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1987년 6월 항쟁 20주년이다. 〈맞불〉은 서너 차례에 걸쳐 1987년 투쟁을 다루려 한다. 첫 순서로 6월 항쟁의 전개 과정을 개괄해 소개한다.


1987년 6월에 폭발한 항쟁은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 낸 전환점이었다.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정통성이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광주항쟁은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광주항쟁을 진압한 전두환은 여세를 몰아 사회 통제를 강화했다. 예를 들어 그해 12월까지 “노동계 정화”를 구실로 노조 결성을 금지하고 냉각기간 연장, 직권중재 확대, 제3자 개입금지 규정 신설 등을 통해 노동조합 운동을 원천봉쇄하려 했다. 삼청교육대 등 사회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조처도 추진했다.

그러나 저항은 소멸하지 않고 물밑에서 이어졌다. 광주 진압이 끝난 지 채 1~2년도 안 돼 광주와 부산의 미문화원이 불에 탔다. 노동계급을 사회 변혁의 주체로 받아들이는 투사들이 늘어났고, 개혁으로는 독재정권을 물러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많이 생겨났다. 오히려 운동이 급진화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형 비리 사건들이 터져나왔다. 1982년 무려 7천억 원 대에 달하는 장영자 사기 어음 사건에는 전두환의 친인척이 연루됐다. 권력형 비리 사건은 가뜩이나 정통성 없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대중의 증오를 부추겼다.

피플파워

이 때문에 1983년 12월 전두환은 소위 ‘유화 조치’로 대중의 불만을 달래려 했다. 시국 사건으로 제적된 학생들과 교수들이 학교로 돌아왔고 자본가 야당 정치인에 대한 정치 활동 규제도 일부 완화했다.

그러나 전두환의 의도와 달리 ‘유화 조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꼴이 됐다. 복적한 학생들은 전국적 조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 운동도 서서히 꿈틀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85년 4월에는 인천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임금 18.7퍼센트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이 파업은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이 주축이 됐다는 점, 현장조합원들이 주도력을 발휘해 노동조합을 민주화했다는 점 등에서 2년 뒤 벌어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의 모습을 미리 보여 준 것이다.

부르주아 야당은 대중의 분노를 표출해 주는 통로 구실을 하기도 했다. 1985년 2·12 총선 당시 김영삼·김대중이 합작한 신민당의 선거운동은 “금기의 언어가 표출된 공간이었다.”(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2권》)

덕분에 신민당은 총선에서 약진했고 이는 대중의 자신감을 고무했다. 1986년 2월 12일부터 시작된 신민당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명 서명운동’은 순식간에 대중의 뜨거운 지지를 얻었다. 게다가 그 해 필리핀에서 독재자 마르코스가 ‘피플파워’로 물러나는 것을 보며 대중의 자신감은 더 커졌다.

그러자 전두환은 다시 탄압을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86년 이른바 5·3 인천사태가 빌미가 됐다. 전두환은 5월 말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 문익환 목사를 구속하고 10월 28일에는 ‘건대사태’를 일으켜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인 무려 1천2백90명을 구속해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런데 전두환의 이 탄압 강화는 사실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는 꼴이 되고 말았다. 탄압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온갖 무리수가 터져나왔다. 부천경찰서에서는 여성 활동가를 ‘성고문’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급기야 1987년 1월에 박종철 씨가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정권은 이 사건들을 은폐하는 데 급급했고 오만하게도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해 민주화 요구를 사실상 무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대중의 광범한 도덕적 공분을 일으켜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1987년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은 그의 육사 동기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날 대중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서울 시내는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 전날 연세대생 이한열이 직격 최루탄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진 사건도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버스와 택시도 경적을 울리며 항의 시위에 가담했다.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항쟁은 6월 26일 전국에서 2백만 명이 참가해 절정에 올랐다.

6월 항쟁을 학생과 중간계급의 투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항쟁의 주력은 노동계급이었다. 탄압으로 진정한 조직이 없었으므로 노동자들은 개인으로서 거리에서 싸웠던 것이다.

실제로 노동자들의 참가가 항쟁의 규모와 지속성을 좌우했다. 최장집 교수는 “노동자나 기층 민중은 학생들 속에서 정치적 대변자를 찾아내고 있었다. [이런 지지 덕분에]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결집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상징적 지도부였지만 항쟁은 거의 대중의 자생성에 의존했다. 이들은 대체로 자본가 야당을 정치적 대안으로 여겼다.

자본가 야당 세력이 민중운동과 맺은 관계는 매우 모순적이고 기회주의적이었다. 이들은 애초 국본에 참가하지 않으려 했다가 나중에 운동에 올라탔다. 조현연 교수는 “[이들이] 국본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는 민중운동 세력이 지배블럭과의 협상에서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방향을 급선회한 데는 지배블럭이 민주당을 협상의 파트너로조차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국회에 설 땅이 없어지게 된 것” 때문이라고 했다.

그 후에도 자본가 야당은 투쟁을 밀고 나아가기를 주저했다. “타협과 절충은 여야 영수회담을 통해서만” 운운하며 “전국 주요 도시의 엄청나고도 과격한 시위에 대해 …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뒷걸음질치다가 급기야 6월 26일 대회 개최를 반대하기까지 했다. 6월 항쟁이 요구한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자들은 완수할 능력이 없음을 입증한 것이다. 결국 운동의 요구를 끝까지 밀고 나아간 것은 7~9월 대파업으로 일어선 노동계급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운동의 압력에 굴복해 6·29 선언을 발표해야 했다. 6·29 선언은 정권의 굴복이었을 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진출 확대로 운동이 한층 급진화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조처이기도 했다.

그러나 거리의 정치 투쟁에서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도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 점에서 6월 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고립된 별개의 투쟁이 아닌 연속적 과정이었다.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에서 묘사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호 상승효과가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노동자 대중파업이었던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6월 항쟁으로 시작된 민주화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굳힌 결정적 쐐기였다. 이 투쟁 덕분에 민주화 운동은 1960년 4월 혁명과 1980년 광주항쟁이 겪었던 반동을 피할 수 있었다.

오늘날 20년 전의 대투쟁에서 배울 것이 많지만 두 가지는 꼭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먼저, 6월의 정치투쟁에서 학생들이 한 방아쇠 구실이다. 학생들의 투쟁은 광범한 기층 민중이 투쟁에 나서도록 촉발했다.

다른 하나는 학생들의 투쟁은 노동계급과 연결될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신자유주의와 전쟁에 맞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투쟁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오늘날의 활동가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