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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우경화하고 있는가?

유럽은 우경화하고 있는가?

이수현

지난 6월 9일 프랑스 총선에서 예상대로 시라크가 이끄는 우파가 승리하자, 유럽이 우경화하고 있다는 주장이 더욱 힘을 얻고 있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유럽연합(EU) 15개 국가 중 13개 국가에서 ‘좌파’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집권했다. 그러나 지금은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프랑스에서 우파 정당들이 집권하고 있다. 또, 각국 선거에서 극우 정당들이 약진했다. 지금 유럽에서 성과를 거둔 우파 정당들은 극우파를 본떠 난민 반대나 범죄 ‘근절’ 캠페인을 강력하게 추진한 정당들이다. 네덜란드 기독민주당은 핌 포르타운이 한 주장을 그대로 흉내냈다. 독일 기독민주당은 총리 후보로 강경 우파인 에드문트 슈토이버를 선출했다.

반면,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심각한 지지율 하락과 이데올로기 혼란에 시달리고 있다. 당원 수도 줄어드는 추세다. 이들이 위기에 빠진 이유는 자기 지지자들, 특히 노동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해 노동자들을 배신했다.

이런 배신은 노동당 소속 총리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영국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조스팽도 임시직과 계약직을 늘려 고용 불안을 증대시켰고, 전임 우파 정부들보다 더 많은 기업을 사유화했다. 지난 달 네덜란드 노동당 연립 정부가 선거에서 패배한 주된 이유는 네덜란드에서 병원 치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교통 체계가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4~5년 전에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집권하게 만든 좌경화 물결이 지금은 그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있다.

사실, 몰락한 사회민주주의 정부와 새로 집권한 보수 우파 정부 사이에는 실질적인 차이가 거의 없다. 스페인의 아스나르나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같은 우파 총리들과 영국의 총리 토니 블레어가 추구하는 정책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이들 모두가 난민과 이민자들을 희생양 삼고 있다. 또, 노동자의 권리를 제한하고 복지 혜택을 공격한다.

사람들 대부분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추진한 조치들 때문에 노동 조건이 나빠지고 살기가 더 힘들다고 느낀다. 사람들이 그런 ‘좌파’ 정당들을 외면한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최근 눈에 띄게 높아진 선거 기권율로도 나타났다. 작년 영국 총선과 6월 9일 프랑스 총선에서 기권율은 각각 41퍼센트와 36퍼센트나 됐다.

양극화

지난 5년 동안 유럽의 다양한 좌파 조직들이 선거에서 표를 더 많이 얻었다. 작년 영국 총선 직후 〈파이낸셜 타임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노동당은] 전례 없이 많은 표를 극좌파에게 빼앗긴 듯하다. 유권자들이 이렇게 파편화하는 현상은 전후 영국 정치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5월 지방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동맹(SA)이 얻은 표는 지난해 6월 총선 결과보다 진일보한 것이다.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주사회당(PDS)은 옛 동독 지역에서 상당한 표를 얻고 있고 옛 서독 지역에서도 지지를 얻고 있다. 이탈리아의 리폰다찌오네(재건공산당)는 반자본주의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인지도와 지지율을 높이고 있다.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 정당들인 노동자투쟁(LO)이나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CR), 스코틀랜드 사회당, 영국의 SA가 모두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극좌파의 선거 도전이 늘고 있다.

그러나 정치를 단순히 부르주아 민주주의 선거 제도나 구조로 환원할 수 없다. 선거에서 극좌파가 거둔 성공은 더 심오한 차원의 급진화를 반영한다. 노동계급의 저항이 성장하고 있다.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최근 이탈리아에서는 3백만 명이 시위를 벌였고 하루였지만 1천3백만 명이 총파업을 감행했다. 독일 금속 노동자들은 중요한 임금 인상 투쟁에서 승리했다. 더디긴 하지만 영국 노동자들도 전투성을 회복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유럽의 변화는 정치 일반의 우경화가 아니라 정치 양극화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고 해서 극좌파가 저절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조스팽이 선거에서 패배한 다음 주에 사회당은 입당 신청을 1만 5천 건이나 받았다고 밝혔다. 르펜이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 사회당이 반파시즘 분위기에 편승한 것이다. 정치 양극화 때문에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대중 사이에 긴장이 흐르고 있다. 이것은 갑작스런 정치 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극좌파가 진정한 대안을 제시해 사회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을 때만 사회민주주의의 영향력은 사라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가지 위험이 있다. 하나는 사회민주주의가 노동계급 운동에 계속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런 영향력에 굴복해, 자신의 지론과 다르게 실천상으로 추수(뒷꽁무니 좇기)하는 것이다. 독일 PDS는 베를린 시를 장악하고 있는 사회민주당과 손을 잡았다. 그러나 베를린 시의회는 긴축 재정을 밀어붙이고 있다. 조스팽의 ‘복수 좌파’ 연정에 참여한 녹색당 지도자들은 지금 새로운 ‘복수 좌파’에 합류하라고 극좌파에 요구하고 있다. 조스팽의 잘못을 고스란히 반복하라는 것이다. 지금 체제에 대한 반감과 불만은 널리 퍼져 있다. 무엇보다도 반자본주의 운동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 젊은이들 수십만 명이 점점 더 커다란 반체제 세력으로 발전하고 있다. 지난 3월, 50만 명이 참가한 스페인 바르셀로나 시위는 작년에 30만 명이 참가한 제노바 시위 규모를 뛰어넘었다. 올해 영국 런던의 메이 데이 시위는 노동조합원들과 반자본주의 활동가들이 단결한, 몇 십 년 만에 벌어진 최대 시위였다. 지난 달 독일 베를린에서는 부시의 방문을 반대하는 두 차례 시위에 각각 10만 명과 5만 명이 참가했다. 반자본주의 운동은 9·11 사건으로 약해지기는커녕 부시가 벌이는 전쟁에 반대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지지하는 투쟁으로 더욱 달아올랐다.

6월 20일 스페인에서는 노동 기본권과 실업자들을 공격하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총파업이 벌어졌다. 또한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깃발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행진했다. 런던에서는 난민 방어 시위와 행진이 있었다. 이런 시위들은 지금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운동의 일부다. 그 운동은 희생양 만들기, 전쟁, 공공 복지와 연금 공격, 그리고 이 모든 공격의 배후에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한다. 바로 이런 아래로부터의 운동이야말로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음울한 미래와는 사뭇 다른 미래를 바라는 사람들의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