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노동계급이 겪은 최악의 패배인 히틀러와 나찌의 집권은 20세기에 인류가 겪은 최악의 재앙인 제2차세계대전, 그리고 인류에 대한 최악의 범죄인 홀러코스트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그래서 이 사건들의 연관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문제들을 많이 제기한다. 나찌 현상의 원인은 무엇인가? 나찌 운동의 성격은 무엇인가? 나찌는 어떻게 권력을 잡을 수 있었는가? 나찌를 저지할 수는 없었는가? 그런 일이 또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런 일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과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이 모든 문제들을 이 짧은 칼럼에서 제대로 다룰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나는 나찌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요점들을 자세히 설명하려 한다. 그것은 위의 문제들에 대한 더 충분한 답변의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분석은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게 되는 시기인 1929~33년에 레온 트로츠키가 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런 분석은 나찌즘에 대한 부르주아적 해석이나 정설 공산주의, 즉 스탈린주의적 해석과 관련지어서, 그리고 그 해석들과 대조해서 이해할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수많은 신문 기사, 책, 영화, TV 프로그램 등에 등장하는 나찌즘에 대한 부르주아적 견해는 이렇다. 나찌즘은 독일의 민족성(예컨대 권위주의·군국주의·잔인함 따위)이 표출된 것이라거나 히틀러라는 악마 같은 천재 개인의 산물 ― 히틀러가 사악한 웅변술로 독일 국민 전체를 호렸다는 것이다 ― 이라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상호모순적인 이 두 견해는 사회 세력이나 경제와의 연관, 특히 자본주의 체제와의 연관을 완전히 외면한다는 점에서 상호보완적이다.

웅변술

그러나 단순하고 분명한 두 가지 사실이 이 부르주아적 견해가 모두 틀렸음을 보여 준다. 첫째, 독일의 나찌즘은 국제 파시스트 운동의 일부였다. 파시스트 운동은 단지 독일에서 시작되거나 끝난 것이 아니다. 이른바 ‘온건한’ 나라라는 영국을 포함해 거의 모든 나라에 존재했고(물론 강력함의 정도는 조금씩 달랐지만),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의 집권과 함께 시작됐다.

둘째, 히틀러와 그의 나찌당은 1929년 10월 월스트리트의 주가 폭락과 함께 시작된 국제 경제 위기 이후에야 독일에서 진정한 정치 세력이 될 수 있었다. 그 전에는 히틀러의 이른바 강력한 웅변술도 독일 국민에게 거의 효과가 없었다.

트로츠키를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두 파시즘이 제1차세계대전 뒤에 자본주의 체제를 사로잡은 국제적 위기의 산물이자 그에 대한 대응이라고 보았다. 파시즘은 의회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반동적 독재 체제를 수립하고, 노동계급을 분쇄함으로써 그런 위기를 자본에 유리하게 해결하려는 노력이었다.

트로츠키는 이런 일반적 분석에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덧붙였다. 그는 파시즘이 단지 자본가 계급 전체 또는 심지어 일부 대기업들이 추진한 정책이나 정치 경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오히려 파시즘은 하층 중간계급, 즉 쁘띠부르주아지를 기반으로 하는 진정한 대중운동으로 시작됐다.

이 계급은 경제 위기 때 심각하게, 그리고 특별하게 고통을 겪었다. 한편으로 그들은 위로부터 은행과 거대 독점기업 들에게 짓밟히고, 다른 한편으로 아래로부터 노동조합과 조직 노동계급의 압력에 시달린다. 경제 위기 때문에 절망에 빠지고 양대 계급 사이에 끼여 괴롭다고 느낀 쁘띠부르주아지는 “광포해져서” 파시스트의 데마고기에 넘어가는 비옥한 토양이 됐다.

이런 계급 기반이야말로 파시스트와 나찌의 이데올로기 ― 유대인 혐오를 비롯한 ― 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한편으로, 파시스트와 나찌는 ‘반(反)자본주의적’ 미사여구를 사용하지만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국제 자본이나 금융 자본을 비난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공산주의·사회주의·노동조합에 격렬하게 반대한다는 점이다. 이 두 요소를 결합시키면, 적어도 파시스트의 머리 속에서는 유대인 혐오가 떠오르게 된다. 즉, 금융 자본과 공산주의의 배후에는 유대인들의 사악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어쨌든, 로스차일드와 마르크스는 모두 유대인이 아니냐는 식으로). 결국, 국가·민족·지도자·인종이 계급을 초월하는 신화적 존재로 격상된다.

노동자 공동전선

쁘띠부르주아지라는 기반은 또, 파시즘이 운동으로 발전하는 데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파시즘이 아무리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모은다 해도 파시즘 자체로는 권력을 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층 중간계급은 자본가 계급을 타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이 집권하려면 1932년 가을 독일에서 그랬듯이 대자본가들에 의해 “끌어올려져야” 한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극단적인 압력을 받아야만, 그리고 위기가 너무 심각해서 더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것과 파시스트들을 이용해 노동계급 조직들을 분쇄하는 모험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위험한 외부 세력에게 국가 통제권을 부분적으로 넘겨주는 모험을 감행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파시스트들도 거리에서 노동자 조직들을 공격하는 실천적 능력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이 지배계급의 후원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쁘띠부르주아지라는 기반 때문에 파시즘은 대자본가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 덕분에 지배계급은 ‘보통의’ 경찰이나 군사 독재로는 얻기 힘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작업장·지역사회·거리에서 경찰이나 군대의 단순한 외부 개입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노동자 조직들을 분쇄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기층 수준에서 활동하는 파시즘의 대중적 간부층 덕분이다.

트로츠키가 그의 탁월한 저작 《독일의 반파시즘 투쟁》[발췌 국역: 《트로츠키의 반파시즘 투쟁》, 풀무질]에서 자세히 발전시킨 이와 같은 분석은 파시즘의 본질을 잘 포착했을 뿐 아니라 파시즘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지도 보여 주었다.

첫째, 파시즘은 모든 노동자 조직들에게 치명적 위협이기 때문에 파시즘에 맞서 노동계급을 최대한 단결시킬 수 있는 노동자 공동전선을 건설해야 한다.(1929~33년에 스탈린주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곧 사회(주의) 파시스트라는 초좌파적 개념 때문에 그런 단결을 파괴했다.)

둘째, 사회주의적 좌파가 자신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만성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세력임을 입증할 수 있다면 쁘띠부르주아지를 노동계급 편으로 끌어당기거나 적어도 중립을 지키게 할 수 있다. 결국, 이것은 그들이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능력을 실천에서 입증한다는 것을 뜻했다.(또다시 나중에 스탈린주의는 ‘진보적 부르주아지’와 동맹하는 민중전선 정책을 통해 그런 능력을 억눌렀다.)

이런 교훈들이 오늘날에도 현실 관련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체제의 위기는 비록 1930년대만큼 첨예하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따라서 파시즘의 위협도 민족성이나 지도자 개인들과 무관하게 여전히 존재한다. 파시즘의 위협이 아직 눈앞에 닥치지 않았더라도, 노동계급의 강력하고 단결된 행동으로 그 위협을 미연에 방지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파시즘의 위협을 영원히 제거하려면, [홀러코스트 같은 비극이] “절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Never Again)는 구호가 영원한 현실이 되도록 만들려면, 파시즘을 키우는 토양인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파괴해야 한다.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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