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다


지난 두 칼럼은 옛 소련의 스탈린주의를 다뤘다. 이번 칼럼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와 운명을 다루겠다.

국제주의는 항상 마르크스주의와 진정한 사회주의의 근본 원칙이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항상 자신들의 세력을 국제적으로 조직하려 했다.

1914년에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대부분 제1차세계대전에서 자국 지배계급을 지지하며 국제주의를 배신하자 레닌은 새로운(제3) 인터내셔널의 필요성을 재빨리 깨달았다. 그러나 상황 ― 주로는 전쟁과 세력 부족 ― 때문에 이 과제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지 15개월 뒤에야 실현됐다.

1919년 3월 러시아가 내전에 휩싸여 있고 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며 고조되고 있을 때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제3) 인터내셔널 1차 대회가 열렸다. 그 대회의 목표는 각국 정당들의 단순한 연맹체 이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코민테른으로 알려지게 된 그 인터내셔널은 국제 노동계급이 전 세계에서 승리하도록 이끌 수 있는 단일한 국제 혁명 조직 ― 러시아 볼셰비키당을 세계 규모로 확대한 것 ― 이 돼야 했다.

1차 대회 당시의 코민테른은 여전히 비교적 취약했다. 러시아 공산당을 제외하면, 1차 대회에 참가한 외국 공산당 대표들은 헝가리·폴란드·라트비아·에스토니아 등 대부분 동유럽 나라의 공산당 소속이었다. 서유럽 등지에서 온 대표들은 주로 소규모 그룹이나 경향 소속이었다. 그들은 아직 제대로 정당을 건설하지 못했거나 많은 경우 아직 완전한 공산주의자들도 아니었다.

붉은 2년

그러나 1920년 7월 2차 대회 때는 대회에 참가한 공산당의 수가 크게 늘었을 뿐 아니라 공산당에 대한 노동계급의 지지도 크게 늘었다. 특히 독일에서 그랬다.

이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국제 노동계급의 조직 역사에서 최고 정점에 이르렀고, 그 때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자본가 계급의 지배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으로 등장했다.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하게 세 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난 듯했다. 세계 체제의 심각한 총체적 위기, 국제 노동계급의 전투성과 의식성의 급격한 고양, 수많은 나라 혁명적 단체들 간의 강력한 연계 구축.

비극이게도 코민테른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기회는 유실됐다.

왜 그랬는가? 근본적으로 그것은 혁명 지도부의 실패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각각 결정적 패배가 있었고, 두 경우 모두 노동계 지도자들의 수동성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19~20년의 “붉은 2년” 동안 대중파업과 대규모 공장점거가 잇따랐다. 특히, 토리노와 밀라노에서 그랬다. 그러나 주요 노동계급 정당인 이탈리아사회당 ― 코민테른 가입을 타진하던 ― 의 지도부는 손놓고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혁명적 기회가 유실됐을 뿐 아니라 끔찍한 반동적 공세가 시작됐다. 붉은 2년에 이어 검은 2년이 뒤따랐고, 검은 2년은 무솔리니 파시스트들의 권력 장악에서 절정에 달했다.

진정한 혁명 정당의 건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략적으로 뒤늦은 반면 전술적으로는 조급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혁명적 좌파는 사회당의 동요하는 개량주의 지도부와 너무 오랫동안 함께했다. 다른 한편으로 1921년에 그 지도부와 결별하고 실제로 공산당을 건설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 너무 급하게 서두른 나머지 개량주의 진영에서 끌어올 수 있는 세력을 최소화하고 말았다.

독일에서는 혁명 과정이 더 오래 걸렸지만 결과가 재앙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독일 혁명은 1918년 10월 키일 군항 수병들의 반란으로 시작됐다. 이 반란은 독일 군대 전체로 들불처럼 번졌다. 몇 주가 채 안 돼 카이저[독일 황제의 칭호]가 퇴위했고, 권력은 독일사민당 지도자들에게 넘어갔다.

1919년 1월 혁명적인 스파르타쿠스동맹(독일공산당의 전신)은 베를린에서 봉기를 일으켜 이 민주주의 혁명을 노동자 혁명으로 전환시키려 했다. 사민당 정부는 자유군단이라는 우익 민병대와 손잡고 이 때이른 봉기를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스파르타쿠스동맹의 지도자인 칼 립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당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당시 독일 최고의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혁명가였다.

사민당 정부가 지도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계속 살아남았지만, 혁명적 위기도 지속됐다. 1920년 3월 우익 민병대가 공화국을 무너뜨리려고 카프 무력정변을 일으켰지만 전국적인 총파업에 의해 좌절됐다.

그 뒤 엄청나게 성장한 공산당이 1921년 이른바 3월 행동이라는 또 다른 혁명적 공세를 감행했다. 이 투쟁도 때이른 것이었고 역시 패배했다.

독일 사회의 만성적인 불안정은 지속됐고, 위기는 1923년 여름과 가을에 극도로 악화했다. 당시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극단적이었다. 1923년 1월에 1달러당 1만 8천 마르크였던 환율이 6월에는 10만 마르크, 12월에는 4조 마르크로 폭등했다! 노동자들은 임금을 손수레로 실어 날랐고,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급증했다.

그러나 두 번이나 때이른 봉기에 실패한 공산당 지도자들은 스탈린 등 러시아 지도자들의 조언에 따라 이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결정적 순간은 그냥 지나갔고, 독일 자본주의는 적어도 5년 동안 안정을 되찾았다.

그 결과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만약 독일 혁명이 성공했다면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의 자본주의도 급속하게 무너졌을 공산이 크다. 그랬다면 강력한 혁명적 추진력이 형성됐을 것이고, 아마 오늘날 우리는 사회주의 세계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독일 혁명의 패배로 제1차세계대전 종전 직후의 혁명적 위기는 끝나고 러시아 혁명은 확실히 고립됐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관료적 퇴보와 스탈린주의 경향이 엄청나게 강화됐다.

이탈리아와 독일, 그 밖의 다른 유럽 나라들(예컨대 헝가리와 불가리아)에서 혁명이 실패한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 즉 레닌과 볼셰비키가 수십 년 동안 습득한 혁명적 전략·전술의 교훈이 채 4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유럽의 신생 공산당들에게 전수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있다.

불행히도, 그 뒤의 시기는 스탈린주의의 방법과 정책 들이 국제 운동에 전수되기가 훨씬 더 쉬웠음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 코민테른과 국제 노동계급에 미친 결과는 다음 칼럼에서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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