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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전쟁과 평화》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사이드 외, 삼인

승녕

“저는 고아입니다 … 어쩜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죠. 배고픈 건 싫어요. 그게 지금 내 운명이지만요. 음식을 주시든지, 폭탄을 주시든지, 어쨌거나 저는 기다릴게요.”- 딜라와르 칸, 8세의 아프카니스탄 소년이 부시에게 보내는 편지 (뒷표지에서)9.11 테러 이후 미국은 자신이 그 동안 저질러 왔던 만행과 한 치의 차이도 없는 끔찍한 전쟁을 감행했다. 많은 사람들은 테러의 끔찍함도 느꼈지만, 그 이상으로 보복 전쟁의 끔찍함을 느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의문을 품게 됐다. 테러 사건의 배경부터 미국의 위선 그리고 이슬람 문명에 이르기까지 많은 궁금증들이 쏟아졌다. 《전쟁과 평화》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다양한 쟁점들에 대해 국내외 저명한 지식인들이 쓴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이 책은 9·11 테러의 원인을 단순히 이슬람 과격파에게 돌리지 않고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찾는다. 미국의 저명한 좌파 지식인 노엄 촘스키는 수만 명의 민중이 학살당한 니카라과 등의 예를 들면서 미국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아룬다티 로이라는 인도의 가정 주부 소설가는 미국이 저지른 전쟁(큰 전쟁만을)의 이름만 나열하는 데 한 문단을 써야 했다. 《오리엔탈리즘》의 작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미국이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는 이스라엘에게 지금까지 9백20억 달러를 지원한 것을 폭로한다. 쿠리타 요시로는 오이디푸스가 국가 재난의 근원을 찾으라는 명을 내렸는데 그것이 알고 보니 오이디푸스 자신이었다는 신화를 언급하며 미국이 이와 똑같다고 말한다.

서방의 위선

미국 지배자들은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에게 식량을 지원해 준다며 이 전쟁이 ‘인도주의적’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지만 파키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구호 식량 운송을 중단시킨 당사자가 미국 정부였다. 그 때문에 식량공급이 반으로 줄어들어 난민 7백5십만 명 중 3∼4백만 명은 굶어 죽게 될 운명에 놓이게 됐다. 미국은 탈레반을 비난하고 있지만, 80년대 소련이 중동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 직간접적으로 이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해 온 당사자다. 그리고 지원에 사용된 자금은 그들이 비난했던 마약에서 나왔다. 마약이 거의 생산되지 않던 아프가니스탄은 CIA의 개입이 있고나서 갑자기 세계 마약 거래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언론들은 미국 정부와 결탁해서 이슬람을 악마화하는 데 열을 올렸다. 언론은 테러 다음 날 팔레스타인 민중들이 테러를 환호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비디오는 조작이라고 밝혀졌다. 오히려 팔레스타인 사람들 대다수는 테러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테러 3일 후인 9월 14일에는 밤샘 촛불 행진까지 하면서 테러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 주었다. 하지만 CNN 이나 ‘세계에서 가장 공정하다’고 하는 BBC는 이런 사실을 간단히 무시했다.

미국과 많은 서방 정부들(김대중 정부도 포함해서)은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반동적인 국내 조치들을 취해 왔다. 미국은 ‘S 1510’이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테러 방지를 명목으로 정보 기관과 경찰이 일반 시민을 마음대로 감시할 수 있게 했다. 이 법에 따르면 정치적 저항과 테러는 똑같은 행위다. 그리고 부시는 테러 방지를 핑계 삼아 복지 예산을 삭감하고 국방비를 증액했다. 미국의 전쟁 비용의 상당액은 삭감된 복지 예산에서 나온 것이다.

아쉬움

이 책의 통쾌한 폭로들은 훌륭하지만, 대안은 아쉬움이 남는다. 대중적인 반전 운동이 진정으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은 거의 하지 않는다. 특히 노엄 촘스키는 미국에게 아프가니스탄에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정책을 펴라고 요구하면서, 이것은 유엔이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 미국이 나서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전쟁의 진실과 이번 전쟁이 제기하는 여러 가지 논점들에 대해 빠짐없이 다루고 있다.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위선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잊지 않고 있다. 위에 소개된 것 이외에 이 책은 이슬람이나 북미관계 등 우리가 부딪힐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거의 다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섬멸되어야 하는 것은 전쟁이다.”

《문답으로 읽는 일본교과서 역사왜곡》 일본교과서 바로잡기 운동본부, 역사비평사

이원재

일본 정부는 미국의 보복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여섯 척의 함대와 1천5백 명의 자위대를 파병했다. 일본 정부는 이참에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다. 《문답으로 읽는 일본교과서 역사왜곡》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반대해 우리 나라와 일본에서 벌어진 운동을 평가한 책이다. 역사 교과서 왜곡 반대 운동의 여러 쟁점을 한일 양국의 전문가 16명이 쓴 짧은 글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은 한국에서 벌어진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반대 운동을 중심으로 평가하면서 일본의 사회 우경화의 배경과 교과서 왜곡의 문제점, 일본 우익의 역사 등 다양한 쟁점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올 한 해 동안 우리 나라에서 벌어졌던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반대 운동이 이전 역사 왜곡 반대 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평가한다.

“1982년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서술 내용이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던 첫해였다. 한국 언론들이 연일 일본의 역사 왜곡 내용과 한국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기사를 1면에 게재하면서 국민 감정도 격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9월 27일에는 정부의 안이한 대응과 군사 독재 정권의 반민족성을 폭로하며 1만 명의 학생들이 종로 일대에서 가두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국내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언론을 통해 더이상 분노와 감정만으로는 일본과 싸워 이길 수 없다며 ‘극일’문제를 제기했다.” 정부는 언론을 동원해 ‘국민 한 사람이 독립기념관에 벽돌 한 개씩을’ 쌓아 독립기념관을 만들자는 독립기념관 범국민 운동을 펼쳤다. 당시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에 반대하는 운동은 민족사관을 기반했고 초기 운동을 주도한 보수 언론과 관변단체는 정부 정책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올해 있었던 운동은 “폭넓은 시민단체들 간의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연대와 일본 내 진보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아시아 연대의 가능성을 열었으며 일회성 투쟁이나 반일감정으로 흐를 수 있는 운동 방향을 일본의 우경화와 군사 대국화, 역사 왜곡 문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고조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또한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는 학계와 현직 교사들 사이에서만 논의되던 국사 교육 문제를 공론화했다. “국정 교과서 제도가 갖는 가장 큰 문제는 역사 해석의 국가 독점이다. 국사 교과서가 한낱 정권의 통치 이념을 전달하고 재생산하는 도구로 전락됐다. 그러다보니 국사 교과서가 이념적 편향을 보이고 있어 집권 세력이 된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주었으며 해방공간에서의 좌익과 사회주의자들의 독립 운동에 대해서는 역사로 가르치지 않고 있어 근현대사에 대한 부실로 이어지고 있다.” 이 밖에도 1990년대 일본에서 있었던 교과서 반대 운동 과정을 설명한다. 2차대전 이후 이처럼 많은 집회가 단기간에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며, 이 같은 성공은 그 동안 성장해 온 풀뿌리 민주주의의 승리로 평가한다. 또한 독일에서 나찌 잔재 청산이 가능했던 것은 “서독 재무장, 전몰장병 추모일 제정, 베트남 참전 문제에 전후세대가 투쟁”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문답으로 읽는 일본교과서 왜곡》은 깊이 있는 분석이나 구체적인 대안 지적이 부족하고 왜곡된 역사교과서 반대 운동의 성과만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이 책에 실린 각종 자료들과 정보들은 이 운동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키신저 재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아침이슬

김정숙

‘두 궤도 정책’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행성이 타원 궤도를 그리며 태양을 공전한다는 케플러의 법칙을 떠올리거나 미국의 우주 전략을 연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둘 다 아니다. ‘두 궤도 정책’은 미국이 칠레의 좌파 정권인 아옌데를 전복하기 위한 군사 쿠데타를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72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 헨리 키신저는 베트남 전쟁을 1968년에서 4년이나 지연시켜서, 베트남에서 끝날 전쟁을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하고 무고한 민간인 1백만 명을 살해했다. 방글라데시(당시 동파키스탄)의 학살극으로 수백만 명이 죽고, 인도네시아군이 동티모르를 침공해서 20만 명을 죽였다. 1974년 키프로스에서 그리스 군사정권의 사주를 받은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칠레에서 키프로스까지 비극의 희생자는 무고한 민중들이었다. 역겨운 이 일의 배후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키신저가 존재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쓴 〈키신저 재판〉은 1970년대 초반 세계에서 일어났던 전쟁 범죄, 학살, 암살, 납치에 연루돼 있는 키신저의 범행에 대한 ‘기소장’이다. 따라서 전범인 그를 국제재판소에 세우지 못한다면, 전쟁 범죄나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어떤 독재자도 법정에 세울 수 없다는 것이 이 글의 중심 주제다. 한편 우리는 라덴을 법정에 세우기 위해 그가 은신하는 동굴에 독가스까지 살포하겠다는 미국을 떠올리며 묻게 된다. 왜 미국은 진정한 테러리스트인 키신저는 내버려 두고, 라덴에게만 법의 심판을 강요하는 것일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키신저가 왜곡한 진실과 학살의 무게와 라덴의 죄 중 어느 쪽이 더 무겁고 누가 전범재판소에 서야 할 장본인인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베트남전의 비극

미국이 개입하여 수백만 명이 죽은 베트남 전쟁은 1968년 남·북 베트남 협상으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닉슨을 밀고 있었던 키신저가 남베트남에게 민주당 정부보다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평화협상은 결렬됐다. 닉슨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정치 포커판의 히든 카드로 전쟁은 4년 연장된 것이다. 그 결과 1961년부터 시작된 이 전쟁으로 죽은 사상자보다 더 많은 시체와 이들 가족의 원한이 켜켜이 쌓였다. 물론 이 전쟁의 수혜자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닉슨과 보잘것없는 학자에서 막강한 권력자로 변신한 키신저였다. 게다가 키신저는 협상 지연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베트남 평화에 기여했다고 노벨상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4년 동안 죄 없는 민간인에게 폭탄이 4백50만 톤 투하됐다. 제2차세계대전 내내 투하된 폭탄을 모두 합해도 2백4만 4천 톤밖에 되지 않았다. 경악할 만한 일은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 프로그램의 암호명이 ‘아침’, ‘점심’, ‘저녁’이었다. 키신저와 미국 군대는 캄보디아인의 떨어져 나간 살점과 그들의 뜨거운 피로 살생의 식탁을 차렸던 것이다.

키신저의 위선

피의 학살이 있으면 그 뒤에는 꼭 키신저가 있었다. 이 역사적 명제를 증명해 주는 것이 동파키스탄, 동티모르, 칠레의 비극이다. 1971년 동파키스탄 선거에서 아와미 동맹이 압승하자 군사 정권은 국회소집을 연기했다. 서파키스탄의 야햐 칸 장군은 이에 항의하는 수많은 동파키스탄인들을 학살하거나 난민으로 만들었다. 닉슨과 키신저는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신중하고 빈틈없이 행동해 주어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후 키신저는 살인자 야햐 칸이 주선한 중국 초청장을 받았다. 결국 키신저와 중국의 비밀스러운 접촉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이다. 1975년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했고 그 뒤에 는 포드와 키신저가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침공에 맞선 동티모르인들이 침공 당일에만 10만 명이 미국 마크가 새겨진 무기에 죽었다. 그런데 미국은 폭력 사용을 우려하며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0년이 흐른 뒤 한 동티모르인이 그 날 무엇을 했느냐고 질문하자 키신저는 세계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느라 동티모르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학살을 승인하고 그 대가로 무기를 팔아먹는 악순환의 고리를 칠레에서 볼 수 있다. 키신저는 민주주의를 경멸하는 유명한 표현으로 단순히 “국민들이 무책임”하다고 해서 특정 국가들을 “마르크스주의 국가가 되도록” 놓아두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칠레에서 아옌데 정권의 등장은 칠레와 미국의 다국적 기업에게는 재앙이었다. 아옌데의 집권을 막기 위한 쿠테타가 필요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졌다. 칠레군 참모총장 슈나이더가 군부의 선거 개입을 반대한 것이다. 결국 슈나이더는 납치돼 살해당했고, 아옌데도 비명횡사했다. 결국 미국은 국가가 지원하는 테러리즘의 선례를 칠레에서 남겼다. 슈나이더를 죽이기 위해 칠레의 군인들에게 지원한 돈과 무기가 바로 그것이다. 아옌데 사망 후 피노체트 정권이 등장하자 미국은 식량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칠레 쿠테타를 위해 미국이 치른 비용은 칠레의 무기 구입으로 깔끔하게 청산되는 것이다. 그 뒤 미국은 반체제 인사들을 납치·고문·살해하는‘콘도르 계획’을 실행했다. 그러나 키신저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실제 상황을 잘 몰랐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그는 1969∼76년에 ‘위원회 40’의 의장직을 맡았는데, 이 ‘위원회 40’은 미국 대외정책을 총감독했다. 법의 공소시효에 예외가 있다면 키신저 같은 악랄한 자를 법정에 세우기 위한 것이다.

키신저를 법정으로

남미 국가의 독재정권이 몰락한 뒤 키신저의‘복사본’들이 재판을 받거나 감옥에 가 있다. 하지만 전범의 ‘원본’인 키신저는 법의 심판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피노체트의 죄는 공산주의로 치닫는 정부를 전복한 것이며, 자신은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한 책임감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키신저는 국제 및 국내 테러리즘을 가장 많이 승인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미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테러범을 지지하고 지원하고 고무하는 자들은 테러범들과 똑같은 죄인이다” 라는 키신저의 말은 위선의 극치다. 키신저의 잔악 행위들은 30년 뒤에 문서를 공개하는 ‘정보공개법’으로 속속 폭로되고 있다. 권력자의 놀이로서의 전쟁에 희생당한 자들이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하며, 키신저를 법정으로 세우자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1971년 ‘뉘른베르크’ 원칙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에 관여한 미국 정치가와 관료는 전범 재판소에 세울 수 있다. 미국도 그 효력을 인정하고 있다. 키신저는 자신이 죽은 뒤 5년이 될 때까지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 자신의 자료를 국회도서관에 기증했다. 하지만 미국의 비정부기구들이 키신저 사료를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칠레의 슈나이더 장군 유족도 키신저를 기소하려 하고 있으며, 수하르토 독재가 타도된 뒤에 동티모르의 집단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수백만 명을 억울하게 죽게 만든 키신저를 법정에 세우지 못하는 미국의 현실은 법 앞의 평등과 천부인권이라는 헌법과 수정조항이 죽어버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걸핏하면 다른 나라의 인권을 문제삼는 미국의 정당성도 훼손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무고한 난민을 죽이는 행위는 키신저가 개입한 칠레, 동티모르, 베트남의 비극이 재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현재 권력의 최음제에 취해 사는 그에게 권력의 대가가 비싸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82세의 피노체트도 법정에 섰던 것처럼 그도 피고석에 서도록 그가 제발 장수하기를 바란다. 현재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지하는 것은 애국, 그것에 비판적인 것은 매국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댄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대외정책의 상징적 인물인 키신저를 법정에 세우는 것은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거짓을 비틀어서 진실인 양 행세한 인간에게 죄값이라는 계산서를 언제가는 꼭 보낸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키신저 재판〉은 몇 명을 죽이면 살인이 되지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라는 현실이 정당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 책은 키신저가 미·소 데탕트와 미·중 수교를 이뤄낸 외교전략가라는 세간의 평판을 깨고, 그의 본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히친스는 키신저의 공범들이 죄를 받고 있는데, 혼자서 그가 벌을 받고 있지 않는 것은 “법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만 강한 거미줄과 같다”는 고대 철학자 아나카르시스의 경구가 현실에 적용된 사례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1990년 이전에는 좌파로 활동하다가 우경화했고, 제2차 걸프전에 지지를 보냈던 자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그는 키신저가 베트남 전쟁에서 죽인 수백만 베트남인들보다 미국에서 테러로 죽은 2만 5천 명을 더 크게 부각시킨다. 그는 미국인이 죽었다는 사실 앞에서 지식인으로서 요구되는 객관성을 잃고 있다. 그는 키신저가 베트남 전쟁을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한 것을 미국 공화국 역사상 가장 사악한 행위라며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기소장에서 이 사건은 중심적이지 않다. 현재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덕분에 지식인의 자기검열이 심해진 이 상황에서(그의 책이 미국에서 나온 것은 2001년 1월이고, 우리에게 소개된 것은 12월이다) 미국 개입 정책의 정점에 서 있는 키신저를 글로 고발한 히친스가 행동으로도 그를 고발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부유한 노예》 로버트 라이시, 김영사

조박은정

“부유한 노예? 어떻게 노예가 부유할 수 있어?” 이 책 제목을 본 한 후배의 말이다. 저자는 신경제가 가져다 준 각종 혜택으로 부자가 됐으면서도 더 불안해하며, 더 오래, 더 열심히 일의 노예가 되어 살지 않으면 안 되는 (대체로 중산층인) 사람들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 그러나 ‘부유하다’는 말은 라이시가 인정하듯이 논쟁의 여지가 있다. 미국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 전과 비슷하게 살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일부의 삶은 오히려 더 악화됐다. 이 책의 원제는 ‘The Future of Success’ 즉, ‘성공의 미래’이다. 원제만 보면 서점가에서 유행하는 흔한 처세술 또는 성공 비결 ― 예컨대,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 같은 ― 에 관한 책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법도 하다. 상업적으로 꽤 성공을 거두어온 대형 출판사 김영사는 이 책을 출판하면서 제목을 ‘부유한 노예’로 바꿔 달았다. 또 번역하면서 노동자를 모두 근로자라는 말로 고쳤다. 또, 중산층이라고 번역된 말은 정확히 어떤 사회 계층을 뜻하는지 다소 혼란스럽다. 어쨌든, 이 책이 10월 말에 나와 벌써 3쇄를 찍었으니,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듯하다. 이 책의 저자 로버트 라이시는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절친한 친구이자, 클린턴 정부의 초대 노동부 장관이었고, 그 후 하버드 대학 교수를 지낸 미국 상류 계급 사람이다. 이런 경력에 비추어 보면 자연스럽게 이 사람에게 ‘진보적 경제학자’라는 책 표지에 나온 수식어가 어울리는지 의심이 갈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읽어볼 만하다. 이 책은 미국의 신경제가 미국 사람들의 삶 전반에 미친 다양한 결과들에 관한 대중적인 사회학 보고서다. 정확한 최신 통계도 풍부하게 제시해, 미국 사람들의 구체적 삶을 들여다보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로버트 라이시의 통찰력은 놀랍다. 로버트 라시이는 책 몇 군데에서 미국 신경제가 가져온 모습이 산업 자본주의 초기 현상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한다. 심각한 빈부 격차로 부유한 사람들의 천국 같은 삶과 빈민들의 지옥 같은 삶의 대조, 8시간 노동제가 무의미할 정도로 긴 노동 시간, 과중한 업무 때문에 가족이 해체되어 가는 현상 등. 때때로 이 책은 엥겔스의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와 비슷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로버트 라이시가 묘사한 현실은 우리 나라에서도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다. 가장 우익적인 지배자조차 사회 불안을 근심할 정도로 너무나 커진 빈부 격차, 부의 소유 정도에 따라 혜택이 달라지는 민간 의료 보험 제도, 부자들의 완벽한 학교와 가난한 사람들의 똥통 학교로 나뉘어질 자립형 사립고 추진 시도 등.

그러나, 이 책의 약점도 만만치 않다. 신경제의 빛과 그늘 중, 빛 부분을 설명하는 장의 대부분은 신경제와 세계화 예찬자들이 흔히 하는 얘기와 그다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신경제 이전과 이후의 고용 형태의 변화에 대한 설명과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드는 압력들에 대한 분석은 미국 노동자들의 현실에 관한 빼어난 보고서다. 한편, 은근한 암시로 사실상 미국식 ‘정실’자본주의를 통쾌하게 폭로한 것, 신경제가 불러온 가족의 변화에 관한 탁월한 분석, 첨예한 계급적 구분이 주거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는 현실은 매우 흥미롭다. 지금 열거한 것들이 이 책의 진정한 가치이며 미국 계급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은 여느 마르크스주의자의 눈보다 예리하다. 비록 라이시는 이 책 곳곳에서 세계화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좌파를 국수주의적 극우파들과 암암리에 동일시하며 좌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지만, 미국 계급 사회의 현실에 대한 그의 분석은 누구보다 좌파적이다. 그러나 진실을 직시하는 것과 올바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발자크가 그의 소설에서 프랑스 계급 사회에 대해 누구보다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줬지만 그 자신은 왕당파였던 것과 마찬가지다. 로버트 라이시가 대안을 제시한 “사회의 선택”을 보면 공감할 수 있는 많은 제안들이 나온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조금 거두어 빈곤층의 의료, 교육, 주택 지원을 위한 재정을 마련해야 한다든가, 국제 금융 자본의 거래에 조금의 과세(아마도 토빈세 같은)를 해야 한다든가 하는 것이다(‘조금’이 강조된 이유는 라이시의 제안에 따르면 반드시 조금이어야 하기 때문).

그런데 라이시는 왜 자신이 노동부 장관이었을 때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까? 그는 우리 모두가 그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우리에게 공범 의식을 주입한다. 그래서 이 책 서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그것을 원하고 있을까? 그것이 문제다.” 그런데 라이시가 말한 ‘우리’는 아무리 봐도 미국 지배 계급이다. 라이시는 상류층의 도덕적 각성을 바라고 있다. 라이시의 문제 제기와 대안을 따라가다 보면 두 사람의 그림자가 그 위에 아른거린다. 하나는 공상적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다. 그는 착취를 최소화할 수 있는 공장에 관한 비전을 신문 광고에 내고 까페에 앉아 이에 관심있는 부르주아지가 나타나기를 평생 기다리다 죽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경제학자 케인스이다. 케인스는 누구보다 분명하게 자본주의의 비밀 ― 공황을 피할 수 없는 치명적 결함 ― 을 눈치챘지만 부르주아지와 한편이라는 자신의 계급적 한계 때문에 자본주의의 결함을 잠시 봉합하는 데 그치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계급 사회의 현실에 대한 로버트 라이시의 리포트는 훌륭하다. 그러나 대안은 보잘것 없다. 무엇보다 그는 이 보잘것 없는 대안조차 오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만들어진 고대》 이성시, 삼인

한규한

‘민족’이라는 개념은 19세기 국민 국가 형성기에 만들어졌다. “민족의 뿌리찾기”는 매우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서유럽에서 “농민층을 프랑스인으로 혹은 독일인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도 바로 이 시기에 시작됐다.

민족, 국가, 국기, 부활된 전통 의례 등에서 우표, 영웅에 대한 기념비, 박물관까지 우리가 민족적으로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19세기 이전에는 매우 생소한 개념들이었다.

먼지가 풀풀 나는 과거의 코드들을 새롭게 닦아내고 색칠하여 예전과는 전혀 다른, 마치 초역사적인 연속성과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이게 하는 작업들이 대체로 근대 역사학의 임무였다.

오히려 근대 역사학 자체가 19세기 국민 국가 형성과 민족주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동양 3국(중국, 일본, 한국)의 근대 역사학도 여기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홉스봄이 지적하고 있듯이 “동양의 민족주의는 서양의 영향과 서양의 정복이 가져다 준 결과로서의 산물이었다.” 한국의 경우는 일본의 식민 지배의 경험을 여기다 더해야 할 것이다.

이성시의 《만들어진 고대》는 동양 3국의 민족주의적 고대사 인식에 대한 도전이다.

이 책은 서유럽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농민층을 프랑스인으로 만들기” 작업과 같은 ‘국민 의식’의 형성과 국민 통합 과정에 역사학이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이 작업이 광개토대왕비를 둘러싸고 지리하게 벌어지고 있는 각국의 고대사 논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광개토대왕비는 당시 고구려의 상황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비문일 뿐이다. 원래 이 비문은 고구려 지배 공동체 5부인들 사이에 한정된 의미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비문은 1천2백 년이 지난 지금 근대 일본, 근대 한국, 근대 중국과 관련된 의미로 읽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시 왕권의 강화와 내부 결속의 강화를 위해 지배 공동체를 위협하는 역할로 상정된 ‘왜’는 아무런 의심없이 근대 일본으로 읽혀지고 있다. 동양 3국은 심지어 원래 비문에는 있지도 않은 새로운 의미를 창출했다. 근대적 의미로 다시 태어난 광개토대왕비는 동아시아에서 국민 형성을 위한 담론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현재를 과거에 투영해 과거를 배타적으로 차지하려는 경쟁이 각국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과거를 차지하려는 경쟁

동아시아 각국은 발해사를 어느 나라에 편입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충돌한다. 중국은 발해를 당나라 시대 소수 민족인 말갈인 지방 정권이라고 보고 있다. 중국측은 한족이 중국사에서 주된 역할을 해 왔다고 보기 때문에 말갈인의 국가였던 발해는 독립된 민족이나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라고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측은 발해의 왕실 및 지배 집단이 고구려인이라고 단정하고,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이며 고구려의 부활·재흥이라고 보고 있다. 양국의 발해사 인식에 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민족과 국가에 대한 통념을 암묵적으로 발해사 분석의 틀로 삼고 있다는 점이며, 나아가 각국이 현실의 정치 과제에 맞추어 발해사를 부각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인구의 10퍼센트도 되지 않는 소수 민족이 전 국토의 6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 지역을 중국의 정통성과 역사적 근거가 있는 영토로 통합하려는 의도를 부정할 수 없다.

또 남북한은 발해사를 한민족의 국가로 간주함으로써 오늘날 남북 분단 상황의 극복이라는 현실적 과제를 발해·신라 병립시대에 투영시켜, 같은 민족이 남북으로 병립해 있는 부자연스러움과 불완전함을 환기시키려 하고 있다.

이런 일국적 역사 인식은 발해를 형성하게 했던 당시 여러 말갈족들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배제하고 만다. 그래서 저자는 일국사라는 관점을 뛰어넘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 주장은 여러모로 장점을 지니고 있다. 동양의 ‘국사’ 체계에서 배제되어 왔지만,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엄연히 존재했던 다양한 부족들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이들과 상호 작용했던 한반도, 중국, 일본의 지배정치 체제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다음으로 이 책은 우리가 배워왔던 권위적이고 편협한 국사체계를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다. 우리는 단일 민족의 신화와 왕조 중심의 역사에 가려져 있던 여러 민중 집단들이 아래로부터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