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경험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가장 흔한 반박은 두 가지다. 첫째는 마르크스주의는 인간 본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주장이고 둘째는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것을 경제로 환원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이 두 주장은 서로 모순된다. ‘인간 본성’론은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경제 환원론은 마르크스주의가 사상과 이념의 역사적 구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모순을 흔히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이 두 주장이 서로 다른 영역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론은 주로 일상적 정치 토론과 논쟁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경제 환원론은 학술 세계의 이론적 비판에서 가장 흔하다. 그래서 나는 이 두 주장을 따로 따로 다루려 한다.

우리는 먼저 인간 본성론이 그럴 듯한 주장임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 본성론이 그럴 듯한 이유 중 하나는 그 연원이 아주 오래됐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론에 담긴 사상은 수백 년 동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이었고 수천 년 동안 지배계급 이데올로기의 핵심이었다. 예컨대, 기독교는 사람들이 모두 ‘원죄’를 갖고 태어났으며, 따라서 내세에서 사람들을 구원할 교회 권력과 현세의 질서를 유지하는 국가 권력이 모두 정당하다고 가르쳤다.

인간 본성론이 그럴 듯한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역사적 경험에 부합하는 것처럼, 즉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과거의 노력이 모두 실패했다는 단순한 사실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론이 그럴 듯한 마지막 이유는 우리의 많은 개인적 경험과 잘 맞는 듯하기 때문이다. 즉, 직장 동료들이 우리를 함부로 대하거나 친구들이 우리를 무시하거나 주변 사람들이 우리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 등은 모두 인간 본성에서 비롯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럴 듯하다고 해서 인간 본성론이 옳은 주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마지막 영역, 즉 개인적 경험의 영역에서 우리는 인간 본성론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가장 명백한 증거를 발견한다.

일상 생활에서 이기주의·냉담함·몰인정 등등의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정반대의 사례들, 즉 곤경에 처한 낯선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자신의 목숨을 걸고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거나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목숨을 바치는 등 친절함·자기희생·연대의 사례들을 일상 생활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 본성이 정말로 이기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행동하도록 설계돼 있다면, 그런 이타적 행동은 결코 존재하지 않거나 기껏해야 지극히 드문 일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경험이 실제로 보여 주는 것은 인간 본성이 이기적 행동과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 냉담함과 헌신, 비겁함과 용기를 모두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우세한지는 상황과 조건에 달려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의 행동이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행동이라는 것과 자본주의는 대체로 사람들로 하여금 이기적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기적

물론 자본주의 체제는 아이들에게 도덕과 이타주의를 설교한다. 그러나 학교가 실제로 어떻게 조직되는지를 살펴 보라. 아이들은 반에서 1등을 해야 한다는(또는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좋은’ 학교에 진학해야 하고 명문대에 입학해야 한다는, 좋은 직장을 구해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린다. 그리고 이런 이기적인 목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혹독한 비난을 받는다.

그것은 단지 조기 사회화나 유년기 성장 조건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어른이 돼도, 자본주의 체제는 사람들에게 살아남거나 사회적 존경을 받고 싶으면 이기적으로 행동하라고 거의 강요하다시피 한다.

자본가들은 자본가이기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면 이윤 극대화를 위해 분명 탐욕스러워야 한다. 자본가들을 위해 일하는 경영자들은 이윤/탐욕 의제를 고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고될 것이다.

오직 노동자들만이 연대를 향한 압력을 받고 연대에 관심을 갖는다.(그것이 바로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계급인 이유이다.) 그러나 그런 연대는 (“호전적”이라거나 “말썽을 낳는다”는) 중상모략을 당할 뿐 아니라 불법으로 처벌받기 일쑤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놀라운 일은 우리가 목격하는 자기희생과 사회적 책임이 드물지 않고 아주 많다는 것이다.

또, 훨씬 더 광범한 사회적·역사적 경험을 봐도 마찬가지다. 프랑스·러시아·중국 혁명과 다른 많은 혁명들의 실패 ― 나폴레옹이나 스탈린 체제 같은 독재 정권의 부활 ― 를 인간 본성, 즉 나쁜 지도자들의 탐욕이나 야심 또는 대중의 무관심이나 타성으로 설명한다면, 그런 혁명 자체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어찌 보면 인간의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인간 본성과 양립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일들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그렇게 설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한다. 인간 본성론을 주장하는 대다수 사람들이 거의 제기하지 않는 그 질문은, ‘인간 본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또는 인간 본성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인간 본성’은 모든 인간, 또는 거의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들과 인간 종(種)을 다른 종과 구분짓는 특징들의 총체를 일컫는다.

그런 보편적 특징들(특히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완벽한 목록은 분명히 엄청나게 길겠지만, 사회주의 문제와 관련된 특징들은 얼마 안 되고 꽤나 간단한 것들이다. 무엇보다, 그런 특징들은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인간의 생존을 위해 충족돼야 하는 수많은 기본적 필요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인간에게는 공기·물·음식·옷·집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필요하고, 섹스도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인간의 핵심 특징들은 이런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단, 즉 집단적인 사회적 노동과도 관계 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노동은 언어를 발전시키고 사회적 의식을 확장시킨다.

인간 본성을 이루는 이런 공통의 특징들이 과연 평등한 사회나 사회주의를 가로막는 장애물인가? 역사(부르주아의 신화가 아니라 실제의 역사)와 이성은 모두 이 질문에 분명하게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사회주의

역사적 근거는 인류가 존재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즉 농업이 발전하기 전 수십만 년 동안 ‘인간 본성’이 처음 만들어지고 확립되고 있을 때 사람들은 아주 평등한 사회에서 수렵·채집 활동을 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그 때는 사람들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 지도자들과 지도를 받는 사람들로 나뉘지 않았고, 재화는 공유의 원칙을 바탕으로 분배됐다.
이성적 근거는 우리가 오늘날의 세계를 힐끗 보기만 해도 자본주의는 풍부한 자원이 있는데도 최고 호황기에조차 대다수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전쟁과 기후 변화 등을 통해) 기존의 제한적 공급마저 위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사회주의의 출발점과 존재 이유는 인간 본성의 기본적인 물리적·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을 계획하는 것이다.

인간 본성은 사회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주의야말로 인간 본성이 절실히 요구하는 것이다.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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