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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티의 역사 ― 예멘과 저항

다른 해방의 가능성을 보여 준 2011~2012년 예멘 혁명 ⓒ출처 Noor Al Hassan/ Wikimedia Commons

후티 측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의 미사일이 하루에 수차례 예멘을 강타하고 있으며 지난 1월부터 공습이 420회 이뤄졌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고위 관료들은 포격 세례가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고 시인한다. 미국이 예멘에 파견한 특사 렌더킹은 4월 3일 기자회견에서 “군사적 해법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고 시인했다.

이런 고백은 세계적 제국주의 열강과 역내 강국들이 지난번 예멘에서 벌인 군사 개입이 그들에게 얼마나 좌절스러운 경험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지난 9년간 세계적 열강과 역내 강국들이 예멘에서 전쟁을 벌인 이후 대다수 예멘인의 삶이 얼마나 비참해졌는지에 관한 데이터를 보면, 누구든 행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국 정부의 자체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은 매달 적어도 예멘인 10만 명에게 식량을 직접 원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예멘인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공격하려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군사 장비를 동원하는 암울한 광경은 전혀 새롭지 않다.

이러한 전략은 과거에 세계적 열강과 역내 강국들이 예멘인들과 벌인 충돌에서도 잘 먹히지 않았다.

후티가 현재 예멘에서 군사적 통제력과 정치 권력을 상대적으로 잘 유지하고 있는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가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며 전쟁을 벌이다 굴욕적으로 패배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예멘인들이 치른 대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더 컸다.

유엔은 2015~2021년 동안 전쟁으로 37만 7000명이 사망하고, 그중 최소 15만 명이 무력 충돌의 직접적인 결과로 사망했다고 추산했다. 영국에서 제조되고 공급된 무기가 이러한 죽음에 큰 책임이 있다.

2015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와 UAE가 주도하는 연합군이 예멘의 후티를 상대로 공습을 감행할 당시 뉴스를 지배한 수사는 오늘날과 너무도 똑같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관영 통신사는 당시의 군사 개입이 “후티 무장 조직의 침략에 맞선 것”이라며, 후티 무장 조직이 “과거부터 외세의 도구였고 지금도 그러하다”고 주장했다.

UAE 외무장관은 “후티가 대의로 내세우며 옹호하는 이란에 유리한 역내 전략적 변화를 좌시할 수 없다”고 트위터에 썼다.

전쟁

그러나 자신들이 신속하게 승리할 것이라는 그들의 자신만만한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뉴스 채널들이 지상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한 15만 명의 군대는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사우디아라비아와 UAE의 연합군은 먼저 (미국과 영국이 공급하고 지원하는) 공군력에 의지해, 민간 기반시설을 파괴하고 장례식장 조문객과 결혼식 하객을 살상했다.

이런 공습으로는 2015년 후티가 장악한 예멘 수도 사나에서 후티를 축출할 수 없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UAE의 장군들은 부족한 [지상전] 병력을 보충하려고 동맹국인 수단에 도움을 청했다.

2016년이 되면 수단 병력 최대 4만 명이 예멘에서 교전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수단 서부의 다르푸르 등지에서 위협과 경제적 강압을 함께 동원해 모집한 용병들이었다.

연합군의 개입은 예멘의 압드라보 만수르 하디 정부를 지지하는 정치·군부 세력들 사이의 극심한 분열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시켰다.

대통령 하디가 전쟁 기간 대부분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하디를 후원한 사우디아라비아와 동맹국 UAE는 후티의 영향권 바깥 지역을 지배하며 서로 다투던 친정부 무장 세력들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경쟁했다.

UAE는 2007년부터 남예멘 분리 독립을 요구해 온 ‘남부 운동’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 아이다루스 알주바이디를 지원했다. 알주바이디는 2017년 [하디 정부가 수도 사나에서 후티에 의해 밀려난 뒤 거점으로 삼은 남부의 주요 도시] 아덴을 장악하고 하디 정부를 축출했다.

분명 후티는 이러한 적들의 분열 덕분에 더 쉽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UAE 고위 관료들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후티가 이란의 꼭두각시일 뿐이라는 자신의 프로파간다를 진짜로 믿은 것일 테다.

후티 지도자들은 깊은 종교적·사회적 불만을 바탕으로 군사 활동을 추동했다. 이는 2015년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예멘 국가에 맞서 싸운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후티의 정치는 복잡하다. 그들의 종교 사상은 자이드파에서 유래했는데, 자이드파는 9세기 후반부터 예멘에 있었던 시아파 이슬람의 한 지파다.

역사적으로 자이드파 학자들은 정치적·종교적 권위를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손이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란의 국교인 12이맘파 시아파의 교리와 달리 자이드파는 일반 신자를 엄격한 성직자 위계의 지도하에 두지 않는다.

여러 면에서 예멘 자이드파의 관습과 신앙은 예멘 인구의 절반을 약간 넘는 샤피이파 수니파 무슬림과 매우 유사하다.

이 두 종교 집단은 수 세기 동안 예멘에서 공존해 왔으며, 같은 모스크에서 기도를 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권이 적극 장려한 보수적 지파 살라프파를 비롯해 새로운 지파들이 수니파 이슬람 내에서 득세한 것 때문에 후티의 성장세는 더 빨라졌다.

사회적 모순 심화

1990년대에 후티 가문 사람들은 살라프파 설교자들의 인기에 대항해 종교적 청년 운동을 조직했다. 살라프파가 자이드파의 관습과 믿음을 ‘비이슬람적’이라고 폄하하는 데 대한 반발이 컸다.

후티 단체 ‘신앙청년단’은 종교 강의와 스포츠 활동을 결합한 여름 캠프를 운영해 수많은 청소년·청년 남성들을 조직했다.

자이드파 신앙은 1980년대 초까지 비교적 고립돼 있던 이 [후티 가문이 살던 예멘 북부 사다] 지역의 사회적 모순이 심화하는 것을 배경으로 부흥했다.

1979년 최초의 포장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수도 사나에서 사다시(市)까지 가려면 10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불과 몇 년 만에 예멘 북부 성인 남성의 4분의 1 가까이가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 걸프 연안국들로 이주했다.

예멘 출신 이주노동자들은 고향에 돈을 보낼 수 있었고 해외에서 새로운 사상과 경험을 접했지만, 그들의 조건은 불안정했다.

1990~1991년 걸프 전쟁 당시 걸프 연안의 권위주의적 군주국들은 주저 없이 예멘을 응징했다. 예멘 지도자들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지지했다면서 말이다.

걸프 연안국들은 예멘인 수십만 명을 농지·물 쟁탈전이 심해지던 예멘으로 강제 추방했다.

당시 예멘 정부는 예멘아랍공화국[북예멘]과 친소 성향의 예멘인민민주공화국[남예멘]이 1990년 통일하면서 출범시킨 정부였다.

그 정부를 이끌던 인물은 후티 가문과 같은 예멘 북부 지역 출신인 알리 압달라 살레였다.

살레는 미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는 이전까지 비정치적이던 종교 부흥 운동이 정치 운동으로 변모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후티 가문이 시작한 종교적 운동이 예멘 국가와 치열하게 대결하는 무장 저항 단체로 변모한 것이다.

분노

미국 정부의 “테러와의 전쟁” 덕에 살레 같은 독재자들은 신무기를 손에 넣고 자기네의 더러운 전쟁과 국내 억압을 “이슬람주의 테러리스트”에 맞서는 전지구적 성전의 일부로 포장할 수 있었다.

한편, 많은 평범한 예멘인들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이라크 폭격을 보고 공포에 떨었으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공격을 지지하는 미국에 분노했다.

2004년에 [후티 가문의] 후세인 알후티는 설교와 연설에서 그러한 분노의 일부를 모아내기 시작하자, 살레는 사다에 군대를 투입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바로 이것이 이후 7년 동안 이어진 무장 반란을 촉발시켰다.

후티는 경제적 불만을 활용해 기반을 구축하고, 살레 정권에 대해 근거 있는 부패 혐의를 제기하며 지지를 결집시켰다.

2011년, 살레의 통치는 흔들리고 있었다.

후티의 반란이 일정 구실을 하긴 했지만, 그것은 불만이 솟구치는 훨씬 더 큰 그림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남북을 막론하고 예멘 전역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빈곤이 극심해졌다.

농업이 붕괴해 농촌 공동체가 타격을 입었고, 도시의 전문직 종사자들과 노동자들은 물가 상승으로 인한 생계난에 시달렸다.

2011년에 혁명이 분출했다. 이 혁명은 독재자에 맞서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변화 염원 대중 운동이 농촌과 도시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켰다.

존엄과 정의를 향한 희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서방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지를 받는 새 정부가 예멘에 들어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정부는 지독한 반감을 사게 됐다.

후티 지도자들은 과거의 적수 살레와 힘을 합쳤다. 살레는 군대 내에서 여전히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후티는 불의에 맞서 싸운다며 급진 투사를 자처했지만, 전직 독재자와 기꺼이 거래를 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는 예멘 정부를 2014년 말에 군사적으로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후티가 살레와 손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것은 후티의 시야가 한 지배자를 다른 지배자로 교체하는 위로부터의 변화에 국한돼 있음을 밝히 보여 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2011년 혁명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해방을 쟁취한다는 매우 다른 길을 흘낏 보여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