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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더러울 수는 없다

이보다 더 더러울 수는 없다

김어진

2000년 5월 이용호가 하룻만에 석방된 후 두번째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부패에 연루된 자들의 거짓말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만난 적 없다”, “누군지 모른다”, “금시초문이다”, “사실이면 할복 자살하겠다” 등의 잡아떼기는 며칠도 못 가 “나는 입이 없다”는 가련한 말로 바뀌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말하던 김대중의 처조카 이형택은 황당한 보물선 사업에 국가 기구들을 줄줄이 동원했다. 청와대·국정원·검찰·국방부·해군·해경 등이 부패한 정치인과 기업인을 지원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다. “제2의 이원조”라 불린 이형택은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한 충정”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그는 보물선 발굴이 가망 없음을 알고도 엄청난 주식 이득을 약속받고는 이용호한테 보물 발굴 사업을 또다시 주선했다. “검찰은 절대 잘못이 없다”, “자식도 어찌 못하는데 동생을 어찌하랴”던 전 검찰총장 신승남이 검찰 수사 축소·은폐의 진원지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김대중의 아들들까지 부패에 연루됐다. 김홍일은 이용호의 로비스트와 향응성 휴가를 떠났고, 이용호측이 검찰 간부들에게 돌린 돈봉투에는 김대중의 아들 이름이 여러 차례 적혀 있었다. 거기에다 최근에는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서 초호화 주택을 산 막내 아들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김대중 정권 하에서도 “수천 가닥으로 연결된 부르주아들 사이의 끈”이 부패 구조에 활용됐다. 이용호와 김형윤이 고교 동창이었고 이용호의 로비를 받은 방송사 간부와 김홍업이 대학 동기였으며, 신승환은 ‘동생의 이름’으로 이용호의 기업 인수를 돕고 검찰 수사 축소를 위해 전방위 로비를 했다.

진승현·이용호·윤태식 게이트는 서로 얽히고설켜 있는 일란성 세 쌍둥이와도 같다. “모든 게이트는 청와대로 통했다.” 청와대 비서실은 부패한 기업인들과 국가 기구를 연결시켜 주는 거간 노릇을 했다. 청와대의 사정 책임자였던 신광옥은 진승현 게이트에, 김대중의 “충고맨”으로 알려진 공보수석 박준영은 윤태식 비리에 연루됐다. 김대중 정권의 최장 수석 비서관 이기호는 이형택을 국정원과 국방부 등에 연결시켜 주었다.

‘솜방망이’

일련의 부패 스캔들은 김대중식 “개혁”의 허구성을 보여 준다. 평범한 사람들한테 희생과 절제, 안보와 질서를 강요하던 김대중 정권의 고위 관료들이 바로 주가 조작과 뇌물 잔치의 장본인들이었다. 국정원·검찰·경찰·국세청·산업은행·금융감독원 등 어느 기구도 부패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국정원 경제단의 간부들은 정현준에 대한 주가 조작 조사를 무마하기 위해 금융감독원에 로비를 했다. 그들은 진승현의 도피를 위해 신승남과 서울지검장을 찾아가 구명 로비를 했고, 보물선 인양 사업 정보를 이용호에게 알려 주었는가 하면, 신승남과 골프를 치며 수사 은폐를 모의했다. 윤태식은 전 국정원장 이종찬의 도움으로 버젓이 국정원 건물 안에서 패스 21 홍보쇼를 벌였다.

검찰은 수백억 원을 횡령하고 주가를 조작해서 수많은 개미군단을 울린 부패사범들을 보호해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신승남이 수사 은폐에 깊숙이 개입한 덕분에 검찰은 지난해 신승환 수사 때 아예 계좌 추적조차 안 했다. 신승남은 정현준·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된 국정원 간부 김은성·김형윤과도 수시로 만나 골프를 쳤다. 옷로비 때문에 옷을 벗은 김태정이 바로 이용호의 첫번째 변호사였다. 검찰의 축소·은폐 수사 덕분에 게이트 수사에서 핵심 열쇠를 쥐고 있던 자들은 유유히 외국으로 빠져나갔다. 진승현 게이트의 로비스트 김재환은 출국 금지 조치가 내려진 뒤에도 버젓이 LA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검찰이 기를 쓰고 보호하려 했던 자들은 경제 위기로 큰 부자가 된 자들이다. 기업 사냥꾼 이용호는 1997년 금융 공황 이후 기업 인수 합병 전문회사로 막대한 돈을 긁어모을 수 있었다. 주가 조작으로 154억 원을 긁어모으고 6백83억 원을 횡령한 그는 무려 1천8백19명의 리스트를 관리했다.

“돈 거래의 귀재”, “제2의 이원조”라 불리는 이형택은 퇴출 은행의 임원에서 되레 금융계를 쥐락펴락하는 자리에 올랐다. 그는 “동화은행 퇴출의 유일한 수혜자였다.”다른 권력 기구들은 어떤가? 국세청은 평범한 사람들의 근로소득세는 꼬박꼬박 챙기면서 3년 전 이용호의 60억 원대 회계 조작에 대해서는 솜방망이조사에 그쳤다. 정통부 관료들은 터무니없이 비싼 핸드폰 요금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정작 윤태식에게는 온갖 특혜를 주었다. 부패 기업인들과 뇌물 잔치를 벌인 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안보와 질서를 강조해 온 자들이기도 하다. 게이트에 연루된 국정원 간부들은 총풍·북풍을 일으킨 대공업무 지휘부였다. 5·3 인천 사태, 민애전 사건 등의 수사를 지휘한 장본인이자 검찰 내에서도 정통 공안통으로 꼽혔던 바로 그 자(임휘윤 전 부산고검장)가 2년 전 이용호를 단 하루 만에 “무혐의”로 풀어 줬다.

체제와 부패

최근 게이트의 모든 진원지가 벤처 기업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련의 게이트는 “벤처 육성” 정책이 낳은 결과다. 경쟁은 이권 다툼을 더욱 부채질한다. 이권 다툼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뇌물과 로비가 빗발친다. 김대중은 부패의 엔진에 기름을 부은 셈이다. 부패의 진정한 토양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다. IMF와 세계은행은 부패가 ‘정실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의 엔론 게이트에서 드러났듯이 부패는 자유시장 자본주의 자체의 붙박이 장롱이다. 투명성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다는 세계 금융의 중심지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는 엔론 파산 이후 “회계 장부 조작 기구”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제 엔론, 타이코에 이어 IBM도 분식회계 의혹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한편, 한나라당은 여당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들이야말로 부패 사슬 구조의 진정한 원조다. 한나라당 자신이 정치 자금을 위해 국가 기구를 동원한 전력을 갖고 있다. 이회창은 1997년 대선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세청을 동원했다. 현대·대우·동부· 진로 등 25개 업체로부터 167억 원을 모금했다. 경부고속철도차량 납품사 선정 비리, PCS 사업자 선정 비리, 한보 비리,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비리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최근의 게이트 수사는 김대중 정권의 숨통을 더 죄어 올 것이다. 4대 게이트가 결코 끝이 되지도 않을 듯하다. 벌써부터 제5게이트가 거론되고 있다. 주식 시장에서 580억 원의 시세 차익을 남긴 한 벤처 기업(한별 텔레콤)의 돈이 이용호의 로비스트와 정치권으로 흘러갔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전 국세청장 안정남의 탈세 의혹, 김대중의 집사 노릇을 했던 무기밀매업자 조풍언의 산업은행 건물 헐값 매입 등 어디에서 새로운 뇌관이 터질지 모른다.

부패는 정치 위기의 뇌관이 되고 평범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쌓인 설움과 분노를 폭발시킬 수도 있다. 1997년 알바니아의 바르샤 정권의 몰락, 1998년 인도네시아 혁명, 2000년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정권과 필리핀의 에스트라다 정권의 몰락 그리고 에콰도르의 대중 봉기, 최근의 아르헨티나 봉기 등에서 부패는 주요한 도화선이 됐다. 일련의 게이트는 김대중 정권을 산산조각낼 폭발력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이런 정치 쟁점을 회피하지 않는 활동이 노동 운동에 필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