼 경쟁자들을 제거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다른 한편, 그들은 스탈린과 똑같은 방식으로 소련을 계속 통치할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계속된 숙청은 살아남은 관료들이 윗사람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만들었다. 최상층 지도부뿐 아니라 그 밑의 관료층도 숨 쉴 틈을 원했다.

소련과 동유럽의 대중은 비록 보안경찰의 활동으로 원자화돼 있었지만 대다수가 노동계급으로서 폭발적 잠재력을 지닌 세력이었다. 새 통치자들은 이제 그런 대중과 연결되는 다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소련 지배자들의 이런 필요는 1953~1964년의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처음에 누구도 분명한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서로 다른 처방과 상호 불신이 맞물려 끊임없이 갈등이 불거졌다. 당의 정책은 갈팡질팡했고, 인물들도 계속 교체됐다.

이런 상황은 소련의 위성국가인 동유럽 정권들에 더 증폭돼 나타났다. 동독 지도부는 그런 분열에 휘말린 첫 사례였다.

소련의 새 지도부는 6월 초 사회주의통일당(SED: 동독 공산당) 지도부를 모스크바로 소환해 산업화와 집산화 속도를 늦추라고 했다. 어제까지 밀어붙이던 정책이 갑자기 뒤집히자 대다수 관료들은 혼란스러워했다.

그런데 책임생산량 증가 조처는 그대로였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들의 불만을 크게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기존 정책의 급격한 수정은 변화에 대한 기대감을 부추겼다.

관료층 내부에서도 이 문제를 두고 서로 다른 견해를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동독 지배자들은 작업 기준을 놓고 벌어지는 집회나 토론을 막아야 할지 아니면 허용해야 할지 몰라 동요했다.

동유럽 — 국가자본주의 체제

앞에서 논술한 반란의 두 요인은 모두 동구권 사회 자체의 경제적·사회적 산물이었다. 즉, 반란의 원인과 동력은 국가자본주의 사회의 역학에 의해 발생한 것이었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노동자를 착취하고 인민을 억압하는 사회였다. 지배계급인 국가 관료가 사회의 다수를 착취하고, 이렇게 노동계급을 착취해 얻은 부의 최대한 몫을 미래의 생산과 착취를 위해 투자했다.

주로 서방과의 군사적(그리고 경제적) 경쟁 때문이었다. 국가 관료는 서방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해야 한다는 압박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이는 관료의 운신의 폭을 제약하고, 경제를 세계 경제의 리듬에 따라 위기의 늪으로 밀어넣으며, 강력한 사회변혁 잠재력을 지닌 노동계급을 만든다.

이런 점에서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불안정했고, 노동자들의 저항에 거듭 부닥쳤다.

이는 여느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핵심 특징이다. 자본주의는 나라마다 이런저런 특수한 외양(중앙 계획경제의 존재 여부, 정치 구조의 형태, 지배자들의 통치 이데올로기 등)을 띠지만, 모두 경쟁적 축적의 동력으로 움직인다.

이는 스탈린주의 체제가 무너진 오늘날 동유럽 국가들에서도 계속해서 경제 위기와 불평등, 대중 저항이 계속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의 본질적 성격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자본주의론은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을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오늘날 중국이나 북한을 이해하는 데서도 필수적이다.

이는 결국 우리가 무엇을 위해 투쟁할 것인가, 즉 사회주의란 무엇이고 어떻게 이룰 것인지 하는 물음과 관련돼 있다.

※ 더 읽을거리: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크리스 하먼, 갈무리) 제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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