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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신경제’

추락하는 ‘신경제’

이정구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7월 초 미국 다우존스 지수와 나스닥 지수가 각각 9천 포인트와 1천4백 포인트 밑으로 떨어지면서 1997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증시 폭락은 1997년 이후 이른바 ‘신경제’라는 것이 단지 금융 거품 성장에 불과했음을 보여 주었다. 모건 스탠리 증권사의 수석 경제학자인 스티븐 로치는 미국 경제가 올해 하반기에 내수 부진으로 다시 한 번 불황에 진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리먼 브러더스 증권사도 불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또다시 금리를 내릴 거라고 전망했다.

최근까지만 해도 미국 경제에 대해 장밋빛 전망이 난무했다. 전 세계 많은 애널리스트와 경제학자들은 미국 경제 호황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다섯 달 전에 이렇게 지적했다. “2001년 말 미국 경제는 연초 전망보다 인상적일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이는 지난해의 경기 침체가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버렸음을 암시한다.” 이 신문사의 유명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는 “경제 회복이 진행중이며, [불황에 대한 주장은] 겁먹은 어린이에게나 먹힐 동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사장과 애널리스트들은 경기 후퇴가 2000년부터 시작됐는데도 작년 9·11 테러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지금 다우존스와 나스닥 주가가 9·11 테러 때보다 더 폭락한 것을 그들은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주요 기업들의 회계 조작과 불법 행위 때문에 ‘주식회사 미국’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고 있다. 엔론에 이어 타이코, 글로벌크로싱, 월드컴, 머크, 제록스 등 ‘신경제’의 총아들이 줄줄이 분식 회계로 파산 절차를 밟거나 조사를 받고 있다. 이 기업들의 가장 큰 ‘기술 혁신’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은 이윤을 있는 것처럼 꾸미는 회계 조작이었다.(관련 기사 ‘미국식 기업 모델의 파산’ 참조)조지 W 부시는 “썩은 사과가 증시를 망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경제의 선두주자’로 칭송받던 기업들의 회계 부정이 소수의 탐욕 때문만은 아니다. 이런 위기는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1996년부터 2000년 중반까지 미국 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처럼 보였다. 미국 경제가 세계 시장의 성장 가운데 4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호황의 토대는 불안정했다.

호황기에 많은 기업들은 고수익을 기대하며 생산을 늘렸다. 기업들은 서로 경쟁자들보다 앞서기를 바랐다. 이윤이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주가도 덩달아 치솟았다. 고평가된 주가 덕분에 기업들은 더 많은 돈을 빌려 생산 시설을 확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기업의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1998년 이래로 통신 관련 기업들의 부채 규모가 지난 2백년 동안 영국 정부의 누적 부채 규모보다 더 빨리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돈을 빌려 생산을 늘리는 추세는 광기에 가까웠다. 통신 산업의 경우에도 기업들은 인터넷과 휴대폰 설비 투자에 미친 듯이 뛰어들었다.

하지만 미국 기업들은 이윤율이 1997년 말을 기점으로 계속 하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IMF는 세계경제전망 보고서의 미국편에서 “민간 부문의 투자는 과잉 투자와 취약한 수익성 때문에 제약을 받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취약한 수익성

민간 경제 연구소 컨퍼런스 보드는 “올 상반기 내내 소비가 경기 회복의 원동력이었다”며 소비 지출 확대가 경기 불황을 막아줄 거라 내다봤다.

실제로 미국의 올 1분기 성장이 예상보다 높은 5.6퍼센트 성장을 한 데에는 자산 효과가 컸다. 9·11 테러 이후 주가가 상승하자 부유해졌다고 생각한 가계가 더 많은 대출을 받아서라도 소비 지출을 늘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IMF의 세계 경제 전망 보고서를 보면 이 추세가 계속될지 의문스럽다. 1998∼2000년에는 개인의 가처분 소득과 소비가 비슷하거나 가처분 소득이 조금 높았다. 그러나 그 뒤에는, 소비가 가처분 소득을 앞질렀을 뿐 아니라 그 격차도 커지고 있다. 이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근래 들어 가장 낮은 금리를 유지해 부유한 소비자들의 소비와 대출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IMF는 최근 증시가 폭락해 자산이 줄어들었지만 부동산 가격이 자산 감소분을 벌충해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부동산 부문은 이미 과열 징후를 보이고 있다. 지난 5월 주택 가격은 4.2퍼센트 올랐다. 이는 1980년대 말 거품호황 때의 수준을 넘어서는 수치다.

가처분 소득과 소비 사이의 괴리는 경기 회복의 버팀목처럼 언급되는 소비 증가 추세가 올 하반기에도 이어지기는 힘들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소비 증가는 미국 경제에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소비 증가가 거대한 국제수지 적자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4월, 소비재 수입이 그 전달에 비해 무려 10.7퍼센트나 늘어나 무역적자는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지금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액은 국민소득의 4.5퍼센트에 이른다.

무역수지 적자폭이 늘어나고 주가가 폭락해 미국에 흘러든 자금은 빠져나가고 있다. 그 바람에 미국의 달러화는 지난 17개월 동안 유로화에 비해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강한 달러화는 그 동안 미국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나타내는 주요 상징 중 하나였다. 1995년 역(逆)플라자 합의 이후 미국은 강한 달러 정책을 통해 세계의 유휴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유입된 자금은 미국 재무부 채권으로 바뀌었다. 이에 기초해 통화량이 늘고 신용이 확대되면서 1997년 이후 실물 경제에서는 이윤율이 저하했지만 금융 부문에서는 주가 상승과 자산 효과를 통한 거품 성장이 가능했다.

1997년 동아시아가 위기에 빠졌을 때도,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멘트(LTCM)가 파산했을 때도, 미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97년 하반기 그린스펀 FRB 의장이 연방기금 금리를 세 차례나 인하했고, 미국 정부가 LTCM에 구제금융을 제공해 파산을 모면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전망최근 몇 달 동안 미국의 제조업 산출량, 제조업 가동률 같은 생산 지표가 거의 정체 수준이다. 또 공급관리협회가 발표하는 제조업 업황(業況) 지수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이런 현실 지표는 미국 경제가 올 하반기에는 뚜렷하게 회복될 거라는 주류 경제학자들의 전망과 어긋난다.

이미 1990년대에 이루어진 과잉 투자 때문에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 경제의 수익성이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전의 거품 호황의 규모를 고려하면 미국 경제 불황은 지금보다 더 깊어질 가능성이 많다.

장래 고수익을 예상하고 돈을 마구 빌린 기업들의 자금 사정이 나빠지면서 자금 시장이 먼저 얼어붙게 될 것이다.

1990년대에 일본과 유럽이 정체하고 있을 때 미국은 호황을 유지해 세계 경제가 더 큰 침체로 빠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그런데 지금 미국 경제의 불황은 전 세계에 파장을 미치고 있다. 회복의 기미를 보이던 일본 경제가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위기감에 싸여 있다.

미국을 수출 시장으로 삼고 있는 한국 같은 신흥 공업국들이 미국 경기 후퇴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다. 미국의 뒷마당인 남미에는 이미 미국 경제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주가 폭락과 달러화 가치 하락이 서로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경우, 비록 가능성은 적지만 미국 경제는 급격한 금융 공황을 맞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금융 공황이 미국을 포함한 세계 경제를 곧장 파국으로 치닫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시는 9·11 테러 이후 세금과 금리 인하, 재정지출 확대 등의 경기부양책을 발표해 경제가 불황으로 빠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앞으로도 부시는 경제 위기에 직면해 케인즈주의 정책을 통해 불황의 심화를 막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부시는 정치적으로는 부패와 금융 사기로 인한 정당성 위기, 경제적으로는 적자 재정으로의 반전과 민간 부문의 엄청난 누적 적자 때문에 경기부양 정책에서도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장래 미국 경제는 추세적으로 하향 곡선을 그리면서도 급격한 하락과 부분적이고 힘없는 회복이 번갈아 가며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미국 경제의 위기는 정치 불안정으로 이어져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전쟁과 반란 같은 격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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