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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가들을 위한 마르크스주의 입문 13:
소외의 근원

이 연재 칼럼에서 지금까지 마르크스의 소외론을 다루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 오히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전체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 나중에 다룰 변증법과 마찬가지로 ‘철학적’이고 ‘난해한’ 문제처럼 비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래에서 설명하듯이, 소외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직결돼 있다.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을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소외’라는 말이 일상 어법에서 “사람들이 멀리하거나” “버림받거나” “따돌림당한” 느낌을 뜻하는 것으로 굳어진 반면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은 일상적 의미와 관계가 있으면서도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오래된 철학적 어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청년기에(특히 헤겔의 저작에서) 유행한 어법인데, 이것도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과 관련이 있긴 하지만, 또한 상당히 다른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이 주제를 다룬 많은 학술 논평들이 이런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 결국은 마르크스의 진의를 놓치고 만다는 사실도 덧붙여야 한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소외론을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포괄적으로 설명한 것은 《1844년의 경제학·철학 초고》였다. 이 책은 마르크스가 기존의 철학·경제학·사회이론과 관련해서 자신의 사상을 설명한 초기 저작들 가운데 하나다.

기존의 철학 어법에서 인간의 소외는 인간이 ‘신’이나 ‘삶의 진정한 의미’ 또는 자기 자신의 ‘진정한 본성’으로부터 단절되고 분리됐다는 뜻이었다. 헤겔에게 소외는 이 세 가지 모두를 뜻했으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정신의 문제, 우리의 그릇된 의식과 불충분한 인식의 문제(이 문제를 헤겔 철학은 교정하려 했다)였다.

마르크스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달랐다. 그는 소외가 단지 ‘감정’이나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경제적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애덤 스미스와 데이빗 리카도의 정치경제학을 이용해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 생산물에서 소외된다는 것이 사실임을 보여 주었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제품을 소유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한다. 그 제품은 노동자들과 대립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사물’의 세계를 이룬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이 생산할수록 그들은 이 낯설고 적대적인 세계의 힘을 강화시킨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노동이 부자들을 위해 경이로운 것들을 생산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자에게는 궁핍을 생산해 준다. 노동은 왕궁을 생산한다. 그러나 노동자에게는 오두막을 생산해 준다. 노동은 아름다움을 생산한다. 그러나 노동자에게는 뒤틀리고 일그러진 것을 생산해 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 분석을 더 결정적인 단계까지 밀고 나아간다. 그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산물에서 소외돼 있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생산 행위, 노동 과정 자체에서 소외돼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생산물은 어쨌든 생산 활동의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노동을 소외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마르크스는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것[노동]은 그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노동할 때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다.” 그것은 자발적 노동이 아니라 강요된 노동이고, 강제가 사라지자마자 “그것은 전염병과 마찬가지로 기피의 대상이 된다.” 무엇보다, 노동은 노동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이고, “노동할 때 그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는다.” 잠깐만 생각해 보면,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노동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자들에게 판매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통제

이 점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노동이 인간에게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진정한 인간이 되고, 자신의 역사와 사회를 창조한다. 따라서 노동의 소외는 생산자들이 자신이 생산하는 물질적 세계로부터,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자신의 인간성으로부터, 그들 자신과 사회로부터, 그리고 자연으로부터도 ―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맨 처음으로 자연과 관계 맺기 때문에 ― 소외되고 소원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소외는 우리 사회 전체에 널리 퍼져 있다. 심지어 자본가들도 소외를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도 똑같은 과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똑같이 소외된 관계의 보수적 측면일 뿐이다.

따라서 소외론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자본주의 비판 전체가 맹아적 형태로 담겨 있다.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왜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비인간적이고 몰인정한 체제인지 보여 준다. 그리고 왜 자본주의가 산 노동을 죽은 노동에, 인간을 이윤에 종속시키는지 보여 준다. 왜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될 때조차 그들의 삶이 임금노동에 의해 뒤틀리고 일그러지는지 보여 준다. 왜 가장 친밀한 인간 관계조차 그토록 자주 상처받고 왜곡되는지 보여 준다. 왜 사람들이, 억압자들뿐 아니라 피억압자들도 서로 상대방을 그토록 야만적으로 다룰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왜 자본주의가 궁극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체제인지, 심지어 자본가들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체제인지 보여 준다. 그리고 왜 자본주의에서는 생산과 과학기술이 진보할 때마다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를 파괴하는지 보여 준다. 핵 절멸의 위협, 나찌의 홀러코스트 대량 학살, 지구 온난화의 잠재적 재앙은 모두 소외된 노동에 바탕을 둔 세계의 극단적 사례들이다.

그리고 소외가 비록 심오한 철학적 개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 모든 노동자가 즉시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이 공장에서, 콜센터에서, 수퍼마켓에서, 주방에서 경험하는 일상적 삶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모든 파업, 모든 노동조합 투쟁은 임금을 둘러싼 것이든 노동시간이나 조건을 둘러싼 것이든 부분적으로 소외된 노동에 대한 반란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소외론에는 혁명적 함의도 있다.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 사회복지의 향상, 모종의 의회 입법 그 어느 것도 소외를 극복할 수 없다. 의식이나 태도의 어떤 변화도 마찬가지다. 오직 생산관계의 질적 변화만이, 사회의 노동자 권력과 작업장의 노동자 통제만이 노동자들을 노동의 주인으로 만들 수 있고, 따라서 소외를 끝장내고 인간성의 진정한 발전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 수 있다.

주의 사항: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훨씬 더 풍부하고 복잡하지만, 지면 제약 때문에 여기서 다 다룰 수 없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마르크스의 원전을 참고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한다. 핵심 교재는 《1844년의 경제학·철학 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소외된 노동’ 부분이다. 내용이 좀 어려울 수 있지만, 읽고 나면 엄청난 보상이 따를 것이다.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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