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공격해서 대량 학살하고, 후티의 개입을 이유로 미국과 영국이 예멘을 폭격하고, 혹시 어쩌면 헤즈볼라도 참전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자 서구에서는 무슬림 공포증과 유대인 혐오도 더 두드러지고 있다.

그래서 이슬람과 종교 일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다소 늘고 있다.

그들을 위해 최일붕(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이 그가 과거에 쓴 소책자를 원용해서 새로 기사를 작성했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는 주로 이슬람의 사례를 들었다.


‘마르크스주의와 종교’ 하면 거의 누구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 말을 당시의 맥락과 앞뒤 문맥 속에서 봐야 한다. 아편은 오늘날 끔찍하고 무시무시하게 느껴지지만 마르크스 시대에는 합법이었을 뿐 아니라 저렴하고 가장 효과적인 진통제였다.

당시 노동계급 사람들에게는 아편이 종종 필요했다. 마르크스 자신도 종기 같은 피부병 때문에 자주 고생해, 아편을 자주 복용했다.

그러므로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현대식으로 옮기면 종교는 ‘대중의 타이레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마르크스 말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자:

“인간의 본질이 참된 실재를 획득하지 못했으므로 종교는 인간 본질의 환상적 현실화다. 그러므로 종교에 반대하는 투쟁은 간접적으로는, 그 영혼의 향기가 종교인 세계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종교의 고통은 현실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자 현실의 고통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다. 종교는 천대받는 사람들의 탄식이요, 몰인정한 세계의 인정이요,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종교는 대중의 아편이다. 행복에 대한 환상을 대중에게 주는 종교를 폐지한다는 것은, 대중의 현실 행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조건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고 대중에게 요구하는 것은 환상이 필요한 조건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종교와 그 후광인 현세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이 구절은 포이어바흐나 브루노 바우어 같은 마르크스 당시 계몽주의자들의 종교 비판을 염두에 두고 쓴 것임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계몽주의는 종교 지도자들이 대중을 속여 신앙을 갖게 만든다고 봤다. 종교 지도자들이 대중의 머릿속에 교리를 주입하고 대중이 그에 순응하므로 종교가 계속 존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들이 바로 계몽주의의 계승자들이다. 그래서 만약 마르크스가 오늘날 되살아나서 위의 말을 한다면, 그것은 도킨스와 히친스에게 일갈하는 것이라고 읽는 것이 마르크스의 말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계몽주의적 종교 비판에 반대해 마르크스는 종교를 경멸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설명하고 있다. 종교의 사회적 원인을 지적하고 있다.

대중은 왜 진통제를 원하는가? 통증이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역사유물론자였으므로 이 고통의 사회적 원인에 주목했다.

고통의 사회적 원인은 소외, 차별, 억압, 빈곤, 착취 등이다. 이런 조건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신앙에 기댄다.

꾸란을 읽는 소녀들. 마르크스는 종교를 경멸하고 비난한 것이 아니라 종교의 사회적 원인을 설명했다 ⓒPublic Domain

마르크스 종교 분석의 함의

마르크스의 말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 세 가지 점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종교의 호소력은 마르크스가 ‘소외’라고 부른 사회적 조건 때문이다.

둘째, 종교를 인위적으로 억압해선 안 된다.

셋째, 종교는 현실의 고통에 대한 항의다.

이를 차례차례 살펴보자. 첫째, 종교의 호소력은 소외 때문이다.

역사유물론의 요점은 인간의 의식이나 사상이나 관념 — 신 관념 자체를 포함해 — 이 인간의 사회적 조건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역사유물론에 따르면,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인간이 종교를 만든 것이라면, 종교를 분석하는 출발점은 하늘이 아니라 땅이 돼야 한다. 여기,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바로 종교 분석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인간이 종교를 만들었다는 것은 또한 여기, 땅에서는 소망과 갈망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인간이 꿈과 희망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둔다면 그것은 꿈과 희망이 현세에서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가 존재한다는 것은 소외의 징후인 것이다.

소외 때문에 사람들은 무력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확실성과 강력함, 통제력을 제공하는 듯한 믿음(가령 ‘신의 힘’, ‘신의 영원성’ 등)에 끌린다.

대중은 경쟁과 배제와 차별과 편견 등으로 점철된 사회에서 또한 위안을 갈구한다. 그리고 공동체 귀속감을 갈구하고 연대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 신앙은 어떤 면에서는 정의와 인간적인 관계에 대한 갈구를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부당하고 억울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종교에 끌릴 수가 있다.

그래서 종교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사람들의 염원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소외는 단지 기층 대중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다. 소외는 사회 상층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물론 그 영향의 정도는 훨씬 작지만, 영향을 미치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단지 기층 대중만이 종교에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 상층 사람들도 종교에 의지할 수 있다.

둘째, 종교를 인위적으로 억압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는 환상이 필요한 조건이 사라져야 비로소 종교도 사라질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소외와 차별, 억압이 사라질 때만 신앙도 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를 정치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되레 신앙을 굳게 지키는 효과만을 낸다. 프랑스 국가는 무슬림 여성이 공공 장소에서 히잡과 아바야 등 전통 복장 착용하는 것을 금지하기로 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사실 이슬람 경전 꾸란은 여성이 가슴 외에는 몸을 가리라고 전혀 지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통 복장 착용을 지역 관습에 맡겨 둔다. 무슬림 여성은 자기가 입고 싶은 대로 입을 자유와 권리를 이슬람 전통 안에서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프랑스 국가는 그런 일에 참견하고 드는가?

무슬림 여성 복장 문제에 대한 프랑스 좌파의 태도는 나쁘거나 기껏해야 애매모호했다. 그러나 사실 여성에 대한 무슬림들 자신의 견해는 결코 일률적이지 않다. 일부는 보수적이지만 다른 일부는 좌파적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신앙 생활의 자유, 특히 천대받는 종교 집단의 신앙의 권리를 옹호해야 한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국가는 종교에 간섭하지 말아야 하고 종교단체가 국가에 매여서도 안 된다. 그리고 누구든 자기가 좋아하는 종교는 어느 것이든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믿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무종교임을, 무신론자임을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사회주의자가 보통 그렇듯이 말이다.”

셋째, 종교는 현실의 고통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사회 모순들의 해결책을 피안으로 투사하기도 하지만, 또한 어떤 상황에서는 사회운동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이 점은 급진적 이슬람주의와 민중신학, 해방신학 등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또한 16세기 독일 농민 전쟁과 17세기 영국 혁명 같은 위대한 사회적 투쟁들이 지상에 신의 통치를 구현한다는 대의명분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됐다.

신앙인이 사회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의 신앙은 급진적 또는 진보적 신앙으로 바뀔 수 있다.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에 참가한 무슬림 여성들. 종교는 어떤 상황에서는 사회운동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미진

종교 사상의 다의성

이렇게 급진적 종교 운동이 성장하게 되면 기존의 보수적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을 빚게 된다.

대체로 종교 지도자들은 사회 상층 인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대중의 염원과 유대감 추구를 기존 체제를 정당화하는 사상과 섞어 희석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종교는 부당한 세계에 대한 반대와 동시에, 부당한 세계와의 화해도 함께 표현한다.

그리스도교의 사례로 신약성경 루가복음서 6, 20-25를 보면 이렇게 씌어 있다. “행복하여라, 당신들 가난한 사람들. 하나님 나라가 그대들 것이니. … 불행하여라, 부자들. 이미 위로를 받았으니!” 엄청난 계급 증오가 표현돼 있다. 그러나 똑같은 구절이 마태오복음서 5장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당신들 것이니.”라고 변형돼 있다. “마음이”라는 말을 슬쩍 끼워 넣은 것이다.

종교적 다의성의 사례를 이슬람에서 몇 개만 들자. 첫째, 이슬람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일단 대체로 이슬람은 신앙의 자유를 들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한다(꾸란 2:256, 109:6).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그들을 용서하고 간과할지니.”(2:109) “하나님과 내세를 믿고 선행을 행하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에게는 주님의 보상이 있을 것이며 그들에게는 두려움도 슬픔도 없을 것이라.”(2:62, 또한 5:69)

그럼에도 평화협정을 위반하면 그들에게는 이슬람을 강요해야 한다고 한다. 그들이 “투항해서 전쟁 배상금을 물 때까지는 그들과 싸워야 하고,”(9:29) “그들이 회개하고 신에게 기도하고 빈민 구제 세금을 내도록 만들어야 한다.”(9:5)

둘째, 무신론자에 대한 태도 문제다. 꾸란의 여러 구절에서 무신론자를 죽이거나 처벌하는 것은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신의 율법에 어긋난다며 그들에 대한 처벌은 신에게 맡겨 두라고 한다(가령 18:29). 반면, 꾸란의 어떤 곳에서는 신이 무신론자를 죽이라고 말한다(4:89).

물론 구약성경의 신명기가 우상숭배자를 “죽여야 한다”(13: 5, 9, 15 등과 17:5)고 강조함에도 다른 종교인을 살해하려 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이 없듯이, 무신론자를 살해하려 드는 무슬림은 현실에서는 없고 무슬림 공포증을 퍼뜨리는 인종차별적 문화 콘텐츠에서나 볼 수 있다.(1989년 이란의 당시 지도자 호메이니가 살만 루슈디에 대한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후자를 겨냥한 특수한 경우로 마녀사냥의 형태이다.)

셋째, 소위 “악의 문제”(무고한 사람들에게 사악하고 나쁜 일들이 닥치는 것을 말함)다. 전능하면서도 자비롭기 그지없는 신이라는 관념 자체가 문제된다. 이 문제를 어떤 학자는 이렇게 예시한다. “당신은 신이 사랑과 능력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머니를 위해 꽃 몇 송이를 손에 들고 집으로 걸어가던 어린 소녀가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여 즉사했고 신이 그것을 가로막지 않은 것에 대해 당신은 설명해야 한다.”

악을 발생케 했거나 악의 발생을 허용한 자가 신이라면, 그런 신은 자비로울 리가 없다. 반면 악을 발생시킨 게 인간이라면, 전능한 신은 인간이 자유 의지를 갖고 악을 행할 수 있음을 미리 알고 그걸 막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신은 실제로는 전지전능하지 않든가 아니면 전지전능하지만 미리 막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모순이 된다.

이 난제에 대해 (그리스도교처럼) 이슬람도 모순된 말을 한다. 가령 꾸란 4:78은 악이 신에게서 온다고 하는 반면 바로 뒤 구절인 4:79는 그렇지 않다고 부인한다.

악의 원천이 신 자신에게 있다는 믿음은 내세에서의 신의 심판과 정의를 갈망하며, 정치적 수동성을 조장하는 숙명론으로 이끌리기 쉬운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한다. 반면, 악의 원천이 인간 자신, 특히 인간 사회에 있다는 믿음은 사회 변화를 위한 행동을 할 태세가 돼 있는 사람들의 정서일 수 있다.

이스라엘 국가에 반대하는 유대인들 ⓒ출처 Neturei Karta

종교와 종파의 다양성

지금까지 봤듯이, 종교에는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다의성이 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사회 세력이나 정치 세력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희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의 다의성을 이용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종교는 종교대로 다의성 덕분에 상충하는 계급적 이익과 정치적 계획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지배 계급에게도 매력을 줄 수 있고, 천대받는 계급에게도 매력을 줄 수 있다.

같은 이유로 또한 똑같은 종교를 가진 두 집단이 서로 반목하고 적대하고 심지어 살육한 사례가 역사상 비일비재하다.

이처럼 종교는 어떤 맥락 속에,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그 상황에 어떻게 반응했느냐에 따라 색조가 달라진다.

무릇 종교의 다의성 때문에 종교와 종파는 매우 다양하다. 자기 신앙이야말로 ‘진정한’ 이슬람이라느니, ‘진정한’ 기독교(‘예수를 배반한 기독교’와 대비되는)라느니 하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경전이나 전통이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다양성에는 정치적 보수와 급진, 또 그 중간에 여러 스펙트럼이 있다. 보수 복음주의만이 개신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고, 바티칸만이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에도 급진적 경향과 보수적 경향이 모두 있다.

그러므로 종교를 싸잡아 매도하는 태도를 삼가야 한다. 이슬람 공포증이 그런 태도의 일종이고, 도킨스와 히친스 같은 현대판 계몽주의자들도 그렇다.

이슬람 공포증은 일종의 인종차별주의로, 이슬람이 민주주의, 인권, 여성 평등, 성소수자 평등 등 서구의 계몽주의적 가치들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견해다.

그런 견해에 따르면, 무슬림은 관용이 부족하고 폭력적이며, 이슬람에는 딱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워도 뭔가 후진적인 면이 있어서 자유주의적 가치들과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의 인종차별 반대는 무슬림 앞에서 멈춘다.

언론을 통해 퍼진 이슬람에 대한 잘못된 편견 하나는 무하마드의 얼굴을 그리는 게 이슬람에서 금지된 모욕 행위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꾸란 어디에도 그런 규정은 전혀 없다. 그저 수니 파의 일각에서만 그럴 뿐이다.

이집트 혁명 당시 독재자 무바라크에 맞서 손을 맞잡은 콥트(이집트 정교회) 신자와 무슬림 ⓒ출처 호쌈 엘하말라위

맺음말

마르크스주의자와 신앙인 사이에 차이가 없지 않다. 두 사람이 같은 편에서 투쟁을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의 고유한 방법, 특히 역사유물론이 핵심 차이점일 것이다.

신앙인이 마르크스주의의 정치 사상을 일부 받아들이더라도 역사유물론의 핵심, 즉 사상이 — 신 관념 자체도 — 사회의 물질적 조건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역사유물론은 사회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나 사회 변화를 위한 효과적 전략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반면, 역사유물론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처럼) 생명에 관한 형이상학적 교리에 기대면 낙태나 가족의 가치 등의 문제들을 놓고 보수적인 입장으로 기울기 쉽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자는 반제국주의적인 이슬람주의자 같은 급진적 신앙인들과 함께 투쟁해야 한다. 낙원을 갈망해서가 아니라 지상의 지옥을 분쇄하기 위해서.

역사유물론에 따르면, 사람들의 관념은 투쟁 속에서 변한다. 투쟁이 크고 성공적일수록 투쟁 참가자의 사상은 좌경화할 가능성이 커진다. 필자는 왜 레바논 사회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 질베르 아슈카르가 이슬람에는 그리스도교의 해방신학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세속주의를 조건처럼 내세우는 일부 프랑스 좌파(사회당계는 물론이고 가령 뤼뜨 우브리에르 같은 트로츠키 정설주의자들)가 그러듯이, 함께하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한 종류의 공동 활동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을 배제해선 안 된다.

팔레스타인인들과의 연대 운동에서처럼 우리는 이스라엘과 제국주의에 맞서 많은 무슬림들과 함께 싸울 수 있고, 아마도 더 나아가 자본주의에도 함께 맞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