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주의는 오늘날 세계 진보진영의 주요한 흐름 중 하나이다. 자율주의자들은 이른바 “다중의 자율성”을 공통적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그 중 네그리와 하트 같은 이들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의 현재적 타당성을 부정하는 반면, 클리버나 홀러웨이, 본펠드 같은 이들은 이를 부분적으로 인정한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노동가치론을 부정하는 이들까지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라고, 즉 마르크스주의의 한 갈래에 포함시키기보다 그냥 “자율주의”라고 불러주는 것이 맞다.

6월 말 열린 ‘제3회 맑스코뮤날레’에서 한국의 대표적 자율주의 논객들인 조정환과 정남영은 오늘날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면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이 폐기되고 있다는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을 반복했다. 그런데 네그리와 하트는 더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자처하지 않지만, 우리 나라에서 이들을 추종하는 이들 중 다수는 이들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한 것을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주장하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과 《다중》에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이 오늘의 변화된 세계를 설명할 수 없게 됐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했다. 네그리와 하트는 오늘의 변화된 세계의 특징을 지식노동(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 등)이나 감성노동(패스트푸드 업체 점원, 성노동자 등) 같은 비물질노동이 물질노동보다 중요해졌다는, 소위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명제로 요약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하에서는 IT(정보통신) 산업 노동자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자유시간)의 구분이 모호해진다고 주장했다.

또,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 정보재와 같은 비물질노동의 생산물은 일단 개발하면 거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복제할 수 있으며, 그것의 생산에서 이른바 “일반 지성”이 결정적 구실을 하기 때문에 물질적 재화의 가치처럼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그 크기를 규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 자본주의 내에서도 기계화·정보화의 진전에 따라 마르크스의 가치법칙, 즉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 규정이 지양·폐기되는 국면,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자체가 초월되는 국면이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1857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기계에 관한 단상’을 그 전거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명제는 조금도 새로운 것이 아니며, 다니엘 벨 같은 부르주아 사회과학자들이 “탈산업사회론”이나, “정보사회론”, “신경제론” 또는 “지식기반경제론” 등의 이름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주장해 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들은 1970년대 이후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국면에 대처하려는 지배계급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판명된 지 오래이다. 그런데도 네그리와 하트의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명제가 뭔가 색다르게 들리는 점이 있다면, 이 낡아빠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비물질노동”이나 “헤게모니” 같은 마르크스주의적 용어로 치장해서 진보진영의 담론 속에 잠입시켰기 때문이다.

“일반 지성”

네그리와 하트는 물질/비물질 노동의 이분법으로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해석하고, 마르크스의 가치론이 역사적으로 타당했던 시기를 “물질노동의 헤게모니” 국면으로 한정하는데, 이는 마르크스의 가치론에 대한 무지와 왜곡을 잘 보여 준다.

마르크스의 가치론에서 결정적인 것은 무엇이, 즉 어떤 소재(물질 또는 비물질)가 생산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산관계에서 생산되는가 하는 것이다. 물질/비물질노동의 이분법은 마르크스 자신이 《잉여가치학설사》에서 비판한 아담 스미스의 접근이다. 마르크스는 비물질이 생산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임금노동에 의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생산된다면, 그 비물질에도 가치와 잉여가치가 체현돼 있다고 보았다.

또, 물질노동이든 비물질노동이든, 자본주의에서, 즉 착취와 억압에 기초한 사회에서 노동이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다는 자율주의자들의 주장 자체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문제설정이나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 물질/비물질 노동의 이분법은 마르크스의 문제설정과 무관할 뿐 아니라 역사적 자본주의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사적 자본주의에서 물질노동과 비물질노동은 처음부터 결합돼 있었으며, 오늘날도 비물질노동은 물질노동의 기초 위에서, 또 그것과 융합돼서만 수행될 수 있다. 예컨대 콜센터의 비물질노동은 컴퓨터나 전화, 광케이블 같은 물질적 생산수단과 결합돼 이루어진다.

지난 세기 말부터 러시아·동유럽·중국·인도 등지의 노동력이 글로벌 노동시장에 편입되면서 전 세계에서 물질노동은 곱절로 늘어났으며, 21세기 “신경제”와 “디지털혁명”이 운운되는 속에서도 19세기형 “혹사공장”이 다시 늘어나고 있다. 물질노동에서 비물질노동으로의 헤게모니 이동은 자율주의자들의 관념 속에서나 존재한다. 

또, 자율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중 ‘기계에 관한 단상’에서의 언급을 근거삼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틀 내에서도 기계화의 진전이나 “일반 지성”의 확산에 따라 가치법칙, 즉 노동시간에 의한 상품 가치의 규정이 폐기된다고 주장한 것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거두절미식 인용과 오독 또는 왜곡의 전형이다. 마르크스가 그 부분에서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에서 기계화의 진전이나 “일반 지성”의 확산이 자본주의의 지양·초월을 위한 물질적 전제를 준비한다는 점이었지, 이것이 가치법칙과 자본주의의 자동적 폐지를 가져온다는 점은 아니었다.

그리고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은 어디까지나 발표되지 않은 초고로서, 그 중요성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0년 후인 1867년에 출판한 《자본론》 1권에서 기계화의 진전에 따라 자본주의가 자동으로 폐지되기는커녕 기계화가 노동생산성 향상에 기초를 둔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의 메커니즘으로 뿐 아니라 노동시간 연장, 노동강도 강화 같은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의 수단으로서도 작동함을 논증하고 있다. 즉, 마르크스는 가치법칙이 기계화의 진전에 따라 축소·지양되는 것이 아니라, 더 완성된 형태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사실, 지난 세기 말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나 오늘날 한미FTA를 두고 상품화, 가치법칙의 작용 범위가 글로벌 차원으로 확장·심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주의자들처럼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관철이나 “가치법칙의 소멸”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강변한다면 지나가던 소도 웃을 것이다.

잉여노동시간

또,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에서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일이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 나뉘기 때문에 노동이 원천적으로 저렴하므로, 노동 절약의 수단인 기계를 도입하는 데서 공산주의 사회와 비교해 근본적 한계가 있다는 점을 논증했다. 이는 자본주의 틀 내에서도 기계화·정보화가 자본주의를 지양할 수 있을 정도까지 극한적으로 진전될 수 있다는 자율주의자들의 관념을 앞질러 논파한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 규정, 즉 가치법칙의 필연성을 부정하는 자율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이후 사회, 즉 공산주의 상도 “노동일의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의 적대적 분리의 폐지”로 사고할 수 없다.

자율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고타강령 비판〉에서 제시한 노동시간 단위 계산에 의거한 경제 조절 원리를 스탈린주의 명령경제의 기원으로 간주한다.

자율주의자들은 자본주의 틀 내에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가치법칙이 지양돼, 이른바 “다중 네트워크”라는 자신들의 대안 체제가 자생적으로 형성·확산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유주의 “워싱턴 컨센서스”를 대신해 세계 지배계급의 새로운 전략으로 정착되고 있는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의 핵심 전략 중 하나가 바로 그와 같은 “다중 네트워크”조차도 이른바 “사회적 자본”으로 편입·전화시키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오늘날 자율주의가 이미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의 일환으로 기능하고 있다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자율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양립 불가능성, 소위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정치적 불가능성을 재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 정성진 교수는 ‘다함께’가 주최하는 진보 포럼인 ‘맑시즘2007’에서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말한다’(7월 17일 오후 2시 45분)라는 주제로 연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