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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는 맑시즘 2007 ①:
사회 변혁의 전략과 전술

[편집자] 맑시즘 2007에서 존 리즈와 린지 저먼이 한 연설들을 4주에 1번씩, 네 차례에 걸쳐 실을 예정이다. 이 글은 그 첫 순서로 존 리즈가 연설한 ‘사회 변혁의 전략과 전술’을 녹취한 것이다. ① 사회 변혁의 전략과 전술(존 리즈) ② 사랑, 결혼, 그리고 가족(린지 저먼) ③ 현대 제국주의의 정치와 경제(존 리즈) ④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린지 저먼)

전략과 전술은 원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이 처한 조건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흔히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와 의식이 사뭇 다르다는 데서 비롯합니다. 우리는 노동계급이 계급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 그들에게 이롭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적 시기에 대다수 노동자들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익 평론가들과 학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이렇게 비난합니다. “당신들은 노동자들의 이해관계가 사회주의와 직결된다고 하지만, 노동자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들에게 투영하는 환상일 뿐이야.”

그러나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의식 간의 차이는 사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늘 접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흡연자들을 봅시다. 이들의 이해관계가 어디 있는지는 너무나 명확하지요. 모든 담배갑에는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 특히 임신부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롭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흡연자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의식은 사뭇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어쨌든 담배를 피웁니다. 이 사회가 사람들에게 엄청난 압력과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일부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반대하거나 보수 정당에 투표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이해합니다. 그 영향 때문에 일부 노동자들은 노조에 반대하거나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그들의 실제 이해관계와 혼동하지 않습니다.

즉, 노동계급의 의식은 늘 복합적이고 모순돼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때때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합니다.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파업에 참가하고, 사회주의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때때로 그들을 다른 방향으로 이끕니다. 따라서 우익들이 바라는 노동자들의 모습, 즉 항상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이고, 자본주의적 가치를 찬양하며, 사용자들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전혀 현실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한편, 아나키스트들이 바라는 노동자들의 모습도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자들이 언제나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고, 자생적으로 반란에 나서고, 늘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울 준비가 돼 있다고 봅니다.

진실은 이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특정 조건에서 일부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울 준비가 돼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조건에서, 즉 다른 장소, 다른 시간, 다른 쟁점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려 하지요. 즉, 노동계급의 의식은 늘 불균등합니다.

불균등

레온 트로츠키는 이 현실을 아주 명쾌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젊었을 때 만난 5명의 노동자들을 통해 사회주의 조직이 필요한 이유를 모두 알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만난 첫번째 노동자는 훌륭한 투사였습니다. 그 노동자는 늘 파업에 적극적이었고, 사용자들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싸웠습니다. 또,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에 언제나 항의했고, 사회주의를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완전히 반동적인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노조에 대해 적개심을 불태웠고, 성차별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였습니다. 심지어 죽어서도 천국 정문에서 파업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파업 파괴자로 활동할 준비가 돼 있는, 진정으로 반동적인 노동자였죠. 그리고 나머지 3명의 노동자들은 이 두 노동자 사이에서 오락가락했습니다. 때로는 사회주의 노동자 편에 서서 반동적 노동자를 고립시키기도 하고, 또 때로는 반동적 노동자 편에 서서 사회주의 노동자를 고립시키기도 했습니다.

사회주의 조직의 임무, 즉 사회주의 조직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사회주의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조직·사상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 노동자는 중간에서 동요하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반동적 노동자를 고립시킬 수 있는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반동적 노동자가 사회주의 노동자를 고립시키는 상황을 막을 수도 있지요.

따라서, 전략과 전술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최초의 교훈은 전투적 소수, 계급의 선진적 소수가 게오르그 루카치가 말한 대로, “조직으로 뭉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전투적 소수가 독자적인 모임을 갖지 않고, 독자적 목소리가 담긴 기관지를 발행하지 않고, 통일된 선동과 전술을 제시하지 않고, 하나의 조직으로 뭉쳐 있지 않다면, 중간에서 동요하는 노동자들을 이끌 기회와 능력도 가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지도 않겠지요.

이것은 사회민주당이나 노동당의 조직관과 매우 다릅니다. 사회민주당이나 노동당은 전투적 소수를 조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노동계급 전체의 의식을 반영하려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들은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인 사회 환경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불균등하고 혼란된 의식을 그저 반영하려 할 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단지 선거에서 이기는 것뿐이라면 이것이 큰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거에서 많은 표를 얻는 데 필요한 것은 현재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는 소수를 지도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은 흔히 유권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여론조사 결과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지요. 그들은 “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국내 이주에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하고 말하는 유권자에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고 맞장구칩니다. 그러나 “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에 들어와 우리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에 결사 반대합니다” 하고 말하는 유권자를 만나면, 이 때도 그들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고 맞장구칩니다. 또 다른 노동자가 그들에게 “나는 노동조합을 전적으로 지지해요” 하고 말하면, 역시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고 맞장구칩니다. 누군가 “나는 노동조합을 결사 반대합니다” 하고 말해도 이들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고 맞장구칩니다.

그러나 혁명정당은 이와 달라야 합니다. 혁명정당은 원칙에 충실해야 하고, 다른 노동자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전투성을 고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혁명정당은 전투적이고 조직된 소수인 계급의 전위가 다수의 노동계급과 연관 맺는 원칙적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 공산당이 창당될 때, 공산주의자들은 이탈리아 사회민주당, 즉 사회당에서 분열해 나왔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사회당의 지도자는 투라티였지요. 레닌은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에게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투라티와 단결하려면, 투라티와 결별해야 한다.” 레닌은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에게 전투적 소수의 독자적 정당, 계급의 전위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은 독자적 정당을 건설하자마자, 여전히 투라티를 따르며 사회당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행동을 통해 연관 맺을 방법들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공동전선 정책의 핵심입니다.

전위 정당의 전투적 소수는 아직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지만 특정 쟁점들에서 함께 행동할 생각이 있는 사람들과 행동을 통해 단결할 방법들을 찾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독자적 조직을 건설하면서도 개량주의 조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나 아직 조직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과 전쟁, 노동조합과의 연대, 이주노동자와의 연대, 인종차별 반대 등의 쟁점을 둘러싸고 함께 고민하고 행동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공동전선을 통해 우리 정당의 당원이 아닌 노동자들과도 많은 쟁점에서 함께할 것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는 전투적 소수를 조직하는 것과 또 그 소수가 다수의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것, 이 두 길을 모두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기란 참으로 어렵지요.

종파주의와 기회주의

여기엔 두 가지 위험이 따릅니다. 첫째는 종파주의입니다. 이것은 광범한 운동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둘째는 기회주의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데 몰두한 나머지, 전투적 소수를 결집해 독자적 조직을 건설하는 과제를 잊는 것이지요.

예컨대 1921년에 독일 공산당은 3월 행동을 조직하는 데서 종파적 오류를 범했습니다. 광범한 노동계급 운동의 정서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 총파업을 호소한 것입니다. 독일 공산당에게는 총파업이 필요하다는 당위적 관점만 있었을 뿐, 전체 노동계급의 실제 의식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없었습니다. 노동계급이 공산당의 총파업 호소에 호응하지 않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공산당은 여기서 더 나아가 실업 노동자들을 동원해 취업 노동자들이 일을 못하도록 공장 정문에 바리케이드를 쌓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노동계급과 공산당 모두에게 재앙이었습니다.

1926년 총파업 당시 영국 공산당이 범한 오류는 정반대 사례입니다. 정부의 압력에 밀린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총파업을 중단하자, 영국 공산당은 이에 반대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트로츠키는 당시 영국 공산당이 왜 이런 행동을 했는가를 살펴봤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먼저 정부는 우파 노조 지도자에게 압력을 넣고, 우파 노조 지도자는 좌파 노조 지도자에게 압력을 넣었습니다. 좌파 노조 지도자는 현장조합원 운동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넣고, 현장조합원 운동 지도자들은 공산당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결국 맨 마지막에 공산당이 굴복했습니다. 당시 영국 공산당은 독립적 소수로서 행동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넘어지는 도미노가 아니라 넘어지지 않고 나머지 도미노들을 일으켜 세우는 구실을 했어야 했던 것이지요.

이 사례는 우리에게 기회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려 줍니다. 그 위험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정부 같은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투쟁 속에서 바로 우리 곁에 서 있는 사람에게서 오기 마련입니다. 만일 영국 총리 고든 브라운이 저에게 전화해 “전쟁 반대 선동은 그만해도 될 것이오. 왜냐하면 나는 전임 총리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오” 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저에게 전혀 압력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좌파 노동당 의원들을 구슬리고, 좌파 노동당 의원들은 전쟁저지연합을 지지하는 노조 지도자들을 설득하고, 또 이들이 자신의 조합원들을 설득하고, 결국 현장조합원들이 우리에게 고든 브라운이 한 것과 똑같은 말을 한다면, 이것은 전쟁저지연합에 진정한 압력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공동전선을 일종의 다리라고 생각한다면, 여기엔 두 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아예 다리를 놓지 않을 위험입니다. 1921년에 독일 공산당은 자신과 나머지 노동계급 사이에 다리를 놓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다리를 놓으면 사람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다리를 옮겨다닐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사람들을 이끌어 다리를 건너게 할 수도 있지만, 거꾸로 우리가 사람들에게 이끌려 다리를 건너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정당을 건설하면서도 종파주의와 기회주의의 위험을 피해 공동전선 전략을 올바르게 실천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성공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운동의 역사를 이해하는 조직을 건설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1921년 3월에 독일에서 있었던 일을, 또 1926년에 영국에서 있었던 일을 이해한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이 크게 낮아집니다. 이 조직은 우리가 당면 문제를 다루는 데 필요한 언어, 관점, 공통의 이론을 제공할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독일 급진 운동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매우 긴밀히 협력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매우 용기 있는 지도자임에는 틀림없지만, 동시에 그에게 한 가지 약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리프크네히트가 잠자리에 들기 전과 자고 일어난 뒤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곤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카를 리프크네히트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다음 번에 우리가 두 입장 사이에서 동요하는 누군가를 본다면, 우리는 그에게 “너, 리프크네히트처럼 행동하지 마”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알지 못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반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실수가 과거에도 저질러진 실수임을 깨닫기 힘들 것입니다.

둘째로 조직에는 단지 역사와 전통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투쟁에 지속적으로 관여하는 조직원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현실의 투쟁에 관심이 없고 관여하지도 않는다면,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가 문제를 다룰 때 판단의 근거가 될 경험을 얻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20년 넘게 투쟁에 관여하고 있는 활동가가 있는 게 중요합니다. 그들은 거대한 대중 운동과 대중 파업이 어떤 것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은 1921년과 1926년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뿐 아니라 오늘날 투쟁과 노동계급 운동의 산 경험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 관한 토론을 들었습니다. 연사인 최일붕 동지뿐 아니라 당시 자동차 공장 노동자나 학생이었던 활동가들의 경험도 들을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노동운동 안에서 ‘다함께’가 하듯이 집단적 투쟁의 경험을 종합할 수 있는 곳은 흔치 않습니다.

셋째, 우리는 규율있고 민주적으로 집중된 조직을 건설해야 합니다. 규율 없는 경험은 무용지물입니다. 어떤 사람은 민주집중제를 스탈린주의처럼 지도자가 회원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이해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레닌은 민주집중제를 완전히 다르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완전한 토론의 자유에 이어서 철저한 행동 통일이 뒤따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완전한 토론의 자유가 없다면 어떻게 그 모든 집단적 경험과 의견이 의사결정 과정에 반영되고, 진정한 역사적 경험으로 승화될 뿐 아니라 우리의 현재 조건과 우리가 직면한 문제에 적용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중앙집중주의가 없다면 민주적일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결정을 내렸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민주주의일 수 있겠습니까? 민주주의라면 우리가 결정을 내리면 모두 그 결정을 따라야 합니다.

민주적 중앙집중제

우리가 집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일례로 우리가 한 가지 결정을 내렸고 그것이 실수였다 칩시다. 만약 조직의 절반이 한 가지 실천을 하고 나머지 절반이 다른 실천을 한다면 우리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결정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분열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실수를 범하더라도 우리는 집단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트로츠키가 말한 다섯 명의 노동자들 사례를 떠올려 봅시다. 사회주의 노동자가 이렇게 말한다 칩시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해. 아니지, 저렇게 해야 해. 아니지 이렇게 해야 해.” 그럼 다른 세 명의 노동자는 “도대체 뭘 하자는 거야? 차라리 반동적 노동자의 말을 듣는 게 낫겠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조직이 단결돼 있지 않다면 결코 아무도 지도할 수 없고 그걸로 끝장입니다.
당을 건설하고 노동계급 다수와 관계를 맺는 것은 노동계급의 전투성과 의식을 끌어올리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깨닫는 것과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공격당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공격당할 때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 맞서 싸우려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개인 수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례로 이번 토론이 끝난 후 제가 건물 밖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야구 방망이를 든 미치광이가 부리나케 저한테 달려온다고 칩시다. 그가 저를 공격할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미치광이는 야구방망이가 있는데 저는 맨손입니다. 저는 겁이 나서 도망갈 것입니다. 때때로 거대한 힘에 의해 공격당하면 노동자들은 도망갑니다. 싸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버스 정류장에 서 있고 저도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할지 한동안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제가 기관총을 들고 있고 미치광이는 야구방망이밖에 없다면 저는 반드시 미치광이와 맞서 싸울 것입니다. 저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해치울 수 있습니다. 노동계급 운동에서 자신감을 가진다는 것은 때로는 누가 야구방망이나 기관총을 가지는지와 연관이 있을 수 있지만 보통은 누가 승리에 필요한 조직·사상·전략을 가지고 있는지와 더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혁명 조직과 공동전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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