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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는 난민으로 인정돼야 한다

탈북자는 난민으로 인정돼야 한다

정진희

최근 중국 내 탈북자들의 망명 시도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지난 3월 25명의 탈북자 망명 사건 이후 두 달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무려 8차례, 19명(5월 14일 현재)이 외국 공관에 뛰어들어 망명을 요청했다.

망명 사태가 잇따르자 중국 당국은 대대적인 탈북자 단속에 나섰다. 중국 내 외국 공관 주변의 경계는 “계엄 수준”이다. 무장한 중국 경찰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탈북자를 색출하고 있다. 심지어 탈북자 지원 단체 활동가들까지 대거 색출하고 있다. 이로써 20∼30만 명에 이르는 중국 내 탈북자들의 삶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일본 총영사관 진입을 시도한 탈북자 5명 체포 사건이 보여 주듯 망명 시도는 갈수록 위험한 모험이 되고 있다. 목숨 건 망명극과 대대적 단속이 반복되면서 근본적 탈북자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중국 당국의 자비만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 탈북자들이 국제법상 난민으로 인정받는 게 시급하다. 탈북자들이 국제법상 난민으로 인정받게 되면 난민 협약에 따라 강제 송환이 금지되고 원하는 곳으로 망명할 기회가 주어진다. 안타깝게도, 탈북자 난민 인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남한 진보 진영 내에서 그리 높지 않다. 탈북자 문제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많은 활동가들이 “냉전 우익에 이용될 우려” 때문에 탈북자 문제에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침묵이 오히려 냉전 우익을 강화시킨다. 대다수 좌파의 침묵 때문에 냉전 우익들이 인권 투사인 양 위선을 떨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일부 좌파는 아예 탈북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25명의 탈북자 망명 사건 뒤 한총련과 〈민족통신〉이 낸 논평이 전형적이다. 친북 좌파는 그 사건이 미국과 남한의 냉전 우익들이 아리랑 축전을 앞두고 민족 화해 열망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음모’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 동안 미국과 남한의 냉전 우익들이 무수한 조작 사건을 일으켜 온 것은 사실이다. 25명 망명 사건에서 모종의 개입이 있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단지 음모가 있었을 수 있다는 막연한 추측만으로 25명의 탈북자를 “조선족”(〈민족통신〉) 또는 “범법자”(한총련 대변인의 암시)로 여길 수는 없다. 우익의 지원 정도가 아니라 아예 ‘조작 가능성’을 제기하는 주장은 별로 신빙성 있어 보이지 않는다. 중국에 탈북자들이 수십만 명이나 있는데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국정원이 굳이 조선족을 탈북자로 둔갑시킬 뚜렷한 이유가 없다. 게다가 고위 관료 출신도 아닌 이들 평범한 탈북자 망명에 CIA와 국정원이 발벗고 나설까도 의문이다. 미국과 남한 당국이 평범한 탈북자 망명을 꺼린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최근 미국이 탈북자 8명의 미국행을 거부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현지 한국 대사관은 탈북자의 망명 신청을 대부분 거부한다. 탈북자들이 주로 외국 공관에 뛰어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25명 망명 사건의 진상이야 어떻든 수십만 명에 이르는 탈북자들이 죄다 냉전 우익들의 “음모”인가? 오늘날 대규모 탈북자들의 존재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친북 좌파는 몇 년 전까지는 북한의 식량난조차 ‘음모’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주장은 북한 당국이 원조를 받기 위해 식량난을 공식 인정하면서 자취를 감췄다. 도대체 친북 좌파는 언제까지 탈북자가 미국의 음모라고 주장할 것인가? 탈북자 문제에 혼란을 보이는 것은 친북 좌파만이 아니다. 탈북자의 인권 보장을 지지하는 좌파들 가운데서도 혼란이 있다. 난민 인정 요구를 “비현실적”이라며 기각하는 우리 당 인권위원회가 대표적이다. 당 인권위원 이정진 씨는 탈북자 난민 인정 요구가 “무책임한 견해”라고 비판한다. 그는 “중국과 외교관계상 현실적으로 그것[난민 인정]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자족적 선명성을 보이는 것은 결코 중요한 일이 아니”며 단속 강화로 오히려 “탈북자의 인권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비판했다(《이론과 실천》 4월호).

이것은 터무니없다. 단속 강화는 탈북자 지원 단체들 탓이 아니다. 망명 사건이 단속 강화의 계기가 된다 해서 망명 시도를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난민 인정이 중국과의 외교 관계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김대중 정부의 ‘조용한 외교’를 떠올리게 한다. ‘중국 정부를 자극하면 탈북자가 손해다’라는 게 정부의 일관된 변명이었다. 이정진 씨가 국제 난민 협약상의 난민 개념을 들어 난민 인정 요구의 ‘비현실성’을 입증하려는 것도 문제다. 국제 협약상 난민 개념이 보통 정치적 사유만 인정해 ‘경제 난민’은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당 인권위원회가 이 개념을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데 있다. 그래서 당 인권위원회의 3월 15일 논평은 사회당의 비판처럼 ‘민주노동당 인권위원회가 중국 이민국의 대변인실인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냈다. 정치적 사유와 경제적 사유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 매우 해롭다. 협소한 난민 개념을 수용하면 중국의 탈북자 탄압을 비판하기 어렵다. 중국 당국이 탈북자 탄압을 정당화하는 핵심 논리가 ‘경제 난민 불가론’이다.

오늘날 각국 정부의 난민·이민 정책의 근간이 되는 1951년 난민 협약은 냉전의 산물이다. 그것은 당시 서방 정치인들이 스탈린주의 국가들에 의한 억압을 피해 탈출한 사람들의 망명을 받아들여 동구권 진영과의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승리하려는 시도로 고안됐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엄청난 수의 난민이 쏟아지고 있다. 난민 발생은 정치적 억압뿐 아니라 경제 붕괴, 전쟁과 환경 재난 등 다양한 위기의 결과다. 북한 난민을 포함한 세계 곳곳의 난민들은 모두 다양한 위기의 희생자들이다. 협소한 난민 개념은 각국 정부가 가난한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 널리 이용된다. 최근 탈북자 망명 사건이 보여 주듯 어떤 나라도 평범한 탈북자들을 환영하지 않는다. 탈북자들의 미국행을 거부한 미국, 총영사관이 아예 중국 경찰의 탈북자 체포에 협조한 일본, 위선적인 선별 수용 정책을 고수하는 남한 정부 모두가 평범한 탈북자들을 환영하지 않는다. 냉혹한 난민 정책으로 고통받는 것은 남한의 노동자·민중처럼 평범한 탈북자들이다. 그래서 이주와 망명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오늘날 노동자들의 국제적 단결을 옹호하는 좌파의 핵심 과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