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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파업 - 시장의 우선순위를거부하다

철도파업 - 시장의 우선순위를거부하다

김인식

공공 부문 파업의 직접적인 원인은 김대중 정부의 사유화 정책이었다. 김대중은 자신의 전임자들이 노동자들의 반발을 우려해 꺼렸던 공공 부문에 대한 ‘시장 개혁’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것은 공공 부문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것이자 국민 대중의 삶을 악화시키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러자 김대중은 노동자들의 “기본권” 행사를 “불법”이라고 비난했다. 사유화는 “경영의 문제”이지 “노조 본연의 임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김대중은 자기가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한때 “신노사문화를 창출하려면 근로자가 신명나게 일할 수 있어야 하며 경영 참여도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 김대중에 대한 “신뢰가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다.”(〈내일신문〉 2월 27일치.)사유화는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조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김대중이 사유화의 모델로 삼은 영국의 경험이 정확히 그랬다. 그러니 노동조합이 사유화 계획에 저항하는 것은 “노조 본연의 임무”다. 오만하게도 김대중은 정부 정책에 대한 이견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한 철도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김대중 정부를 향해 주장한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라면 정부의 정책은 모든 국민이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한겨레〉 2월 28일치.)국무총리 이한동은 공공 부문 파업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는 파업이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며 치를 떨었다. 그러나 정작 지난 4년 동안 국민을 “배신”한 것은 ‘국민의 정부’였다. 〈한겨레〉의 박찬수 기자는 ‘DJ 취임 4돌과 노조 파업’이라는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동계의 한 축이 정부와의 대화를 거부하고, 기간 산업 노조들이 취임 4돌에 맞춰 연대 파업을 벌일 정도로 관계가 악화됐다. ‘중산층·서민의 정부’라는 슬로건과는 달리, 현 정부를 바라보는 중산층과 서민의 눈길 또한 곱지 않다. 위기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지지 계층은 이탈했고, 반대 세력은 더욱 완강한 반대로 돌아서 버렸다.”(〈한겨레〉 2월 26일치.)이한동은 무심코 노동자들의 거대한 힘을 인정했다. 그는 공공 부문 노동자들이 “‘국민의 발’, ‘국가의 동력’, ‘시민의 편리한 삶’을 볼모” 삼았다고 말했다. 지배자들이 그토록 괄시하던 노동자들이 다름아닌 “국민의 발”이자 “국가의 동력”이었던 것이다. 노동 계급에 대한 지배자들의 증오심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지배 계급은 자신들이 무자비하게 지배해야 하는 계급의 노동에 기초할 때만 자신들의 권력과 이윤을 유지할 수 있다. 사장들은 이런 사실에 몸서리쳤다. 경총 부회장 조남홍은 “정부는 공권력을 투입해 철도·발전 노조의 파업을 조기에 해결해야 한다.” 하고 길길이 날뛰었다. 노동자 대량해고를 통한 사기업의 이윤 증대가 사유화의 주된 목적이다. 조남홍은 사기업의 이윤 증대를 위해 ‘공권력’을 투입하라고 요구했다. ‘공권력’의 실체는 사장들의 사유재산과 이윤을 보호하기 위한 ‘사권력’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김대중의 시장주의 질주에 제동을 걸다

김대중 정부는 지난 4년 동안 친시장주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시장주의는 김대중 정부 정책의 기초였다. 이것이 흔들린다면 지도력의 위기가 가속화할 것이다. 김대중은 “지금 레임덕[임기말 권력 누수 현상]이 오면 정권이나 정부가 아닌 국가의 불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철도는 민영화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공공 부문 노동자들은 지배자들의 우선순위를 거부했다. 51시간 동안 지속된 철도 파업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언론들은 “교통대란”과 “물류대란”을 걱정했다. 철도 수송 부문의 하루 손실은 131억 9천만 원이었다. 무역협회의 한 간부는 “2∼3일만 더 파업이 지속되면 수출입 화물 운송 체계가 전반적으로 마비 상태에 빠질 수 있다.”고 실토했다. 민주노총의 한 간부는 “이제 파업하지 못하는 곳이 없어졌다.” 하고 말했다. 의미심장한 지적이다. 김대중은 영국 수상이었던 마거릿 쌔처의 모델을 따랐다. 쌔처는 노동자들의 반발을 우려해 10년에 걸쳐 각개격파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런데 김대중은 ‘쌔처의 10년’을 4년으로 단축하려 했다. 그는 단기간에 모든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김대중의 구조적 모순이자 불가피한 실책이었다. 그 결과 우파 노조인 한국노총조차 반발하게 됐다. 새로운 부문이 전투적 노동자 운동에 합류했다. 철도와 발전과 가스 노동자들은 가장 최근의 사례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계급 투쟁이 고양되는 시기에 나타나는 익숙한 패턴을 보고 있다. 선진 노동자 부문과 후진 노동자 부문이 변증법적으로 갈마들며 계급 투쟁을 이끌고 있다. 1997년 1월 대중 파업은 전통적인 제조업체(특히 자동차 부문) 노동자들 이 주축이었다. 그 뒤 신생 부문의 노동자들 ― 호텔·금융·비정규 계약직·철도·발전·가스 노동자 등 ― 이 투쟁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한편, 김대중의 사유화 밀어붙이기는 정치적 불만의 초점이 됐다. 공공 3사 파업은 노동 계급의 누적된 불만을 표현했다. 민주노총은 2월 26일에 13만 명이 참가한 연대 파업을 조직했다. 〈조선일보〉(3월 1일치)는 연대 파업에 대해 히스테리하게 반응했다. “현대·기아·쌍용 등 자동차 3사는 자신들과 전혀 무관한 철도 노조를 응원하느라 6시간 생산라인을 멈”췄다고 비난했다. 〈조선일보〉의 비난에는 노동 계급에 대한 두려움이 짙게 배어 있다. 노동자 연대, 즉 계급 투쟁이 일반화한다는 것은 다양한 부문의 투쟁이 점차 공동의 적(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해 수렴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철도 노동자들의 투지와 민주노총의 연대 파업에 밀려 파업 농성장에 경찰력을 감히 투입하지 못했다. 김대중은 26일 국무회의에서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데도 경찰력을 투입하거나 무력으로 해결하라는 것은 아니다.” 하고 말했다.

철도 노동자들의 저항 압력에 밀려 지배 계급은 분열했다. 결국 민주당 정책위 의장 박종우는 “[철도 민영화]법안 처리를 밀어붙이지 않겠으며, 다음 정부로 넘어갈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노동자들은 2월 전투에서 김대중 정부의 철도 민영화 법안 통과 시도를 저지했다. 일부 사람들은 ‘민영화’ 관련 부분이 모호하게 처리됐다고 말한다. 모호함 때문에 노조와 건설교통부는 합의문을 둘러싸고 각각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노조는 “일방적으로 추진돼 온 민영화 정책의 문제가 개선될 여지를 남겼다.” 하고 말했다. 반면, 건설교통부 장관 임인택은 “정부의 구조개혁 정신은 훼손되지 않았으며, 계속 추진한다.” 하고 강조했다. 이것은 사유화를 둘러싼 2라운드 투쟁을 예고한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2월 전투에서 사유화 계획을 관철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장주의로 치닫던 김대중은 노동자 파업에 걸려 뒤뚱거리고 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의 후퇴를 막았다. 그 결과 불안정하나마(김대중이 사유화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므로) 현상 유지 국면이 형성됐다. 합의문은 이렇듯 계급 세력 저울을 반영했다. 더욱이 김대중 정부는 사유화 반대 압력에 직면해 노동 조건 개선(3조 2교대)을 양보해야 했다. 김대중 정부의 위기는 더한층 심화됐다. 철도와 가스 부문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김대중 정부는 발전 노동자들을 사유화의 제단에 바칠 제물로 삼으려 한다. 김대중이 이 싸움에서조차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레임덕”의 늪에 깊숙이 빠져들 것이다. 김대중의 강경책은 이런 위기 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발전 노동자들은 산개 투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사유화 철회”라는 본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민주노총이 지난 2월 26일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연대 파업(적어도 1997년 1월 대중 파업 수준)을 실질적으로 조직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