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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주의의 부활?

지금 아시아에서 마오주의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이 유령 앞에 네팔 왕정은 무릎을 꿇었고[또는 꿇은 척하고 있고], 인도 총리는 “최대의 안보 위협”이라고 말했고, 필리핀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아시아에서 1960∼70년대(필리핀은 1980년대 중반까지)는 마오주의 세력들 ― 인도 낙살라이트 농민 운동, 태국 정글 게릴라 투쟁, 필리핀 ‘신인민군’ 등 ― 의 전성기였다. 캄보디아에서는 폴 포트가 집권했다.

그러나 이들의 세력은 곧 급속히 약화됐다. 첫째, ‘마오주의 종주국’인 중국의 지배자들이 이들의 사기를 꺾었다. 1971년에 마오쩌둥 자신이 미국 대통령 닉슨을 영접했다. 마오는 미국 제국주의보다 소련 “사회 제국주의”가 훨씬 더 위험하다며 이것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해외의 지지자들을 이해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 1978년 마오 사후에는 중국공산당이 세계시장에 문을 활짝 열고, ‘문화대혁명’ 당시 4인방의 만행이 폭로되는 등 중국 국가의 부분적인 ‘탈마오화’가 진행됐다.

둘째, 마오주의 정치 자체의 약점 때문이었다. 마오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매판자본’·‘매판관료’와 ‘봉건’ 지주에 맞서 (신)민주주의 혁명 정권을 세우는 것을 1차적 정치 목표로 삼았다. 사회주의 건설은 그 다음 단계에서의 일이었다.

이들의 기반은 농민이었고, 자연히 농촌 게릴라전을 통해 “도시를 포위하는 것”을 혁명 전략으로 추구했다.

그리고 기존 국가 기구가 붕괴한 항일전쟁기나 내전기 중국과는 다른 ‘일상적’ 시기에 게릴라 투쟁으로 지속 가능한 정치 기반을 건설하는 것은 힘들었고, 게릴라 전투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면서 군사적 고려가 정치적 고려를 압도한 것도 한몫 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공업화에 따라 농촌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도시에 의미있는 정치적 기반을 건설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위해서 필수적인 세력인 노동계급 기반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 아시아 마오주의의 부활은 네팔을 제외하면 1960∼70년대보다 아직 제한적이다. 하지만 중앙 국가의 신경을 거스를 정도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기존 정당이 메우지 못하고 있는 정치적 공백이 존재하는 것도 한몫 했다. 또, 다양한 반신자유주의 정치 세력 ― 케인스주의, 민중주의, 각종 반자본주의 급진좌파와 혁명적 사회주의 등 ― 이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80∼90년대 동안 일부 수출지구나 부자·중간계급들은 세계시장 덕분에 번창하는 반면, 많은 대중, 특히 수억 명에 달하는 농촌의 ‘잉여인구’들은 그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또는 전에 지급되던 최소한의 복지·보조금마저 중단돼 상황이 더 악화됐다. 이들 사이에서 마오주의자들은 새롭게 지지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가 마오주의에 머물러 있는 한은 광범한 대중적 대안으로 성장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일부 마오주의는 변화했다. 개량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 받아들이고 선거에 참가하기도 한다. 비록 이것이 ‘민족 부르주아지’와 연합해서 먼저 신민주주의를 설립해야 한다는 마오주의 정치의 범위 내에 있을지라도 게릴라 전략과 의회주의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진정한 문제는 여전히 이들이 노동계급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1960∼70년대와 비교해서 오늘날 아시아 노동계급의 수는 수억 명이 늘었고, 비농업이 경제의 대부분을 이룬다. 결국 마오주의자들의 정치적 실천은 과거와 똑같은 어려움에 부딪힐 것이다.

중국의 마오주의

이런 마오주의 조직과 중국 지배자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마오 집권 당시 중국 정부가 외국의 일부 마오주의 조직을 정치적·물질적으로 지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지원은 일관되지 않았고, 대부분 각국 지배자들이 자국 내 마오주의 게릴라들을 진압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으로 끝났다.

마오 정부는 필리핀·태국·이란·아프리카의 경우 마오주의자들을 탄압하는 현지 지배자들과 손을 잡았고, 인도의 경우에는 진압하는 동안 침묵을 지켰다.

따라서 현재 중국 정부가 자신과 네팔 마오주의자들의 관계를 극구 부인할 뿐 아니라, 후자를 지역 세력 균형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말썽꾸러기로 취급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흥미롭지만 모순되게도 최근 중국 정부는 국내적으로는 마오쩌둥에 대한 환상을 다시 한번 부추기는 정책을 펴고 있다.

이것은 ‘공자 되살리기’ 등 최근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일 뿐 아니라, 중국 공산당 집권의 정당성이 궁극적으로 항일전쟁을 통해서 제국주의 세력을 중국 대륙에서 몰아낸 것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중국 정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정당성’이다.

그러나 새천년 들어 중국 대중 속에서 마오에 대한 동정심이 부활하고 있다. 다만, 아시아 지역 마오주의가 주로 농민이나 농촌 실업자·빈민에 기반하고 있다면 중국에서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더 두드러지게 확산되고 있다.

물론 도시 노동자들이 대부분 마오에 동정적인 시각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주로 중국 북부와 서부 등 대규모 사유화가 진행되고 있는 옛 공업지대에 한정된 현상으로 보인다.

아이러니이게도 이 노동자들은 1976년 1차 톈안먼 항쟁과 1980년대 초 민주벽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원래 덩샤오핑의 부분적 ‘탈마오화’ 정책을 지지했다. 마오 시대에 이들은 비록 최소한의 복지를 누렸지만, 저임금과 각종 정치 캠페인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일찍이 1980년대 말 각종 노동개혁과 물가상승에 고통받기 시작하면서 1989년 톈안먼 항쟁에 참가했다. 1990년대 말 국영기업 폐쇄·사유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약 4천만 명이 정리해고당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이에 노동자들이 최소한 일자리의 ‘안정’을 누렸던 과거에 향수를 품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이 과정이 자동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직 마오주의를 버리지 않았거나 새롭게 마오주의를 발견한 하급 공산당 노동자들과 일부 지식인들이 여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일부 작업장에서는 마오 사상 토론 소모임들이 지속됐다.

나는 홍콩의 일부 좌파들이 현재 중국 노동자들 사이에서 마오주의가 세력을 얻고 있는 것을 예로 들며 중국 노동자 운동의 미래가 비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한편으로 그들의 지적처럼 이것은 분명히 중국 노동자들의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보여 주는 것이며, 공산당 정부는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공산당 집권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한계 내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복합적인데, 일부 노동자들은 그것을 투쟁의 이데올로기로 활용하고 있다. 지금 중국공산당이 진정한 마오 시대의 정신을 잃었다고 비판하면서 말이다. 일례로, 한 서방 학자가 2004년에 발견한 한 사유화 반대 리플릿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과거 역사적 전통을 무시하면서 시장과 구조조정을 들먹이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 중국 노동계급은 생산수단, 공장과 각종 장비들을 통제하기 위해 혁명에 가담했다.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 통제야말로 우리 나라의 근본 특징이다 … 지금 [당 관료들은] 우리에게 공장을 포기하고 생산수단을 자본가들에게 양보하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여전히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이것은 엄청난 사기다.”

중국 지배자들이 마오주의를 선전하면서도 ‘아래로부터의 마오주의’를 단호하게 억누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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