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 걸프 전쟁을 돌이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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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제2차 걸프
미국 정부는 그 때도 민주주의를 얘기했다. 그러나 쿠웨이트
민주주의 어쩌고 하는 부시의 미사여구와 달리, 2차 걸프 전쟁의 근원은 세계 체제 자체의 성격에서 찾아야 한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몇십 년 동안 미·소 양대 초강대국을 두 축으로 일정한 세력균형이 이뤄졌다. 미국과 소련은 자기들 자신의 세력권을 지배할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의 패전 열강인 독일과 일본은 냉전 초기에 미국의 맞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부터는 바뀔 것 같은 조짐이 나타났다. 두 초강대국간 양극 구도는 해체되고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다극화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하는 듯했고, 그와 함께 체제의 상대적 안정성도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가장 주요한 열강으로서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과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퇴해 온 경제 사이에 불균형을 겪고 있었다. 걸프에서 미국과 이라크 사이에 긴장이 최초로 발생한 1990년 8월 초순 이후 전쟁 종결 때까지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 손을 벌려 전쟁 수행을 위한 자금을 구했다. 단연 최강의 군사 대국으로서 미국은 걸프 전쟁을 통해 다른 열강에 자신의 맹주권을 확인시키려 했다.
부시는 처음부터 강력한 듯했다. 덩샤오핑과 고르바초프1)
그러나, 걸프 전쟁의 비용은 미국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도 어마어마했다. 미국이 이라크와의 긴장 발생 전에 겪기 시작한 경제 불황은 심각했으므로, 전쟁을 오래 끈다면 그에 필요한 군비 지출에 재원을 대기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억, 빈부격차와 실질임금 인하를 가져왔던 레이건 시대에 대한 증오, 그리고 전쟁의 진정한 이유가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허울 좋은 가치들이 아니라 석유라는 사실이 드러나 전쟁 발발 전부터 어느 정도 규모의 반전 운동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 정부
1990년 9월 노태우는 3억 5천만 달러의 주둔분담금 지원을 요구한 부시에게 2억 2천만 달러만 내놓겠다면서, 그 대신 군 의료진을 파병2)
1991년 1월 12일 노태우는 전투병력 파병을 “이 시간 현재 요청받은 바도 없고 현재 거론되지도 않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미래에는 거론해서 파병할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바로 그 날 부시는 애초에 요구했던 3억 5천만 달러를 그대로 지원하라고, 즉 1억 3천만 달러를 더 내놓으라고 채근했다. 그 즉시 노태우는 걸프 주변국에 9천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정했고, 국방부는 전투부대 파병 문제를 “앞으로 만약 사태가 악화되어 유엔 참전국에서 파병을 강력히 요청할 때에는 안보 및 국익에 대한 손익을 판단해 검토해 볼 문제”라고 밝혔다.
노태우 정부가 군 의료진 선발대를 “현지조사단” 명목으로 먼저 보낸 것은 명백한 헌법 위반 행위였는데도 부르주아 입헌주의에 충실하다는 김대중의 평민당은 “융통성을 발휘”했다. 집권당인 민자당의 “지자제 예정대로 실시” 약속에 보답하기 위해 평민당은 1월 21일 국회에서 군 의료진 파병 동의안 통과를 놓고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정부에 협조했던 것이다.
한국 정부는 왜 중동에 파병함으로써 “미국이 취한 결연한 군사적 조처를 전폭 지지”했는가? 첫째, 걸프 전쟁은 무엇보다 석유 전쟁이다. 국내 산업체들의 원료와 동력이 되는 수입 석유의 거의 75퍼센트가 중동에 의존하고 있었다. 미국이 석유 공급과 석유 가격에 대한 지배를 위해 벌이는 도박에 어떻게든 한몫 끼지 않는다면 나중에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 미국이 판돈을 거둬 갈 때 자기는 개평도 못 얻어 가는 사태를 한국 정부는 우려했던 것이다. 걸프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다면, 한국 정부는 좋은 조건으로 원유를 구매할 수 있다. 중동 정권들에 ―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나 바레인 ―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과의 우의를 돈독히 그리고 확실히 해 두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둘째, 언젠가는 현실화될지도 모를 북한 국가와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남한 권력자 집단
이보다 훨씬 전인 월남 파병 당시 제1야당 민정당의 윤보선은 “
제국주의적 걸프 전쟁에서 미국이 이기면 무엇보다 이라크 민중과 아랍인들의 처지가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서방과 자국 정부에 대한 제3세계 민중의 투쟁도 수세에 몰릴 것이었다. 그들 피억압 민중과 민족주의 지도자들
이러한 시나리오는 1995년부터 서유럽 노동자 투쟁이 부활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세계 자본주의인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은 노동자 운동에 바탕을 둬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이 다시금 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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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