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노동조합이 하는 구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노동조합에서 사회주의자들이 하는 구실은 항상 전략·전술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태도는 개혁주의자들·아나키스트들·신디칼리스트들과 여타 급진파들의 태도와 사뭇 다르다.

역사적 경험을 보면, 거의 모든 나라에서 노동계급이 선택한 조직 형태 가운데 가장 초보적이고 가장 광범한 조직 형태가 노동조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조합의 근본 기능은 노동자들이 일자리·임금·노동조건을 방어하고 개선하기 위해 사용자들에 맞서 단결해 투쟁하는 것이다.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조합원들이 의식하든 안 하든 노동조합 운동의 출발점은 계급투쟁이다. 즉,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먹고사는 노동자들과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증대시켜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애쓰는 기업주(자본가)들 사이에는 상시적이고 근본적인 이해관계의 충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계급투쟁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조합 조직과 노동조합 투쟁을 강력하게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그런 투쟁이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말이다. 대체로는 그렇다. 그러나 아주 가끔 노동조합이 반동적인, 예컨대 인종차별적이거나 여성차별적인 운동을 펼칠 때도 있다.)

노동조합 운동의 기본 원칙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등 ― 은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원칙이기도 하다. 물론 분명히 마르크스주의의 원칙들은 노동조합 운동의 원칙들을 넘어선다.

이렇게 노동조합 운동을 열렬하게 지지하는 태도는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다양한 경향들을 구분하는 특징이었다. 일부 사회주의 종파들(예컨대 19세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조합 운동이 노동자 대중의 처지를 전혀 개선시킬 수 없다며 노동조합 운동을 배척했다.

그들이 내세운 근거는 노동조합 투쟁으로 임금이 인상되더라도 물가가 오르면 도로아미타불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소책자 《임금, 가격, 이윤》에서 이런 주장을 낱낱이 논박했고, 역사도 마르크스가 옳았음을 분명히 입증했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이 문제를 재론하지는 않겠다.

혁명가나 급진주의자를 자처하는 일부 사람들은 노동조합 투쟁이 단지 집단 이기주의일 뿐이라거나 노동조합 투쟁으로 노동자들의 처지가 개선되면 노동자들이 부패하거나 자본주의에 순응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노동조합 투쟁을 거부해 왔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계급 전체)의 이익이 인류의 이익이므로 노동계급의 이익은 자제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력하게 추구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혁명은 노동자들의 자기 희생을 통해 추구해야 할 추상적 목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이나 인류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가장 유력한 태도는 개혁주의자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노동조합의 긍정적 구실을 인정하지만, 아주 협소한 한계 안에서만 그렇다. 개혁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부문적·경제적 이익을 방어해야 하지만 더 광범한 정치 투쟁은 의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정치 정당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은 정당한 것이지만 계급을 뛰어넘는 더 광범한 국익에 종속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투쟁이 항상 경제적이기도 하고 정치적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또, 정치 투쟁의 무게중심은 의회가 아니라 작업장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국익 개념은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은폐하는 신화일 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조합 안에서 노동자들의 경제적 전투성을 고양시키고 노동자들이 정치적 문제들을 제기하도록 고무하면서 끊임없이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와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이 비록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필수적 구실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노동조합이 노동계급에게 필요한 유일한 조직 형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한계

첫째, 노동조합의 기본 활동은 자본주의 안에서 노동자들의 노동력 판매 조건을 둘러싸고 협상하는 것인 반면, 사회주의의 목표는 그런 노동력 판매를 완전히 폐지하는 것이다.

이 말은 노동조합 자체는 자본주의의 실질적 전복을 조직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 과제를 위해서는, 노동자들을 노동력 판매자로서가 아니라 생산자이자 사회의 잠재적 지배자로서 대표하는 노동자 평의회도 필요하다.

둘째, 기업주들과 효과적으로 협상하려면 노동조합은 관련 산업·업종·작업장의 모든 노동자들을 그들의 정치 의식 수준이나 전투성과는 무관하게 최대한 많이 광범하게 포괄하려 애써야 한다.[모든 법칙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인데, 여기서 예외는 조직된 파시스트 노동자들이다. 그런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서 쫓아내야 한다 ― 몰리뉴]

이런 필연적 포괄이 뜻하는 바는, 노동조합이 특정한 교육적·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조합은 노동계급 안에서 사회주의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 투쟁을 주도하거나 격렬한 충돌의 시기에 노동계급에게 정치적 지도력을 제공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과제들을 위해서는, 모든 산업과 직장의 경계를 뛰어넘어 노동계급의 가장 의식적이고 헌신적인 인자들을 결집시킨 혁명정당이 필요하다.

노동조합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는 결정적이고 고유한 특징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노동조합 관료주의에 대한 분석이다.

많은 나라에서 많은 쓰라린 경험들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사회주의 혁명뿐 아니라 자기 조합원들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 투쟁조차 배신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 줬다. 노동조합 최상층 지도자들뿐 아니라 노조 상근간부 전체가 그런 경향을 보인다. 그런 경향은 너무 확고해서 도저히 개인적 결함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경향은 노동조합 상근간부들이 독자적인 사회 계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해관계는 기층의 현장조합원들과 다르다. 그들이 노동계급과 사용자들 사이에서 중재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노조 상근간부들은 일반 조합원들보다 임금도 더 많고 근무조건도 더 낫다. 그리고 심지어 협상이 잘 못 돼서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줄고 노동시간이 늘어나더라도 그들 자신은 일자리를 잃거나 더 오래 일하지 않아도 된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은 철저한 배신자나 사용자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자기 조합원들의 지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조합원이 아무도 없다면 그들은 봉급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사용자에게도 쓸모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때로는 저항을 조직하고 좌파적 언사를 늘어놓다가 때로는 후퇴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발 밑에서 무너뜨린다.

노동조합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전략은 이 확고한 경향을 고려해야 한다. 사회주의 투사들은 노조 지도자들과 상근간부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는 그들과 협력하고 그들이 동요하거나 배신할 때는 맞서 싸우는 법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는 노동조합 투쟁을 지지하고 노동조합 자체에서 활동하는 것뿐 아니라 노동조합 안에서 노조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필요하다면 그들로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현장조합원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도 포함된다.

※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