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신간은 자본주의의 재난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혁명적 변화의 절실함을 역설한다고 앤 알렉산더는 평한다.

캘리니코스는 한국 EBS 〈위대한 수업〉 ‘알렉스 캘리니코스 〈자본주의, 사회주의, 재앙〉’ 편에 출연해 국내에서 높은 관심을 끌었다.


《재난의 시대 21세기》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이수현 옮김, 책갈피, 416쪽, 22000원

재앙과 재난을 다루는 뉴스는 그저 정상적 생활의 일부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금융 위기, 기상 이변, 팬데믹, 전쟁, 소요가 주마등처럼 우리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중요한 신간은 이런 상황을 “새로운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주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미래를 위한 투쟁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

그야말로 인간 사회의 운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캘리니코스는 주장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가차 없는 내적 논리가 인간 사회를 붕괴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체제와 대결하려면, 우리가 처한 곤경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파악해야 한다.

이 책은 설득력 있게 혁명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전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부 요소들을 파악한 여러 사상가들을 활용한다.

“재난의 시대 21세기”의 표면적 특징은 흔히 양극화 징후로 나타난다. 그중 하나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진영과, 신흥 강대국 중국이 있는 진영 사이의 긴장 고조다. 캘리니코스가 지적하듯이 이 균열은 오늘날 세계 정치의 가장 지배적인 특징이다.

나토가 우크라이나를 두고 러시아와 벌이는 대리전은 중요하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국제 무대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중국 지배계급의 야망을 꺾는 것이다.

미국 지배계급은 중국 지배계급과의 대결을 “민주주의”와 “독재”의 대결로 이데올로기적으로 포장하기를 좋아한다.

양극화

하지만 세계 정치의 더 중요한 균열은 되살아난 극우와, 그보다는 미약한 왼쪽으로의 급진화 추세 사이의 양극화다.

지난 몇 년 동안 [극]우파의 영향력이 극적으로 증대했다. 캘리니코스는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분노가 누적된 결과이고, 세계 금융 위기로 인한 경제적 고통과 혼란이 그 분노를 더 강렬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유럽에서 이것은, 보수 정치인들이 극우파 활동가들과 연합해서 체제의 실패에 대한 분노를 난민들에게 돌리는 인종차별 공세로 표현됐다.

그런 전략은 “드러내는 동시에 억누른다”고 캘리니코스는 묘사한다. 즉, 평범한 사람들의 진정한 불만을 포착해서, 그들을 고통에 빠뜨린 진짜 장본인들(사회의 최고 부자들)이 아닌 엉뚱한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 분노를 터뜨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가장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경제·정치·이데올로기 위기의 압력이 결합돼 안에서부터 썩고 있다.

이 부패 과정이 너무나 진척된 나머지, 이제 우리는 미국이 “선진 자본주의 세계의 약한 고리”가 됐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캘리니코스는 강조한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이고, 군사력과 금융 역량 면에서 미국 다음가는 국가들을 큰 격차로 앞서 있다. 그럼에도 미국은 여전히 “선진 자본주의 세계의 약한 고리”일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는 깡패들의 잡다한 무리가 대통령직에서 내려온 트럼프의 부추김을 받아서 국회의사당을 습격한 것은 미국 내의 폭발적 긴장이 공공연히 분출한 가장 두드러진 사례였다. 캘리니코스가 지적하듯이, 트럼프의 제멋대로인 행동은 주요 미국 지배계급 인사들과 미군 수뇌부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특히, 미군 수뇌부는 2021년 1월 6일 트럼프의 쿠데타를 성공시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내팽개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트럼프의 터무니없는 행동에 움찔한 바로 그 최고 경영자들과 군 장성들이 관장하는 정치·경제 체제가 애초에 트럼프의 집권을 낳았다.

이런 과정은 공화당 내부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다고 캘리니코스는 지적한다. 극우파는 공화당 안으로 파고들어 가서 둥지를 틀었고, 점점 더 자신감 있게 지방정부 수준에서 지도력을 확립했다.

예컨대,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과 그 여파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하원의원의 절반 이상이 대선 결과와 평화적 정권 이양에 대한 문제 제기를 지지했다.

트럼프의 부상은 여러 위기의 압력이 결합돼 미국이 내부에서부터 썩고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출처 Tyler Merbler (플리커)

폭주하는 기차

세계 경제 체제의 중심에 있는 강대국이 부패하고 있다면, 그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는 국가들, 특히 중국은 어떤가?

캘리니코스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중국이 미국의 대안이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미국 경제의 근저에 있는 것과 똑같은 논리가 중국에서도 작동하고 있다.

지금 인류가 직면한 위기는 단지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기다. 사회의 붕괴를 향해 계속 돌진할 것인가 아니면 벼랑 끝으로 폭주하는 기차의 “비상 브레이크를 당길 것인가” 하는 선택이 인류 앞에 놓여 있다.

캘리니코스는 우리가 현재의 곤경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은 파멸로 돌진하는 체제에 맞선 반란과 혁명뿐이라고 주장한다.

주류 평론가들이 “다중 위기”라고 즐겨 부르는 것의 뿌리는 자본주의의 내적 논리에 있다. 이 “다중 위기”는 섬뜩한 회전목마처럼 돌고 있는 종말론적 사건과 과정들, 예컨대 전염병, 홍수, 산불, 기근, 경제 위기, 전쟁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두 측면이 상호작용하면서, 인류와 (지구를 인류와 공유하는) 수많은 다른 생물 종에게 끔찍한 결과를 낳고 있다.

첫째 측면은 자본주의 자체의 본질적 특징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중심에 있는 두 적대 관계, 즉 임금노동 대 자본의 적대 관계와, 경쟁하는 개별 자본들 사이의 적대 관계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둘째 측면은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과 너무 오랫동안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첫째 측면과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는 것인데, 바로 자본 축적 과정이 화석연료에 의존해서 추동된다는 것이다.

캘리니코스가 강조하듯이, 자본주의 체제는 단기적으로 수익성을 극대화하고 비용을 최소화하라는 압력을 자본에 가한다. 이런 압력은 기업주들로 하여금 자신이 “노동자와 소비자, 더 나아가 광범한 사회적·물리적 환경에” 끼칠지도 모르는 피해를 “무시하거나 은폐”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의 지배자들은 지구 온난화가 악화하고 있는데도 자신들이 일으킨 전 지구적 위기를 멈출 수 없다.

전 세계 지배계급 가운데 일부는 뒤늦게 위험을 깨닫고 있다. 그러나 체제의 논리가 그들을 재난으로 떠민다. 그래서 그들은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이미 벌어지고 있는 재앙에 “적응”하려는 미온적 노력에 그칠 수밖에 없다.

계속되는 기후 재난은 화석연료와 자본 축적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거듭 드러냈다 ⓒ출처 Mike Lewelling/ National Park Service

희망

이런 때에 미래를 모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캘리니코스의 책에는 냉철한 분석과 통렬한 비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필수적 원천도 있다. 캘리니코스는 아래로부터 대중 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한 주요 전장으로 젠더나 인종에 따른 차별에 맞서는 운동들을 지목한다.

그러나 이런 투쟁들은 차별의 구체적 형태들이 심층적인 역사적 과정에 의해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에 뿌리박고 있다는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예컨대, 가족 구조와 그것이 만들어 내는 이분법적 젠더 관계를 보자.

이런 “가족 구조는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서 핵심적 구실을 한다. 그러면서 그 가족 구조는 젠더에 따라 분열된, 그리고 그 구조가 낳은 다양한 차별에 따라 분열된 노동력을 자본주의에 공급한다.”

인종차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종차별이 부분적으로는 역사적 범죄, 특히 서구 자본주의가 형성될 때 아프리카인들을 대거 노예로 만든 과정의 해악적 유산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종차별을 온전하게 이해하거나 인종차별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없다.

그러므로 차별이라는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지 도덕적 태도 문제가 아니라 자기 이익과 실천적 필요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 노동계급의 집단적 주체성을 강화하는 노력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런 주체성을 다시 형성하려면, 기후 붕괴의 시대에 “비상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 단지 파업과 항의 시위, 시민 불복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 장악과 혁명을 뜻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를 모두 죽이고 있는 “이산화탄소 배출 체제”를 멈추고 해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혁명뿐이다. 그런 혁명이 일어나려면 우리가 재난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것은 반란과 혁명의 시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런 시대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발전시킨 자기 조직의 형태로 새로운 사회의 토대를 놓을 수 있다.

기후 위기와 온갖 차별에 맞서려면 노동계급의 집단적 주체성을 강화해야 한다 ⓒ출처 가이 스몰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