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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 걸프 전쟁을 돌이켜본다

1991년 1∼2월 제2차 걸프(이전에는 '페르시아만'이라고 불렀다) 전쟁은 어린이를 포함한 20만 명의 이라크인들을 죽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현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아버지)가 석유에 대한 지배력을 지키고 일본·독일 등 다른 서방 열강에 미국의 맹주권을 확인시키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다.

미국 정부는 그 때도 민주주의를 얘기했다. 그러나 쿠웨이트(사담 후세인은 1990년 8월 2일 그 동안 유가 인상 폭을 두고 다퉈 온 쿠웨이트를 점령했다.)에는 미국이 수호할 민주주의가 아예 없었다. 알 사바 왕가의 전제는 끔찍했다. 미국의 걸프 지역 최대 동맹자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정의 전제 역시 지독했다.

민주주의 어쩌고 하는 부시의 미사여구와 달리, 2차 걸프 전쟁의 근원은 세계 체제 자체의 성격에서 찾아야 한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몇십 년 동안 미·소 양대 초강대국을 두 축으로 일정한 세력균형이 이뤄졌다. 미국과 소련은 자기들 자신의 세력권을 지배할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의 패전 열강인 독일과 일본은 냉전 초기에 미국의 맞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부터는 바뀔 것 같은 조짐이 나타났다. 두 초강대국간 양극 구도는 해체되고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다극화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하는 듯했고, 그와 함께 체제의 상대적 안정성도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가장 주요한 열강으로서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과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퇴해 온 경제 사이에 불균형을 겪고 있었다. 걸프에서 미국과 이라크 사이에 긴장이 최초로 발생한 1990년 8월 초순 이후 전쟁 종결 때까지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 손을 벌려 전쟁 수행을 위한 자금을 구했다. 단연 최강의 군사 대국으로서 미국은 걸프 전쟁을 통해 다른 열강에 자신의 맹주권을 확인시키려 했다.

부시는 처음부터 강력한 듯했다. 덩샤오핑과 고르바초프1)에게 단단히 다짐을 받아 둬 UN을 쥐고 흔들었으며, 그리하여 오랫만에 안보리 국가들의 행동 통일을 위한 정치적 명분을 획득했고, 다른 강대국 지도자들을 마치 턱으로 부리는 듯했다. 그것도 유럽에서 세력관계 재편 ― 특히 통일 독일과 소련 사이의 밀착 ― 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던 때에 그랬던 것이다. 부시는 “베트남 증후군”을 차제에 확실히 없애 버리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사실, 미국은 1983년의 그레나다 침공과 1987년의 이란·이라크 전쟁(제1차 걸프 전쟁) 개입 등과 같은 계기들을 통해서 조금씩 베트남 증후군을 극복해 왔다.

그러나, 걸프 전쟁의 비용은 미국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도 어마어마했다. 미국이 이라크와의 긴장 발생 전에 겪기 시작한 경제 불황은 심각했으므로, 전쟁을 오래 끈다면 그에 필요한 군비 지출에 재원을 대기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억, 빈부격차와 실질임금 인하를 가져왔던 레이건 시대에 대한 증오, 그리고 전쟁의 진정한 이유가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허울 좋은 가치들이 아니라 석유라는 사실이 드러나 전쟁 발발 전부터 어느 정도 규모의 반전 운동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 정부

1990년 9월 노태우는 3억 5천만 달러의 주둔분담금 지원을 요구한 부시에게 2억 2천만 달러만 내놓겠다면서, 그 대신 군 의료진을 파병2)하겠다고(즉, 돈 대신 몸으로 때우겠다고) 그 스스로 제안했다.

1991년 1월 12일 노태우는 전투병력 파병을 “이 시간 현재 요청받은 바도 없고 현재 거론되지도 않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미래에는 거론해서 파병할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바로 그 날 부시는 애초에 요구했던 3억 5천만 달러를 그대로 지원하라고, 즉 1억 3천만 달러를 더 내놓으라고 채근했다. 그 즉시 노태우는 걸프 주변국에 9천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정했고, 국방부는 전투부대 파병 문제를 “앞으로 만약 사태가 악화되어 유엔 참전국에서 파병을 강력히 요청할 때에는 안보 및 국익에 대한 손익을 판단해 검토해 볼 문제”라고 밝혔다.

노태우 정부가 군 의료진 선발대를 “현지조사단” 명목으로 먼저 보낸 것은 명백한 헌법 위반 행위였는데도 부르주아 입헌주의에 충실하다는 김대중의 평민당은 “융통성을 발휘”했다. 집권당인 민자당의 “지자제 예정대로 실시” 약속에 보답하기 위해 평민당은 1월 21일 국회에서 군 의료진 파병 동의안 통과를 놓고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정부에 협조했던 것이다.

한국 정부는 왜 중동에 파병함으로써 “미국이 취한 결연한 군사적 조처를 전폭 지지”했는가? 첫째, 걸프 전쟁은 무엇보다 석유 전쟁이다. 국내 산업체들의 원료와 동력이 되는 수입 석유의 거의 75퍼센트가 중동에 의존하고 있었다. 미국이 석유 공급과 석유 가격에 대한 지배를 위해 벌이는 도박에 어떻게든 한몫 끼지 않는다면 나중에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 미국이 판돈을 거둬 갈 때 자기는 개평도 못 얻어 가는 사태를 한국 정부는 우려했던 것이다. 걸프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다면, 한국 정부는 좋은 조건으로 원유를 구매할 수 있다. 중동 정권들에 ―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나 바레인 ―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과의 우의를 돈독히 그리고 확실히 해 두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둘째, 언젠가는 현실화될지도 모를 북한 국가와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남한 권력자 집단(“기성 체제”)은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북한 관료에 대한 효과적인 위협으로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공격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관계 때문에 남한 권력자 집단 전체가 미국의 대외정책에 충실히 협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남한 “정부의 독자적 결정”은 “미국의 요청” 또는 “강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대적 독자성일 뿐이다. 이 사실은 다음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야당인 평민당의 조세형은 국회 예산결산심의위원회의 계수소위에서 걸프 주둔분담금 문제를 놓고 여당인 민자당 측에 시비를 걸고 있었다. 민자당 측은 주한 미대사 그레그가 외무부에 보내는 서한을 보였다. 그 서한은 주둔분담금 동의안 국회 통과를 성사시키라고 위협하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평민당은 찍 소리 안 하고 통과시켰다.

이보다 훨씬 전인 월남 파병 당시 제1야당 민정당의 윤보선은 “[파병이]한국측 의사에서 나온 것이라면 반대하고 미국측 요청에 의한 것이라면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찬성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공화당이 박정희 정부의 독자적 결정이라고 답변해 민정당은 반대표를 던졌으나, 다음에는 미국 대사관이 그렇지 않다고 이실직고해 찬성표를 던지기로 번복했다!남한 권력자 집단 전체가 국내 노동자 계급에 맞서 그리고 북한 관료에 맞서 궁극적으로 미국의 군사력에 기대고 있다. 그래서 미군의 남한 주둔을 미국의 의사라는 한쪽 측면에서만 보아서는 전체적 시각이라고 할 수 없다. 남한 권력자 집단 전체가 미군 주둔을 원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2차 걸프전을 앞두고 미국 측이 주한미군 걸프 전환배치를 입에 올렸을 때 그들은 남한 권력자 집단 전체에 만약 전투병력 걸프 파병을 찬성하지 않으면 미군을 빼내가겠다고 위협한 것이었다. 그만큼 남한 권력자 집단 전체에 미국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다.

제국주의적 걸프 전쟁에서 미국이 이기면 무엇보다 이라크 민중과 아랍인들의 처지가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서방과 자국 정부에 대한 제3세계 민중의 투쟁도 수세에 몰릴 것이었다. 그들 피억압 민중과 민족주의 지도자들(후세인 같은) 사이도 더욱 유착될 것이었다. 소련내 소수민족들의 저항도 러시아 제국주의의 더한층의 억압에 부딪힐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과 거의 때를 맞춰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민중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1995년부터 서유럽 노동자 투쟁이 부활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세계 자본주의인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은 노동자 운동에 바탕을 둬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이 다시금 이라크(또는 소말리아나 예멘)를 희생시켜 자신의 맹주권을 다른 열강에 확인시키려 할지도 모르는 지금, 학생·노동운동가들이 곱씹어 봐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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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위해 노태우 정부로부터 30억 달러를 뜯어 내고 심지어는 쿠웨이트 망명 정부로부터도 10억 달러를 뜯어 낸 당시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는 “걸프에서의 비극적 전쟁은 국제 사회의 철군 요청을 이라크 지도부가 거부함으로써 빚어진 것”이라며 반이라크 진영에서 돈 뜯어 낸 데 대한 보답으로 부시의 편을 들었다. 그 얼마 전부터 고르바초프는 야코블레프·아발킨 등의 개혁파를 견제하며 권위주의 독재로 회귀하기 위해 수구파와 제휴하기 시작했다. 그러기 전에도 그는 소련내 민족 문제에 관한 한 철저히 러시아 제국주의자로 행동했다. 1990년 초 미국이 한때 자신의 충성스런 하수인이었던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의 배반을 응징하기 위해 파나마를 침공해 7천여 파나마 민중을 학살했던 때와 비슷한 때 아제르바이잔 민중을 탱크로 짓뭉갰던 고르바초프는 이번에도 미국이 역시 한때 충실한 하수인이었던 후세인의 반역을 박살내기 위해 광기를 부리려 할 때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를 유린했다.(고르바초프는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에 대한 군대 투입이 자신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발뺌하며 심지어 ‘진상조사단’을 파견하는 등의 위선과 잔꾀를 부렸다.) 이미 1956년에도 소련의 지도자(흐루시초프)는 영국과 프랑스가 나세르 치하 이집트를 유린하는 것과 때를 맞추어 탱크를 보내 헝가리의 혁명적 노동자 평의회를 분쇄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은 그럴 때마다 러시아 제국주의자들에게 항의하는 시늉을 했다. 둘은 자기들끼리는 으르렁거렸지만 피억압 민족의 해방 운동에 대해서는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고르바초프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라크의 미사일 공격에 반대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미국의 중동 경비견이다. 그 국가는 아랍 세계라는 피억압 민족의 바다에 떠있는 ‘아류 제국주의’ 고립소국이다. 그렇다면, 아랍 민중이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공격할 필요가 있다.

2) 아무리 의료진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군인이며 따라서 그들을 보내는 것이 파병 행위임은 노태우 정부의 국방부 관계자 자신이 분명히 인정한 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